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민주의 (문단 편집) == 상세 == >"한겨레인 일민(一民)은 반드시 한 핏줄(동일혈통)이다. 이 한 핏줄이라는 것이 일민에는 절대적 요소다. 만일 한 핏줄이 아니라면, 한 겨레 한 백성이 될 수 없고 또 만일 한 겨레 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한 핏줄 일 것이다." > ---- > 안호상의 저서 『일민주의의 본바탕』 중 [[8.15 광복]] 이후 해방정국에서 당시 사람들은 [[자본주의]] 편, [[공산주의]] 편, 그리고 둘 다 싫다는 [[조선민족청년단]]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당시 조선민족청년단은 자본주의니 공산주의니 둘 다 싫고 제3의 방식으로 가자는 편이었고 단장은 [[이범석]]이었는데 안호상이 조선민족청년단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조선민족청년단, 소위 족청이 주장한 민족주의는 전통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독일 [[나치]]의 영향을 받은 [[제3의 위치]]로 보인다.[* 또 안호상은 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학도호국단을 만들기도 했는데 당시 반대파들로부터 [[히틀러 유겐트]]나 마찬가지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5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는 일민주의가 [[전체주의]]나 파시즘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표현했다.[[https://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369150|#]] 사실 [[안호상]]이나 [[양우정]]의 관점이 이승만의 관점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정부 수립 후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전국민적 통합을 위해 이 일민주의를 국시로 삼았다. 그리고 계급의 귀천 차별 철폐, 남녀차별 철폐, 빈부 차별 철폐, 지역 차별 철폐 등 각종 차별을 타파하여 전국민의 화합을 이루고자 했다. [[이승만]]이 쓴 일민주의 개술을 보면 그가 무엇을 일민주의의 핵심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일민주의를 제창한다. 이로써 신흥 국가의 국시를 명시하고자 한다. (중략) 우선 지역적 관념을 없애서 우리가 하나 됨을 억세게 하고 남녀구별을 말아서 우리가 하나 됨으로 북돋게 하자 했으니 이 두가지는 우리 독립운동 초기에 있어서부터 실천하려 한 바요, 귀천 계급의 제거와 빈부 차등의 근절 같은 것은 이념의 체계화로부터 체계의 실현화에 미치게까지 우리 운동의 보철에 맞추어서 일층 우일층 금일의 현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니 이 '일민'이라는 두 글자는 나의 50년 운동의 출발이요 또 귀추이다. >---- > 이승만, 『일민주의 개술』 中 또 이승만이 일민주의 개술에서 제시한 일민주의 4대 강령은 다음과 같다.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것 *정치상으로는 대다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 계급의 대우를 받게 할것 *남녀동등 주의를 실천하여 우리의 화복안위의 책임을 삼천만이 동일히 분담하게 할것 *지역의 도별을 타파해서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대한국민은 다 한 민족임을 표명할것 [[파일:일민주의체계표.jpg]] > '''우리는 일민이다 충성은 조국에''' > '''우리는 일민이다 사랑은 민족에''' > '''우리는 일민이다 노력은 통일에''' >----- > 일민주의의 맹세 일민주의를 보급하기 위한 단체는 일민주의보급회였고 [[안호상]]이 보급회 부회장을 맡았다. 일민주의보급회는 일민주의 강령 등을 알리는 역할을 넘어서 이승만 우상화를 유지하기 위한 단체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안호상은 전국 교원을 대상으로 사상 검증을 시도하고 [[여수·순천 10.19 사건|여순반란사건]]을 계기로 좌익 교원뿐 아니라 이승만 정권과 일민주의에 반대하는 교원들까지 전면적인 [[숙청]]을 시도했다. 일민주의는 민족주의([[에스닉 내셔널리즘]]) 매우 강조하였고, 이로 인해 소위 비한국계 피가 섞인 비한국인 혼혈아들을 미국이나 다른 서방국가로 보내버렸는데 이는 [[단일민족|민족의 단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였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현대에 와서 [[브루스 커밍스]], 신기욱, [[박노자]], [[브라이언 마이어스(교수)|브라이언 마이어스]]까지 성향 불문하고 비판되고 있다. [[대한국민당]]이 먼저 일민주의를 당시로 삼고 있었으나 1951년 이승만의 [[자유당]]도 당시를 일민주의로 삼고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족청년단도 해체되고 이범석도 정계 뒷전으로 밀려나면서 1952년 여름 이후에는 일민주의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고 짧은 기간 동안 국시의 자리에 있었던 일민주의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