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기타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고려 인종 시책.jpg|width=100%]]}}} || || '''{{{#670000 인종 시책}}}'''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국보94호참외모양병.jpg|width=100%]]}}} || || '''{{{#670000 인종의 능인 장릉에서 출토된 [[청자 참외모양 병]]}}}''' || * 인종은 현재 [[북한]]의 영토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있는 장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고려왕릉]]들처럼 이미 구한말 혹은 [[일제강점기]] 때 도굴당했다. 위에 있는 사진 두 장은 [[대한민국의 국보|국보]] 제94호인 [[청자 참외모양 병|청자참외문양꽃병]]과 인종의 '옥돌 <시책>'으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정식 학술 발굴에 의한 출토품이 아니고, 1916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에게 구입하면서 유물대장에 인종의 '옥돌 <시책>'과 함께 장릉 출토라고 기록해 놓아 신빙성이 아주 높다. 또 이것 외에 알려진 부장품으로 질이 우수한 청자 접시 5점 1세트, 청자합, 청자 받침대, 뚜껑 있는 청자잔, 숟가락과 젓가락, 청동 내합과 옥돌 외합, 청동 인장 등도 있다. 정작 [[도굴꾼]]이 파냈다는 장릉의 위치는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대로 개성 서쪽 벽곶동으로만 추정했다. 1945년 [[광복]] 이후 북한에서 이에 대해 조사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 《[[송사]]》에 의하면 [[태자]] 시절 금나라가 발흥할 때 북송의 [[외교]]정책에 대해 조언했다고 한다. 1118년 고려가 북송에 의관을 파견할 것을 요청했는데 당시 11세였던 인종이 의관에게 "[[송나라]]가 [[금나라]]와 손잡고 [[요나라]]를 정벌할 것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금나라를 막을 수 있는 방패가 될 수 있다"라고 했다. 의관은 1119년 송나라로 귀국했고, 이 의견을 전달했지만 송나라 황제 [[휘종(송)|휘종]]이 의관이 [[정치]]에 관여한다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후 북송은 금나라의 도움으로 요나라를 [[멸망]]시켰고, 그 결과는 [[정강의 변]]과 [[남송]]의 건국이었다. 사실 이 조언은 11세인 인종의 개인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제왕학|태자 교육]]의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종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는데 성실했고, [[군주]]의 자질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며, 인종 때까지는 군주들이 노력을 많이 했다. 문제는 [[의종(고려)|자식]]에게는 그러한 능력과 의지를 전달하지 못했다. * 《고려사》 <악지> -아악- 부분에는 인종의 [[태묘]] 악장 제목이 적혀있다. 제목은 <이안>(理安)이고, 가사는 빠져 있다. * 여러가지 의미로 고려 왕조의 중간에 위치한 임금이다. 인종은 34명의 왕 중 딱 17번째의 임금이다. 18대 왕 의종부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까지 한 명도 빠짐없이 인종의 [[후손]]이므로 고려 왕조의 [[중시조]] 역할을 하였고, 인종 이후를 기점으로 고려가 쇠락했다. 즉, 다시 말하면 1대~17대:발전 기간, 18대~34대: 쇠퇴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 [[송나라|북송]] 말기의 [[관료]]였던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에 지은 《[[고려도경]]》에서 인종의 [[외모]]와 인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갔을 때, 인종은 재위 1~2년차 14세의 [[소년]]이었는데 서긍은 그 외모에 대하여 몸집은 작았으나 용모가 아름다고 풍만했다고 했으며,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자비롭고 배운 것이 많았다고 했다. 또한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격하고도 명백히 했다고 묘사했고, 그 몸가짐이 단장하면서도 성인의 기풍이 있어서 과연 고려의 임금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해(楷)는 왕우(王俁)의 세자이다. 임인년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키는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찐 편이었다. 성격이 지혜롭고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 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지람을 당했다.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 >'''《[[고려도경|선화봉사고려도경]]》 제2권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369A_0030_010_0040|<세차>(世次)]]''' * 인종 사후로 고려의 왕위 계승은 매우 뒤틀리게 된다. 그 이후 정상적인 즉위와 퇴위 과정을 보낸 이는 거의 없었는데 고종 정도가 유일하고[* 다만 고종은 재위기간 내내 꼭두각시 노릇이었기에 즉위나 퇴위에서만 정상이었지 인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수모를 겪었다.] 나머지는 다 그 계승과 물러나는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 의종(강제퇴위)-명종(강제옹립, 강제퇴위)-신종(강제옹립)-희종(강제퇴위)-강종(강제옹립)-고종-원종(강제퇴위 1번)-충렬왕(강제퇴위 1번)-충선왕(강제퇴위 1번)-충숙왕(퇴위 1번)-충혜왕(강제퇴위 2번)-충정왕(퇴위당한 아버지 대신 즉위)-충목왕(강제퇴위)-공민왕(강제즉위, 암살)-우왕(이인임에게 옹립, 강제퇴위)-창왕(강제옹립, 강제퇴위)-공양왕(강제옹립, 강제퇴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