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해전술 (문단 편집) ==== 전쟁 초기 ==== >계속 밀고 가서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우리가 올라갔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 공산당]]이라고, 그래서 중공군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까지 UN군이 밀고 들어왔으니까, >위기감을 느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투병력을 파견하는데, >원래 중국 하면 [[삼국지]]! "지략이 뛰어나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 다 필요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인해전술'입니다. >얼마나 군인 숫자가 많았느냐면, 속설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는 게 아닙니까? >---- >[[https://youtu.be/PFXSqRWVxcc|설민석의 영화 국제시장 1부. 6.25전쟁과 흥남철수]][* 중국인민지원군 인해전술 신화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예시다.] 북진작전 시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의 병력은 약 33만명이었고, 이 중 북한까지 진격한 전방 부대의 규모는 약 13만명 정도이다. 반면 유엔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한반도에 개입한 초기에 중국인민지원군은 1제대가 18개 사단 규모의 18만 명, 2제대가 12개 사단 규모의 12만 명 정도로 합쳐서 30만명 규모였다. 이렇게 초기에는 규모 차이가 크지 않았으나, 중공군의 숫자는 계속 늘어서 70~80만 정도에 이르는 숫자가 한반도에 주둔하게 되고, 51년 춘계대공세 때는 70만의 대군이 동원되었으며, 중국측 자료에 의하면, 누적인원 총 298만명이 한국전쟁에 투입되었다고 한다.[[https://web.archive.org/web/20110715215412/http://www.nyconsulate.prchina.org/eng/xw/t31430.htm|#]] 중공군은 구대전법, 그러니까 큰 자루전법이란 전술을 사용했는데, 보병을 우회기동시켜 적 후방에 깊숙히 찔러넣어 퇴각로를 차단하고, 뱀이 아가리를 벌린 듯한 형상으로 포위한 뒤 적을 각개격파하는 것이다. 이러한 중공군의 전략은 소련군 식의 [[기동전]]을 전차가 아니라 보병의 발로 실행한 것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최초 돌파구를 만들기 위해 병력을 집중할 때나 깊숙히 우회기동한 부대가 포위섬멸에 나설 때 당하는 입장에선 말 그대로 중공군의 파도에 묻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인해전술로 인식됐다.[* 포위섬멸을 할 때면 중공군은 가진 무기의 사정거리에 따라 전투배치를 했는데, 제1선은 수류탄을 투척하고 제2선은 기관단총을 이용한 돌격, 그리고 제3선은 소총이나 기관총 등 소총탄을 사용하는 사정거리가 긴 무기로 화력지원을 돕는 식이었다. 물론 최종돌격 단계에서야 다들 달려들었고 열악한 중공군의 보급 상황상 항상 그런 배치만을 할 수는 없었지만, 꽤 효율적인 배치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엄연히 일종의 포위섬멸전으로 그냥 별 생각 없이 전면에서 수로 밀어붙이는 것과는 다르다. 실제로 당시 중공군은 '''일제, 미제 무기 등을 다수 가지고 있었고 소련제 기갑장비를 다량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며 단련된 베테랑들이었는데다가'''[* 전투력이 대단하다는 의미보다는 대규모 병력의 이동 및 행동을 무리없이 소화할 수 있는 명령 및 조직체계와 훈련량이 갖춰져 있다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한다. 통신시스템이 열악했던 당시 중공군이 오로지 인력에 의지해 적에게 탐지되지 않는 넓은 포위망을 행군만으로 고속으로 형성하고 일거에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것은 상당한 숙련도가 필요하다. 다만 그에 비해 무기는 빈약했다.] '''한국에서의 인식처럼 단순한 인해전술만 보여준 게 아니라 심리전, 게릴라전, 기동전, 포위작전 등 다양한 전술을 활용했다'''. 중공군은 미군의 공중 정찰을 피해 낮에는 갱도나 [[비트#s-2.4]]에 숨어있다가 시야가 제한된 야간에 능선을 타고 기동하는[* 참고로 후술하듯 이는 [[밴플리트]] 장군이 포탄 보급을 5배로 늘려 무제한 사격이 가능해지고부터 더욱 심화되었다.] 주도면밀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동 속도는 산을 타면서도 하루에 20여km 수준[* 개중 중공군 1차공세 때 서부전선에 배치되었던 제38군 113사단은 청천강에서 14시간 동안 걸어 72.5km를 주파하여 평양까지 도달한 뒤 유엔군을 포위하였다.]