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여진과의 관계 === 인종이 즉위한지 1년 후인 1123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는 [[태조(금)|금 태조 완안아골타]]가 붕어하고, [[태종(금)|금 태종 완안오걸매]]가 즉위했다. 이 시기에 금나라와 [[북송]]은 번갈아가며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동맹]]을 제의했다. 7월에는 합문지후 후장이 이끄는 60여 명에 이르는 북송 사신단이 금나라를 공격해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들어왔다. 8월에는 금나라 사신 고백숙 등이 고려에 와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주민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금 태종의 의사를 전달했다. 인구가 감소했던 고려는 옛날부터 전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 오는 북방 민족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고려는 끝내 이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또한 금 태종은 인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요나라]] [[천조제]]가 [[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요나라를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요나라 황제를 잡지 못했다" 고 말했다. 요나라 황제도 도주했으니 이제는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황제 등극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금 태종은 1125년 무주에서 요나라 황제인 천조제를 사로잡았고, 결국 요나라는 태조 [[야율아보기]]가 건국한 이후 9대 219년만에 멸망했다. 1125년 금 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표문|표]](表)가 아니고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사대|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인 1126년 조정 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논의했다. [[윤언이]]를 위시한 대다수는 [[오랑캐]]와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실권자 이자겸과 [[여진]] 정벌에 참여했던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서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성계의 [[제2차 요동정벌]] 4불가론 중 하나와 유사)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 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전면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고 칭하는 등 금나라와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