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 (문단 편집) === 실상 === || [[파일:attachment/일본군/JPrison02.jpg|width=100%]] || [[파일:attachment/ejs19459-water_fall.jpg|width=100%]] || || 일본군의 보급이 정상적이었을 때에 잡힌 일본 육군 포로 || 일본군의 보급이 끊어진 후에 [[라바울]]에서 잡힌 기아 상태의 일본 해군 포로들 || >輜重輸卒が兵隊ならば蝶々トンボも鳥のうち 焼いた魚が泳ぎだし 絵に描くダルマにゃ手足出て 電信柱に花が咲く >치중수졸이 군인이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일 것이고, 구운 [[물고기]]가 [[수영]]을 하고, [[그림]] 속의 [[달마]]에 손발이 돋고, [[전봇대]]에 [[꽃]]이 필 것이다. [[러일전쟁]] 당시의 일본군에서 유행하던 [[노래]]. 단순히 [[병참]], [[군수]], [[수송]] 병과에 소속된 전투근무지원부대원을 비하하는 노래이다.[* 비전투병에 대한 비하는 다른 나라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가령 '[[공익]]이 군인이면 [[파리(곤충)|파리]]가 새'라던지, [[미국 드라마]] [[제너레이션 킬]]에서 [[미 해병대]] 수색대원들이 해병군수지원단의 트럭병들을 보면서 POG([[땡보]])라고 멸시하는 등 아주 흔한 사례이다.] 구체적으로는 보급을 담당하는 보급수송대를 우습게 보는 노래인데, 구일본군 [[리즈시절]](?)이라고 자랑하던 러일전쟁 때 벌써 인식이 이따위였으니, 본격적으로 막장행각이 시작된 [[중일전쟁]] 이후에는 훨씬 더 심해졌다는 뜻이다. 타 병과를 장난으로 놀리는건 어느 나라 군대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일본군의 보급병 천시는 '''국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다르다'''. 먼저 [[메이지 유신]] 이후 설립된 [[일본육군사관학교]]에는 1899년까지 치중병과가 없었다. 또한 참모 장교를 육성하기 위해 1883년 개교한 일본 [[육군대학교]]에도 다른 병과 장교와 달리 치중병과 장교는 입시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1887년부터는 치중병과 장교도 육군대학교 입시자격이 주어졌지만 정원은 매년 1명에 불과했다.(드물게 2~3명을 받는 년도도 있기는 했다) 그래서 일본 육군대학교는 [[1945년]] 2차대전 종전시까지 총 3,00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지만 이 중에 치중병과 출신은 겨우 46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일본은 시스템상으로도 보급 병과를 대놓고 차별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군도 보급 병과 장교가 필요하긴 하니까 이들의 보충은 보병과, 기병과, 포병과, 공병과에서 전입한 장교들이 맡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 입장에서 유능하고 성실한 부하를 타 병과로 전입보낼리 없으니 치중병과에 전입보내는 장교들은 무능한 저능아거나, 사고 친 문제아 장교일 수 밖에 없다. 치중병과에 대한 인식이 이 모양 이꼴이었으니 우수한 인재가 치중병과를 지원할 턱이 없고, 체계적인 교육도 받지 못했으니 제대로된 장교가 육성되기도 힘들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막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왕국]]식 군사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당시로는 우수한 병참체계를 가진 프로이센과는 달리 이처럼 보급병과를 홀대한 것은 전통의 영향이었다. 원래 일본은 [[센고쿠 시대]]에도 보급병이라는 것이 없었다. 전투는 하급 무사인 [[아시가루]]가 맡았지만 보급은 민간인을 징발해서 부역에 동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근대화 이전 일본에서 병참이란 민간인 아무나 징발해서 부역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근대화 되었다고 해도 하루아침에 보급병과를 중요한 병과로 여기는 발상이 생겨날리가 없던 것이다. 이제 위 노래에서 '치중병과가 무슨 군인이냐?'고 보는 일본군의 인식이 이해가 될 것이다. 서양에서는 고대로마 시절부터 병참을 담당한 군단 감독관(Praefectus Castrorum)이 [[로마군]] 군단 서열 3위이던 [[로마제국]]이나, [[초한전쟁]]에서 보급과 지원을 담당한 [[소하]]를 최고 공신으로 정한 중국 [[한나라]]와는 분명히 달랐다.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 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고,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미군]]으로부터 [[노획]]한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통상의 부대보다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기까지도 야전취사 장비를 구비하는 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 [[밥]]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든가, [[약탈|민가에서 징발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없어, 개개인이 문자 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다만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초반까지는 모든 군대가 비슷했다. 1차대전 초반 이전의 모든 군대는 식량을 던져주면 사병 개개인이 알아서 조리해먹는, 즉 재료만 던져주는 식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당번을 정하든 혼자 해먹든 알아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던 것이 1차대전 초반 이후 [[참호전]]으로 인하여 대군이 좁은 [[전역]]에 고착되어 연료가 부족하고[*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곳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보라. 더욱이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죽치고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는데, 연료가 남아나겠는가?] 더구나 연료가 있어도 조리 과정에서 발생한 연기로 인해 포격받기 일쑤인 상황이 되자[*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병사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 중에는 "고체 알코올 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다. 