이었으니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진격 속도를 예상하지 못하고 포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한 번은 어느 미군 병사가 밤중에 담배를 피려고 라이터를 켰는데, 라이터 불빛으로 드러난 자신의 바로 발 앞에 엎드린 중공군 병사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일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라이터 불빛에 드러나기 전까지 그 중공군 병사가 미군 병사의 발 앞에까지 오는데 전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중공군 병사들은 밤중에 아무런 소리도 안 내고 산을 타는데 매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한국전쟁 내내 미군 병사들이 가장 치를 떨었던 점이 바로 이런 중공군 병사들의 야습 능력이었다.] 게다가 중국군 참전 초기에는 유엔군이 중국군의 규모를 최대 6~7만 명 규모로 오판해서 중국군이 싸움을 피한다고 보고 중국군의 유인에 말려든 탓에 우회포위에 걸려들어 각개격파되면서 중국군은 당초 예상보다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애초에 지휘관인 [[펑더화이]]가 수 많은 전쟁에서 그 기량을 여실없이 증명한 명장이었고, 펑더화이도 미군이 진격과 승리로 방심하고 있을테고, 미군은 도보 행군을 기피하고 야간 전투에 취약하고 공중 지원에 과도하게 의존한다고 정확히 예측했으니 지는건 필연이었다. 다만 이 전술을 실행할 때 우선 소규모의 선봉대[* 국민당군 패잔병들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 자들, 즉, 사실상의 [[형벌부대]]를 총알받이 겸 미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히 증명할 자료는 없다.]를 먼저 보내고 본대는 적의 방어선을 더듬어가며 우회해서 포위, 이후 꽹과리나 나팔 소리를 신호로 수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영화 고지전에서 이 모습이 잘 묘사되어있는데,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잠깐 스쳐가는 번개의 빛으로 언덕이 보인다. 그 직후 징소리 비슷한 이상한 소리가 들리고 다시 빛이 스쳐가는데 언덕이 '''사람으로 가득 채워져있는''' [[https://m.fmkorea.com/best/5904216977|연출]]을 통해 거의 좀비떼가 연상될 정도로 공포스럽게 그려졌다.] 가까스로 이들을 격퇴해도 얼마안가 그 숫자의 인원들을 어디선가 또 보충해 [[어택땅]]을 재차 반복하니 이들을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탄약과 인원을 질릴 정도로 계속 소모하는 [[소모전]]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선봉대와 싸우는 와중에 우회기동한 본대 병력에 의해 포위당해 끝장나는 것이다. 이 사례 중 하나인 [[임진강 전투]]를 다룬 '한국인만 몰랐던 파란 아리랑'이란 자서전[* 영국 육군 대장 안소니 파라-호커리(1924~2006) 경의 전쟁 회고록.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병사로, 한국전쟁 당시 장교로 참전한 베테랑이다. 당시 그는 대위 계급으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 부관으로 종군하였는데, 적의 인해전술로 대대가 와해된 후 2년 4개월 동안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 잡히기를 7회 반복한 끝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제16공수여단장, [[북대서양 조약 기구]] 북부 유럽 주둔군 총사령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군사 보좌관 등을 지냈다.]에서도 서서히 [[소모전]] 양상으로 치닫자 [[대대장]]까지 "머잖아 우리가 [[소총수]] 역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꺼낼 정도로 인해전술은 [[보급#s-2]] 문제나 심리적 문제도 적잖이 일으킨다. 사실 중국이 왜 이런 전술을 채택했는지에 대해선 장비나 화력 면에선 엄청 부실하지만 '''병력만은 많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려면 보병들을 대량으로 보내 열세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고 실제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은 미군의 화력 앞에 큰 출혈을 강요당하면서도 특유의 물량빨로 미군의 방어선을 포위하는데 성공했고, 퇴로까지 차단시켰기에 미 해병대는 위기에 몰려 직사 포격으로 중공군을 상대해야 할 지경이 되었기에 고군분투 끝에 [[흥남 철수]]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 전사에 남을 주요 격전지를 함명으로 붙이는 미 해군의 관례에 따라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에 '장진호'의 일본식 이름인 초신(Chosin, 長津) 함이 현역으로 운용되고 있다. 참고로 왜 일본식 이름이냐면, 당시 미군이 일제가 남긴 지도를 가지고 작전을 짰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