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고려]]의 제17대 대왕. [[묘호]]는 '인종'(仁宗), [[시호]]는 '공효대왕'(恭孝大王). [[휘]]는 '해'(楷). 인종의 치세는 [[정치]]적으로 끊이지 않는 혼란의 연속이었는데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 굵직한 [[역대급]]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면서 바람잘 날이 없었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궁궐]]이 [[불]]에 타서 전소되는 엄청난 화를 입었으며, 묘청의 난 당시에는 [[묘청]]이 [[평양시|서경]]의 주민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거의 [[내란]]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제8대 [[현종(고려)|현종]] 이후 100여 년간 지속되었던 고려의 [[전성기]]이자 [[태평성대]]가 이 시기에 [[종말]]을 고했으며, 인종 대에는 그동안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아래에서 축적되고 있던 불합리함과 그에 대한 불만도 한꺼번에 본격적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제6대 [[성종(고려)|성종]] 때 [[음서|음서 제도]]가 생기고, 성종 본인도 신권 우대와 [[신분제]] 강화를 너무 지향해서 문벌귀족 [[사회]]가 등장했던 것은 맞지만 예종 시기까지만 해도 고려 국왕의 [[왕권]]이 강했으며 약하지 않았었다. 제15대 [[숙종(고려)|숙종]]과 제16대 [[예종(고려)|예종]]의 왕권은 [[신하]]들이 함부로 나설 수가 없었을 만큼 막강했던 편. 그 시절까지만 했어도 [[군약신강|신권이 왕권보다 더 강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비록 일생을 정치적 혼란에 시달려야만 했었고 본의아니게 고려의 쇠퇴 계기를 제공해버렸지만 [[군주]]로서의 자질은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인종이 이자겸의 세력을 제거했을 때 반역을 했던 이자겸과 일족을 주살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인종은 이자겸이 한때나마 자신의 [[장인어른|장인]]이었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였기에 차마 죽일 수 없다하여 [[유배]]형을 내리는 데 그쳤고, 이자겸의 [[가족]]들도 건드리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종을 '자비있고 덕있는 왕'이라 칭송하였는데 그래서 '인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그 외에 공이 있다고는 하나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당장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척준경]]을 끝까지 옹호해주며 유배를 보내고서도 편히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거나 이자겸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이자겸의 [[딸]]들을 보살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성]]은 좋은 사람이었던 듯.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역자들과 일족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다며 인종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척준경이 나중에 한 짓을 보면 척준경 건에 대해서는 실수한 것일 수도 있으나 이자겸 딸들의 경우, [[아버지]]까지 저버리고도 [[남편]]을 지켜준 셈이니 우유부단하게 판단해서 그녀들을 봐줬다고 해도 뭣하다. 한마디로 인종의 비들(이자겸의 딸들)은 반역자의 자식이기는 했지만 반역에 참가하기는 커녕 인종에게의 충의와 지조를 지켜가며 그의 목숨을 보호해줬으니 무차별하게 처벌했다면 [[욕]]을 먹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인종은 묘청 등을 비롯한 신진 일파들을 측근 세력으로 키워보려고도 해봤다. 그러나 [[개성시|개경]]파 [[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집권층의 반발에 부딪혀서 실패했던데다 묘청 또한 반란을 일으킨 뒤 제거되면서 씻을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추측된다. 인종은 [[권력]] 다툼과 2번의 큰 [[반란]]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일생 동안 왕위를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인지 치적을 남길 새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인종의 업적은 형부(刑部)에 속해 있었던 율학을 [[국자감]][* 제1대 [[태조(고려)|태조 왕건]] 때 경학(京學)이 있었는데 [[성종(고려)|성종]](成宗)이 관제를 [[개혁]]하면서 경학을 국자감이라 개칭하였다.]으로 옮겨 경사 6학[*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으로 정비했다는 점과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했다는 점 정도였으니 당시에 김부식 같은 대[[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인종의 치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고려 전기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 시대라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종 본인은 국왕으로서의 능력이 부족했을지언정 [[국정]]을 잘 돌보기 위해 《삼국사기》 편찬, 경사 6학 정비, <유신지교 15개조>를 발표하는 등 평생 동안 [[나라]]를 돌보는데 최선을 다했다.인종이 발표한 유신 [[개혁]]안 15개 조항. 그 내용은 재변이 연달아 일어나고 이자겸의 난으로 민심이 어지러워진 것은 국왕 자신의 [[허물]] 탓이라고 했고, 이에 자책하면서 중앙과 지방에 정치 개혁안을 내린 것이었다. 그의 집권기까지만 했어도 고려의 [[태평성대]]가 표면적으로는 유지되는 듯 보였다. 인종 재위기에는 지배층간의 분열 역시 심화되어 결국 다음 국왕인 [[의종(고려)|의종]] 때부터 고려는 [[무신정변]] 등의 온갖 정치적 [[변란]]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쇠락의 길로 빠져들게 되면서 고려 역사의 전개가 완전히 뒤틀리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사실 고려의 쇠락은 인종보다는 아들 의종의 책임이 훨씬 막대한 게 사실이다. 하필 의종이 정무에 관심은 전혀 없고 [[뽀로로|노는 것이 제일 좋아]] 20여년간 놀기만 한 놀자파 군주였으니. 인종은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오르면서 일생을 권력 다툼에 시달려야 했고 그의 사후에서도 [[정변]]이 일어났으니 개인적으로는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으며 평생 국정에 집중한 것으로 볼 때, 의지 만큼은 어느 명군들 못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