연기가 나지 않기에 포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나마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 수 있으니까.] [[후방]]에서 조리하여 [[전방]]으로 추진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https://youtu.be/SD4CXdoB3eE|1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취사 모습을 재연한 영상]]. 그 이전에는 [[취사병]]이라는 병과 자체가 군의 정식 [[편제]]에 없었다. 취사병과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른 야전취사 장비를 적절히 보급하는 게 일반화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저 모양이었다는 것은 일본군의 수준을 바닥까지 보이는 것이다. '군대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먹어야 진군한다]]' 말을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사방팔방에서 다수의 인원이 [[불]]을 피우고 조리를 하였기 때문에 대량의 [[연기]]와 [[불꽃]]으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더더욱 쉽게 노출되었고, 덕분에 [[나무]]가 무성한 [[정글]]에서조차 미군의 정찰에 쉽게 발각되어 탈탈 털리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구나 전문적으로 조리를 익힌 [[취사병]]들이 소량의 연료만 써서 대량으로 취사하는 것과, 소규모 [[단위]]로 전투병들이 사방팔방에 불을 피우고 찔끔찔끔 조리하는 것은, 시간의 활용과 연료 소모와 [[음식]]의 품질 면에서 효율성의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전문 취사병들에게 맡기면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 임무에 더 효율적으로 투입되며, 조리 시간의 제약과 취사의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재료만 던져준 것은 바보짓 그 자체였다. 더구나 다수의 인원이 연료를 구해 조리하는 과정은 주변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결국 군인들이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 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 같은 것도 거뒀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탈했고, 이는 현지 주민들에게 [[반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약탈]]만 한 게 아니라 미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이나 기타 대단하지 않은 명목으로 수시로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혐의자가 1명만 있어도 해당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식으로 잔혹한 지배 정책을 펴서, [[태평양 전쟁]] 전역에 [[미군]]과 협력하는 수많은 [[게릴라]]가 나오게 된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병사의 수가 급속히 팽창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되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 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게다가 배고파서 먹은 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지 그냥 재미로 먹은 막장스런 경우도 존재하는데, [[미국 대통령]] [[조지 워커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치치지마 식인 사건]] 항목 참고)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탈로 일관했다.[* 중세 유럽군대의 미칠듯이 느린 진군속도의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급문제였는데, 당시 [[기술]]로는 이동수단이 마땅찮기도 했고, 더군다나 한번에 많은 수의 보급품을 보낼 수 없으니 현지조달하느라 밍기적거리면 시간다까먹고 진군 속도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장교]]와 [[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줬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이러한 탓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결국 반찬 없이 백미로만 밥을 먹으니 영양 불균형으로 [[각기병]]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장교들은 다른 반찬들이 잘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 없었다. 또 장교가 사병의 식단을 착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사병들의 식단은 장교들의 식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영양 문제는 위에서 나온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빼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고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은 편이지만 쌀과 밀 둘 다 필수 [[아미노산]]이 적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 식단에서 이걸 보완해주는 게 [[콩]], 그 가운데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 단순히 [[콩]]만으로는 안 된다. 흡수율이 낮고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기 때문. [[발효]]를 거쳐 [[미생물]]을 섞어 먹어야 약간이나마 채울 수 있다.] 각기병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을 했더라면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나마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의 [[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당시 육군 군의총감(軍醫總監)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 때문인데, 그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지만,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당시는 각기병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나 당장 일본에서 각기병을 부자병, [[에도]]병 등으로 불렀으며 이 에도병 증상이 나타날 경우 [[메밀국수]][* 당시에는 도정과정이 완벽치 않아 메밀국수에 메밀껍질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는데, 도정되지 않은 메밀 껍질 부분에 [[비타민 B]]가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각기병에 효과가 있었다.]