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인천광역시 (문단 편집) === 종교 === 대한민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가 가장 '''강세'''인 지역[* [[개신교]] 신자 비율 1위는 [[전북]]이고, [[천주교]] 신자 비율 1위는 [[서울]]이나, 개신교+천주교 신자 비율은 인천이 가장 높다.]. --차 타고 가다보면 한 블럭에 하나씩 [[교회]]가 보일 정도.-- 국가통계포털(KOSIS)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인천의 종교 인구는 117만명으로 개신교 64만명, 천주교 26만명[* [[천주교 인천교구]]의 소속 신자 수는 2015년 기준으로 49만 6,364명이란다. 인천교구의 관할 지역이 인천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천시]]와 [[김포시]] 전 지역, [[시흥시]] 일부 지역과 [[안산시]] 일부 지역까지 걸쳐진 것을 감안한다면, 교구 신자의 절반은 인천시민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 24만명 순으로 나타났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치면 90만명으로 [[불자#s-1|불자]]의 3배가 넘는다. 전통적으로 불교세가 강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울산광역시]] 등 [[경상도]]와는 완전히 180도 대조를 이룬다. 개신교만큼은 아니더라도 불교세가 제법 있는 [[서울특별시]]와 [[전라도]]에 비해 인천은 천주교와 개신교가 동시에 완전히 장악을 하고 있어서 불교세마저 전국 최하위다. 그래서 불교계에서는 인천을 불교 취약 지역으로 꼽고 있다. 가장 강한 종파는 [[장로회]]가 강세인 서울이나 [[경기도]] 등 수도권 내 다른 지역들과 달리 [[감리회]]다. 특히 [[강화군]]은 대한민국 관내 시군들 중 감리회의 교세가 가장 강한 지역이며, [[성공회]]의 교세도 강한 지역이기도 하다.[* 강화군 인구의 35%는 감리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대신 강화군에는 [[성결교회]], [[침례회]] 등은 매우 드물며, [[구세군]] 교회는 아예 단 한 곳도 없다. 애초에 강화군 뿐 아니라 인천광역시 자체가 구세군의 교세가 매우 취약한 곳. 그래서 강화군민들은 구세군 [[자선냄비]] 자체를 모르거나 생소히 여기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또 서해 최북단 [[백령도]]는 한때 섬 거주 인구의 95%가 [[천주교]] 신자였을 정도로[* 현재는 개신교 신자 수가 천주교 신자 수를 추월해 30% 정도가 천주교 신자 인구라고 한다. 물론 이 지역 역시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 인구를 모두 합치면 90%에 육박한다고 한다. 섬 지역에 있을 법한 민간 [[무속신앙]]이 이 섬에서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태고, 또한 이렇다 보니 기성 종교인 불교조차도 전혀 힘을 못 쓸 정도다.] [[천주교]]의 교세가 여전히 매우 강하다.[* [[백령도]]의 지역 행사 때 초청되는 지역 유지 명단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 옹진군수, 백령면장, [[해병대 제6여단|해병대 제6여단장]] 외에 백령성당 주임신부와 해병대 제6여단 [[군종 신부]]가 포함될 정도.] 개신교와 천주교 모두 인천 지역의 선교 역사가 매우 깊다. 개신교는 1885년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 부부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선교사가 인천에 들어와[* 이를 기념한 한국 기독교 100주년 기념탑이 중구 항동 중부경찰서 옆에 있다.] 서울과 인천에서 선교 활동을 한 것이 인천 기독교 역사의 시초로 여겨진다. 천주교는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3년이 지난 1889년 [[답동성당]]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퍼졌다. 다만 답동성당 설립 시점보다 훨씬 이전인 1830년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시기에 인천 출신 [[순교자]]가 있다는 기록을 볼 때, 19세기 초·중반에 인천에 천주교가 전래됐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및 감리교회인 [[내리교회]]가 [[중구(인천광역시)|중구]] [[내동(인천)|내동]]에 자리해 있고 설립일이 1885년으로 [age(1885-01-01)]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 한 분인 [[신홍식]](1872 ~ 1939) 목사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내리의 담임목사로 부임해(1922 ~ 27) ‘인천내리교회역사’(1923)를 직접 기록했다. 그것이 오늘까지 중요한 사료로 전승되고 있다. 중구 답동에 소재한 [[답동성당]]은 [[천주교 인천교구]]의 [[주교좌 성당]]이자 국가 사적으로, 19세기 말에 건축된 대한민국 성당 중 가장 오래 된 서양식 근대 건축물 중 하나이다. 서울에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이 있다면, 인천에는 답동성당이 있다. [[기독교]] 인구가 많고 기독교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렇다 보니 인천에서 [[성소수자]]들이 [[퀴어축제]]를 열려다가 기독교 단체와 시민단체 등의 격렬한 반대집회로 무산되거나 중단되는 일도 있었다.[* 이는 비슷하게 기독교 인구와 기독교 정신의 소유자가 많은 [[대전광역시]]도 마찬가지다. 다만 인천은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강세를 보이는 반면 대전은 개신교가 압도적이라는 것이 차이점. 참고로 대전은 국내 최초의 지역 [[개신교]] 연합단체가 [[6.25 전쟁]] 당시 창설한 곳이기도 하다.] 남동구 [[간석동#s-5]]은 '''모든 기독교 종파[* [[감리회]], [[장로회]], [[침례회]], [[성공회]], [[가톨릭]], [[정교회]], [[성결교회]], [[오순절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기독교대한복음교회]], [[루터교회]].]들이 밀집'''해 있다고 한다.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또한 인천의 이러한 기독교세의 강세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인데, 인천을 기반으로 둔 전/현직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종교도 절반이 개신교 아니면 천주교이며, 또한 역대 민선 인천시장들도 유일한 개신교도인 [[안상수(인천)|안상수]]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원 로마 가톨릭교도고, 불교도 시장은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