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고려) (문단 편집) === [[이자겸의 난]](1126년) === 한편 인종은 만 18세가 되던 해에 외조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횡포를 보다 못한 나머지 몰래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고위 무관 최탁, 오탁, 권수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모두 제거하라고 사주했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이자겸은 숭덕부(인종이 내린 이자겸의 관저)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가졌으며, 자신과는 사돈지간이었던 [[척준경]]에게 군사를 내주고 궁궐로 보냈다. 척준경은 궁궐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역적들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만월대|본궐]]에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함부로 궁성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얼마동안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궐내에서 이자겸의 수하들이 제거당하는 소란 통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과 동생 [[척준신]]이 살해당하는데, 궁밖에 내던져진 시체들을 척준경의 부하들이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척준경이 공격을 명하자 궁궐은 불타버리고 지낼 곳이 없어진 인종은 외조부에 소환당해 [[연덕궁|남궁]]에 갔다가 이자겸의 집(개명택)에 머무른다. 이것도 호위대와 같이 간 것도 아니라 '''왕이 호위병도 가마도 없이 걸어서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은 이제 본격적으로 왕이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한편, 인종을 독살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인종의 왕후였던 두 딸이 독이 든 떡을 땅에 흘리고, 탕약을 실수로 떨어트린 척하고 깨먹는 등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두 왕후는 이자겸이 축출당한 후 궁에서 쫓겨났지만, 인종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보답인지 반역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노비나 가택을 하사 받는 등 꽤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한다. 한편,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간의 사이가 틀어졌음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남몰래 [[최사전]]을 보내 척준경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편 [[조서]]를 내려 그를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분을 일으킨 덕분에 결국 이자겸은 축출되고 만다. 이와 관련해서도 엄청난 기록이 있는데 척준경이 인종을 모시고 내전으로 들어갈 때 방망이 하나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이자겸 측의 군인들이 막아서자 '''그가 고함만 내질렀을 뿐이었는데도 감히 척준경 일행을 공격할 엄두를 못냈다고.''' 이후 자신의 외조부의 목숨을 거둘 수는 없었으니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보내 처벌을 유배 조치만으로 끝내고, 그 곳에서 사망하자 사후 관작을 어느 정도 돌려주었다. '검교태사 및 한양공'. 즉 명예 [[태사]]에 한양의 공작이다. 인종은 척준경의 공적을 치하하여 문하시중에 제수하려고 했으나 척준경이 거절했고, 대신 [[신흥사]] 공신각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아 명예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이후 서경파의 [[정지상]]의 주도로 신하들이 그를 극렬히 탄핵하자 척준경이 눈치를 채기 전에 기습적으로 체포, 삭탈관직하고 '귀향형'에 처했다. 이 유배지는 척준경의 고향 곡주였다. 척준경이 받았던 처벌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귀향형으로 죄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뒤 관직에 나올 수 없도록 한 형벌이다. 형벌이 끝난 뒤에도 관직에 복귀할 수 없다는 점이 특이한데 후에 이는 조선시대의 '귀양형'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1144년 척준경은 얼마 후 등창이 발병하여 사망했다. 드디어 최악의 외척 이자겸과 그 세력을 일소하는데 성공한 인종은 새롭게 국정을 이끌어야한다는 결심을 가졌고, 서경파 육성에 나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