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인천광역시 (문단 편집) === 명칭 유래 === [[인천광역시|인천]]을 칭하는 단어로 역사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은 [[미추홀]](彌鄒忽)이다.[* 한 동안 역사 속에서만 남아있다가 2018년 7월부터 인천 남구의 새 이름이 [[미추홀구]]로 정해짐으로써 다시 명맥이 이어지고있다.] 미추홀의 홀(忽)은 [[고구려]]와 [[백제]]의 특징적인 지명어로서, 한자어 ‘성(城)’으로 쓰인다. 따라서 미추홀을 미추성으로 바꾸어 표기해도 무방한데, 실제로 [[광개토대왕릉비]]의 제2면 1행에 ‘미추성(彌鄒城)’이라는 표기가 나온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軍□□首攻取 …[*A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彌鄒城 …[*B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 [[백제]]를 말한다.]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A] 미추성 …[*B] 을 공격하여 취하고 (후략) 이후 고구려는 이곳을 매소홀(買召忽)이라 하였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는 미추홀(彌鄒忽)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며, 실제 발음은 ‘mit-kol/mi-kol’로 추정된다고 한다.[* 김종택(1999). 고대국어 음절 말 자음의 음성 실현. 한글(245), 5-20] 여기서 ‘mit’은 물(水)의 뜻을 가진 어휘로, 밑(本, 始, 底), 뭍(陸), 미르(龍), 믿-(信) 등의 다양한 어휘로 분화되는 어휘이다.[* ≪국어 어휘 분화의 기제; mit계 어휘 분화의 구조도≫(난정 남 광우 박사 화갑 기념 논총, 일조각, 1980)]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제도에 따라 [[한산주]] 매소홀현(買召忽縣)이 설치되었으며, 매소홀현은 [[경덕왕]] 때 한화(漢化)정책에 따라 이름을 고쳐 소성현(邵城縣)이 되었다. [[삼국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 현(縣)은 신라의 행정 구역으로 고구려 멸망 이후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권제삼십칠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으로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으니, 지금의 인주(仁州)이다.[* 邵城縣 本高句麗買召忽縣 景德王改名 今仁州][* 삼국사기 권제삼십오 잡지 제4 지리2 신라] >>경원(慶原)이라고도 한다. 매소(買召)는 미추(彌鄒)로도 쓴다.[* 一云慶原 買召一作彌鄒] 이후 [[고려]] 숙종(1095~1105) 때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왕후 이씨의 내향(內鄕)이었던 관계로 경원군(慶源郡)으로 개칭·승격되었다. 그 뒤 인종(1122~1146) 때에는 인종의 어머니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라 하여 인주(仁州)로 승격되었으며, [[이자겸의 난]]으로 [[인천 이씨|인주 이씨]]가 몰락하다시피 하였으나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칠대어향(七代御鄕)’이라 하여 문종에서 인종에 이르는 7대 동안 고려의 왕후를 배출한 지역이라 하여 경원부(慶源府)로 한 번 더 승격되었는데, 이는 [[공양왕]]이 [[신종(고려)|신종]]을 매개로 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경원부는 고려왕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하여 다시 인주군(仁州郡)으로 강등되었고, 태종 13년 주(州)자를 가진 도호부 이하의 군·현의 이름을 산(山), 천(川) 두 글자 중 하나로 개정토록 하여 현재의 인천으로 탄생하게 되어, 그날 (1413년 10월 15일)을 기려 ‘인천시민의 날’ 이 제정되었다.[* 사실 이 날은 음력이다.이 날을 당시 양력인 율리우스력으로 고칠 경우 율리우스력 서기 1413년 11월 8일이고 오늘날 그레고리력으로 고칠 경우 여기에 9일을 더한 1413년 11월 17일이 된다.][* 10월 15일로 시민의 날을 옮기기 전에는 7월 1일이 시민의 날이었다. 1981년 7월 1일 [[경기도]]에서 분리돼 [[직할시]]로 승격된 것을 기념했기 때문이다.] 인천을 한자로 仁(어질 인)과 川(내 천)으로 풀이하여,'''어진내'''로 순우리말화 할 수 있지만, 사실상 인천이라는 지명이 인주(仁州)에서 조선 태종 시기에 격하당해 주(州)에서 점을 세 개 뺀 인천(仁川)으로 바뀐 것이기 때문에 어진내를 대구광역시의 달구벌, 광주광역시의 빛고을처럼 사용하지는 않는다.[* 또한 대구는 원래의 우리말 이름인 '달구벌'을 그대로 음차하여 한자화한 것이지, 인천이나 광주처럼 억지로 한자어에서 순우리말을 만든 것이 아니다. 어진내의 용례로는 서구에 기반을 둔 감자탕 체인점(...)과 한 때 추진하던 어진내 300리 물길투어 정도가 있다.] 차라리 인주를 순우리말로 번역해 '어진골'이라 하면 모를까...인천광역시를 순우리말로 이를 때에는 [[고구려]] 때의 지명이었던 '''[[미추홀]]'''을 훨씬 더 많이 쓴다. 단, 인천광역시 전역을 미추홀로 칭할 때도 있지만, 새로 명칭 변경을 한 [[미추홀구]](舊 남구)를 뜻하는 경우도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