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생애 == >"고선철왕(古先哲王)들은 방하(方夏)[* [[천하]]의 다른 말.]를 보살필 땐 반드시 저이(儲貳)[* [[태자]]의 다른 말.]를 세워 천서(天序)를 잇게 했다. 감히 사사롭게 편애하는 마음으로 세운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포용하여 국본(國本)을 다지고자 한 것이다. > >짐(朕)이 자리에 오른 뒤, 계속하여 빼어난 후사를 찾고 있었다. 점을 쳐보기도 하고 신료들에게 물어보기도 하여 좋은 날을 정해 오늘 휴명(休命)[* 아름다운 명령.]을 기쁘게 펼치겠다. > >아(咨)! 너(爾) 원자(元子) 구(構)는 중용의 순수함과 산악의 굳은 자태를 가졌다. 인의효우를 아는 그 마음은 타고 난 것이다. > >(생략) > >이에 동조의 자리(東朝之位)를 쥐게 하니, 조종(祖宗)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신을 보내 지절(持節)을 들고 널 왕태자(王太子)로 책명한다. > >오호라(於戱)! 경손함과 진중한 마음가짐만이 고귀함을 드러낼 수 있다. 넌 사부의 훈계를 지키고 향락을 경계하며 바른 사람이 아니면 거부하고 바른 소리가 아니면 듣지 말거라. 네가 좋은 풍습을 보여 만방(萬邦)을 보다듬어야 짐의 아들이 고선철왕들과도 견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다. 말을 듣고 영원히 복을 누리거라. >---- > - 《고려사》 <예종 세가> 중 인종의 왕태자 책봉문. 《고려사》 <[[김인존]] 열전>에 따르면 예종은 왕태자 책봉을 [[서경(고려)|서경]] [[장락궁]]에서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김인존의 반대로 개경에서 치르게 되었다. 만약 서경에서 태자 책봉식이 거행됐다면 목종과 더불어 서경에서 후계자가 된 국왕이 되었을 수도 있다. 개경 밖에서 후계자가 된 국왕으로는 [[고려궁지|강도]]에서 [[황태손|태손]] 및 [[태자]]가 됐던 [[충렬왕]]도 있다. 만 6세에 태자가 되었으며 7년 동안 [[수춘궁|동궁]]에서 거처했다. 예종은 인종의 나이가 어린 것을 걱정해 붕어하기 며칠 전 미리 한안인[* 韓安仁. 예종이 태자를 부탁한 고명대신 중 한 명으로 조정에서 존재감이 컸다. 이후 다른 고명대신들과 내분이 생기고 외척 이자겸에게 밀리면서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을 통해 [[국새]](國璽)를 전달하고 직접 인종에게 유언을 전했다. 신하들을 모두 소환해 유조를 선포했고, 인종은 예종이 붕어하기 전 며칠간은 권국사(權國事)가 되어 국왕 아래, 세자 이상의 지위에 올랐다. 이렇게 1122년 부왕인 [[예종(고려)|예종]]의 갑작스러운 붕어로 인해 권국사 왕해는 만 13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국왕]]의 자리에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