를 먹으면 증세가 나아지더라 하는 경험적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민간요법이 무턱대고 따라할 치료법은 아니지만, 효과가 있음이 알려진 방법임에도 단순히 독일 의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무시한 모리 오가이의 [[책임]]은 크다. 결과적으로 육군은 한 상비사단 분에 해당하는 병력인 1만여 명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 및 [[보리]] 혼식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 지금은 [[쌀밥]]이 흔한 밥 취급받고 [[콩밥]] 등의 혼식이 신경 쓴 건강식이라며 주목받지만, [[쌀]] 생산량이 떨어졌던 전근대까지만 해도 100% 쌀로만 지은 쌀밥은 부의 상징이였고 혼식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오죽하면 [[북한|윗동네]]의 목표인 [[지상락원]]이 [[이밥에 고깃국|이팝(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일 정도니.]는 의견이 컸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군]] 역시 [[한국전쟁]] 당시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집단 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안 나온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말은 그냥 쌀만 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미 [[18세기]]~[[19세기]]부터 온세계를 누비며 전쟁을 해와 노하우도 쌓일 대로 쌓였고 나름 [[경제]] 규모도 뒷받침되는 영미와 달리 그동안 [[만주]], 중국, 서태평양에서나 놀던 그냥 [[패권]]을 노려보는 [[지역강국]]일 뿐인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의 한계다.[*물론 아시아 최강국가였던건 동양인 누구도 부정 못하지만, 애초에 앞마당격인 [[만주]]조차도 주로 남부에서나 영향력을 행사했지, 북만주는 [[소련]]이 [[만주사변]] 직후 중동철도를 일본에 매각하면서 겨우 접수했다.] 이러한 영양학적 문제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급 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상대한 미군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보급은 매우 풍족한 편이었다. <영웅 김영옥>에서 [[김영옥(군인)|김영옥]]의 회고에 따르면 유럽 전장에서 식량 배급은 말할 것도 없이 [[초콜릿]],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조차 충분히 보급되었고, [[미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스크림]]과 같은 특식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태평양 함대]]는 한 때 보급 받은 [[전투식량]]이 너무 많아 고생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이 노획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일본군의 보급이 얼마나 빈약한지 짐작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사실 처음부터 일본군의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 군대와 크게 차이가 났다. [[주적]]인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를 지원받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0.9kg(2파운드) 정도만 받았다. 0.9톤을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0.9kg이다.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물론 미군이 제법 많이 받는 것도 있고, 기본적으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체급 차이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보급량은 독보적으로 처절하다. 사실 일본군의 급양체계는 태평양전쟁이 심화되기 전에는 좋은 편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경양식]]이라 부르는 돈까스, 카레라이스 등은 일본군 짬밥에서 유래된것들이 많고, 매 끼마다 고기나 생선에 [[후식]]도 나왔었다. [[한국군]]에서 "군대가 밥먹으러 가는 곳이냐, 군인이 무슨 비싼 밥을 먹냐"고 하는 인식들이 과거에 많이 있었는데, 이는 일제 말기 급양체계가 부실화된 시점부터 [[조선인]]들이 대거 입대하기 시작하여 그런 것만 보고 배웠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사실 일본이 이런 문제점을 보였다고 해서 정말 일본군이 의식 레벨에서 보급을 경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게 보급을 경시했다면 왜 본토의 일본인이나 조선인, [[대만인]]을 수탈해가면서 모든 물자지원의 우선순위를 군인에 할당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동시기 [[이탈리아군]]이나 막장 군대라는 면에서 일본군의 후배격인 [[조선인민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애초에 군인은 잘 먹어야 하고 옷이나 의료물자 등 각종 분야에서 상당한 투자를 요한다는 점은 상식이다. 다만, 일본은 군대 규모도 수백만에 이를 정도로 팽창해나가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역에서 전투를 수행할 정도로 전비 부담이 극심해가는 반면 현지 부대가 처한 상황은 북의 만주, 키스가로부터 남으로는 [[호주]], 서로는 중국과 [[미얀마]]로부터 동으로는 [[미드웨이섬|미드웨이]], [[과달카날]]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인데다 전쟁 상황 역시 극히 불안정했기 때문에 가장 물자를 필요로 해야 하는 최전방 야전부대에 정작 필요한 물자는 제때 보내지 못해 병사들이 시체라도 뜯어먹어야 했던 반면, 그나마 여력이 있는 일본 본토[* 특히 육군 근위사단]나 제대로 된 기지가 있는 곳이나 최신식 함선에서는 위와 같은 호텔스러운 생활이 가능했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열강의 후발주자로서 가장 국력이 부족한 일본이 엄청난 보급소요를 요하는 정글과 섬에서 세계최강국 미국과 맞붙은 순간 기존의 보급계획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