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문제점 (문단 편집) === [[소모전]]을 강요받은 [[중일전쟁]] === [[중일전쟁]] 내내, 특히 [[국민정부]]가 [[수도(행정구역)|수도]]를 [[충칭시]]로 이전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이전의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군은 상당히 분투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중앙군처럼 중국군에서 우수하다고 취급받는 부대들도 따지고 보면 그냥 좀 싸울 줄 아는 [[알보병]]이었고, 이 중앙군의 전체 병력도 몇개 사단에 불과했다. 특히 직속군 중에서도 뛰어났던 독일식 사단들조차 인원와 장비가 완편되진 않았다. 즉, 전차, [[항공기]], [[함포]]와 [[포병]] 등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우쑹 전투|오송 전투]]에서 일본군이 1개 사단이 날아가는 등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군의 예상에 비해 큰 피해였을 뿐이다. 이는 태아장 전투와 [[백단대전]]에서도 마찬가지이며, 중국군 입장에서도 이전에는 진짜 [[오합지졸]]이었던 중국군이 그래도 좀 싸울 줄은 아는 군대라는 점을 확인한 것 빼고는 좋게 평가하긴 어렵다. 즉, 중일전쟁 초기의 상하이 전역에선 [[장제스]]의 오판으로 인해 중국군이 대패한 것이 맞다. 이렇게 나름 괜찮은 전투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일본군은 [[중국]]으로의 보급 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겪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난징 대학살]]과 [[신멸작전]]을 일으켜 광활한 중국 본토에서 [[민중]]의 지지를 전혀 못 받게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많은 병력을 넣어봐야 연안지대의 점과 선, 그것도 [[상하이시|상하이]], [[텐진시|텐진]] 같은 [[대도시]]와 각 도시 사이를 연결하는 [[철로]] 주변 정도만 점령할 수 있었다. 이에 후방의 드넓은 농촌지대에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괴롭혔고, [[장제스]]의 국민당은 내륙으로 숨어들어갔다. 이후 각지의 군벌들과 연합하여 [[지형]]과 [[민심]]의 힘, 여기에 더 저질이긴 하나 여전히 많은 보병과[* 국민정부 시대나 중공 정부 시대때나 중국의 인구는 극상위권이다.(국부천대 당시: 5억 8천만 1위, 2023 현재: 14억 2567만 2위, 대만정부는 2023 현재 2336만명 57위.)] 미군측 지원부대인 플라잉 타이거스, 그리고 더 나아진 대일 전략으로 버텼다. 결국 일본군은 '''[[계륵|국민당, 공산당, 군벌을 섬멸해서 전쟁을 끝내기엔 중국 땅이 너무 큰 관계로 병력 부족과 병참선의 압박이 심하고, 그렇다고 철수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그야말로 [[막장]]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중국 안쪽으로 진군하면 할수록 보급선이 길어져서 차단당할 위험이 있었고, 지형지물도 모르는 곳에서의 전투는 [[게릴라]]에게 기습당하기 딱 좋았다. 또한 아무리 몇몇 전투에서의 성과가 좋아도 중국군을 상대로 무한정으로 싸우다가는 일본의 인적자원이 먼저 고갈될 지경이었다. 실제로 중일전쟁 기간 중에도 중국은 [[대학생]]에 대해서는 징병을 하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는 '''무려 5억 명'''이나 되는 [[인구]]가 있었고, 따라서 정말 전쟁이 길어진다면 모를까 당장은 굳이 대학생까지 징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식민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인구는 6,500만 ~ 7,000만 정도였다. 따라서 이러한 막장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태평양 전쟁 이전에 서구의 지원을 차단해 중국이 제풀에 나가 떨어지게 하는 것이 일본의 주 전략이었고, 이를 위해 [[하이난]]을 점령하고, [[인도차이나]]로 진출해 [[하노이]] 루트를 차단했으며, 결국에는 태평양 전쟁 개전 시점에서 전선이 [[버마]]까지 늘어졌다. 그리고 일본군은 이렇게 늘어진 남방 전선을 태평양 전쟁 내내 감당하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