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종(송) (문단 편집) == [[출생의 비밀]]? == 제3대 황제 진종의 여섯 번째 아들로 사실 막내이다. 그럼에도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태어난 진종의 아들들이 유년기를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와중에 유일하게 유년기 이상을 넘겨, 사실상 외동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휘는 수익(受益)이었고 궁 안에서 신비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진종의 [[후궁]] 이씨[* 아들 인종이 장의황후 이씨로 추존하였다. 장헌명숙황후 유씨(유아)가 덕비였던 시절 유아를 시중 들던 궁녀로 절강 출신이었다. 항주 일대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본래 사람됨이 장중하고 모범적이었으며 말수가 적은 미인이었다고 한다. 당시 덕비였던 유아는 이씨에게 진종 곁에서 침대를 관리하고 이불과 베개를 갈아주는 일을 하도록 했는데, 이때 진종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진종의 총애를 받음에도 아들을 낳지 못해 황후가 될 명분이 없던 유아가 일종의 씨받이, 대리모로 이씨를 진종에게 보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씨가 진종을 모시고 높은 누각에 올라갔다가 비녀를 떨어드렸는데, 비녀가 망가지지 않자 진종이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라 하여 가까이 하였다고 한다.]가 낳은 아들이었으나, 진종의 묵인 아래 진종의 황후였던 [[장헌명숙황후 유씨]]가 키웠다. 어린 인종이 적통은 아니지만 진종의 유일한 아들이니 적모가 키워야 한다는 명분이었다고. 이후 아들을 유아에게 빼앗긴 이씨는 인종과는 절대 대면하지 못하도록 조치받고 별궁에 유폐되어 살아야 했다. 이후에도 이씨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에 인종은 생모가 살아있을 적엔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해 얼굴도 몰랐고, 장헌황후가 친모인 줄 알고 자랐다.[* 진종 사후 수렴청정기 당시 유아의 권세가 워낙 막강했기에 어떤 신하도 사실을 말하지 못했고, 인종의 생모 신비 이씨도 아들의 황위와 목숨이 위험해질까 봐 황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았다. 신비 이씨는 황궁 내에서 자신의 사람을 만들어 세를 키우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궁에서 근무하던 남동생 이용화마저 관직을 잃고 도성 밖으로 쫓겨난 후, 홀로 냉궁에서 쓸쓸히 보내다 병을 얻어 명도(明道) 원년(1032) 2월 황궁에서 46세 나이에 사망했다. 나중에 인종이 외삼촌 이용화를 다시 궁으로 불러들였다.] 이렇게 태어난 직후부터 유아 손에서 자란 인종은 5살에 경국공에 봉해졌고, 수군왕(壽郡王)이 되었다가 고작 9살 나이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인종은 1033년 유아가 사망하고 난 뒤에야 자신의 생모가 신비 이씨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자신을 속았다는 사실에 진노하여 장헌황후 유씨와 그 일족을 처벌하려 하였으나, 자신의 생모가 죽었을 때 황후의 예를 갖추어서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유씨 일족을 용서하였다.[* 원래 장헌황후 유씨(유아)는 신비 이씨의 장례를 일반 궁녀의 장례대로 아무렇게나 치르려고 했으나, 후에 인종이 알게 되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재상 여이간의 충고로 황후의 예로 치러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때 여이간의 말을 들은 유아는 크게 화를 내며 "왜 내궁 일에 관여하려는거요? 궁녀 하나 죽은 것에 어찌 그리 깐깐하게 군단 말이오!"라고 말한 뒤 여이간에게 욕까지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이간이 나가서 가만히 오래 기다리자 이성을 찾은 유아가 다시 여이간을 불렀는데 이때 여이간이 "태후께서는 당신의 유씨 집안을 온전하게 보전하실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만약에 태후께서 유씨 가문의 대를 이을 생각이라면 마땅히 신비 이씨의 장례를 후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라고 충고했고, 그 말을 들은 유아는 태감 나숭훈(羅崇勛)에게 인종의 생모 장례를 황후의 예로 정중히 치르라고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이때도 유아는 도성 밖으로 나갈때 궁문으로 출관하지 못하게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여이간이 다시 유아를 찾아가 황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라고 충고해 신비 이씨의 관은 서화문으로 출관해 도성 밖 남쪽 홍복원 안에 안치되었다.] 이후 인종은 자신이 생모 이씨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며 [[포증]]에게 자신의 용포를 때리게 하여 불효의 잘못을 표시하였다고 하며 생모의 묘를 황후의 격에 맞게 다시 조성하고 황후로 추존해 장의황후라는 시호를 올렸다. 이어 장헌황후 유씨 생전에 관직을 잃고 도성 밖으로 쫓겨나 살던 외삼촌 이용화(李用和)를 황궁으로 불러 만난 뒤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인종은 생모 장의황후 이씨의 묘를 영정릉에 안장하고 외삼촌 이용화의 관직을 높였다. 더해 외가 이씨 가문을 황제 외가의 예로 후하게 대하고, 황실 사람 중 복강공주를 이용화의 아들 이위(李瑋)에게 시집보냈다.] 이 이야기는 송인종 시대를 다루는 중국 사극에서 각색되어 여러 번 채용되었으며, 유명한 드라마 에피소드로는 국내에서도 방영되었던 판관 포청천 시리즈의 [[이묘환태자]]가 있다. 그리고 신 칠협오의 인간도에서도 이묘환태자의 이아기가 각색되어 방영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