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해전술 (문단 편집) ==== 유엔군의 대응 ==== 그러나 이 행위는 적이 탄약을 언제든 무한에 가깝게 퍼부을 수 있으면 [[목숨은 내다버리는 것|수많은 병력을 내다버리는]] 행위로 전락한다. 실제로 미군은 중공군의 전략에 대응하여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탄약 보급률을 5배로 늘림으로서 미군이 '''화해(火海)전술'''로 거세게 대응하자 중공군은 큰 피해를 입고 역으로 패하는 경우가 많아져서 점점 미군과의 정면승부를 꺼리고 야간에만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반대로 한국군 및 다른 UN 연합군들은 중공군에게 모든면에서 열세이다보니 중공군은 이들을 상대로 이기면서 쏠쏠한 재미를 보자 점점 미군보단 사정이 열약한 한국군과 타 UN군을 우선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하지만 1951년 여름부터 수적 주력이 된 한국군이 후방으로 물러난 부대들에게 사단, 군단급 훈련을 시켜 전투와 작전 능력을 일신하고[* 한국전쟁 발발 당시까지 한국군의 훈련수준은 대대급이 고작이었다.] 또한 이 시기 벌어진 [[현리 전투]], [[사창리 전투]]를 반면교사 삼아 결사의지를 다지며, 미군의 화력지원으로 미군과 동등한 수준이 되자 중공군은 [[용문산 전투]]를 시작으로 한국군을 상대로도 점점 고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해전술의 치명적인 약점인 장기전 때 발생하는 보급 문제와 [[제국주의|마오쩌둥의 과욕]]이 덮쳐오면서 중공군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이미 연합군을 남쪽으로 밀어낸 시점에서 중국의 목적은 달성되었지만 [[마오쩌둥]]은 욕심을 부려 남침을 강행했고, 펑더화이는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과 보급 문제가 심각하니 몇번이고 보급 좀 신경써달라고 했지만 [[무능력한 상사|죄다 씹혔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는게 오히려 더 이상할 지경. 이후 철원 평야를 두고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와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1951년 말에는 [[맹조의 발톱 작전]]으로 금강산 일대까지 북진을 구상했을 정도였다. 이런 연합군의 북진을 저지한 것은 중공군의 전투력이 아니라 미국측의 휴전 의지였고, 상대적으로 고지대를 점유한 공산군은 지형의 이점과 전면전이 제한된 환경을 십분 활용해 인해전술의 신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