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재위 초기 === 그러나 인종이 왕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사]]》<인종 세가> -총서-에 >예종 17년([[1122년]]) 4월 병신일에 예종이 붕어하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 숙종의 아들은 예종, 왕필(차남, 일찍 죽음), 원명국사(3남, 이미 출가), 왕교(7남, 일찍 죽음)를 제외하고도 왕보(4남), 왕효(5남), 왕서(6남) 3명이나 있었다.]은 왕[* 인종을 의미.]이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기도 했으나,''' 평장사[* 당시 이자겸은 [[중서문하성]] 소속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였다.] [[이자겸]]이 왕을 받들어 중광전[* 重光殿. [[만월대|본궐]]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 본궐의 여러 편전 중 제1편전이라 부를 수 있다.]에서 즉위시켰다. 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면 외할아버지인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 것으로 유력하게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훈요십조]] 등으로 인해 마땅히 승계할만한 자식이 없거나, 있더라도 문제가 있는 경우에 형제가 상속받는 케이스가 자주 있었다. 덕종은 슬하에 자식이 없어 동생 정종이 계승받았고, 정종은 아들들의 나이가 어려서 문종이 바통을 넘겨 받았다. 2대 혜종의 아들 역시 나이가 어려 대신 정종이 즉위했고, 정종의 아들도 어려 광종이 즉위했다. 선종의 아들 헌종도 몸이 약해 숙종이 보위를 찬탈한 적이 있다. 이러한 연유로 인종의 입지는 위태로웠고 외조부인 이자겸은 인종의 정적이 될만한 이들을 조정에서 없애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고려사]]》 <숙종 종실 열전>을 보면 가장 위험했던 4남 왕보는 [[경상도]] [[성주군]], 5남 왕효는 남부 지방으로 유배를 가듯 떠났고 6남 왕서는 자기 사병을 해산시키고, 손님을 받지 않으며 [[술]]에 미쳐 사는 척해 이자겸의 마수에서 피해갈 수 있었다. 겨우 왕실이 조용해졌지만 왕이 어린데다 외조부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외척의 힘이 커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왕을 대신해 권력을 한 손에 움켜 쥐고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며 갖은 횡포를 부렸다. 게다가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강제로 인종과 [[혼인]]시켰는데 본래 고려 왕실에 [[근친상간|근친혼]]이 성행하고 있었지만 이자겸의 두 딸은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지라 당시 예법으로도 인종과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