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문제점 (문단 편집) == [[문제]] 많은 인사제도 == 일본 육군은 [[육군대학교]] 성적, 일본 해군은 해군병학교 [[졸업]] 성적을 기준으로 진급시켰다. 육군은 무모하게 돌출행동을 하는 자들은 군에 큰 피해를 주었더라도 매우 높이 평가해서 빨리 진급시켰고, 반대로 해군은 가만히 있는 자들을 진급시켰다. 즉, 양쪽 모두 [[인사고과]] 기준이 엉망이었다. 그리고 평상시뿐 아니라 전시에도 이런 인사고과를 했다. 해군의 경우 해군병학교 출신 [[사관]]은 졸업 성적만 좋으면 특별히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한 [[대좌]] 정도는 승진을 보장했다. 이 때문에 장교들은 튀는 행동을 삼갔기 때문에 승진에서 누락되지 않으려고 소극성과 보신주의를 보여주었다. 반대로 [[해병]] 출신 병과사관들은 포술, 수뢰 같은 병과가 아닌 [[항해]] 출신이면 제독이 되기 힘들었다. 결국 '''[[성적]]이 나쁜 사람도 좋은 성과를 내봤자 나아지는 게 없으니 도전을 포기해버리고, 성적이 좋은 사람도 가만히 있으면 출세길이 보장되어 있는데 쓸데없이 위험부담을 짊어질 필요가 없으니 [[도전]]을 포기해버렸다.''' 군 조직 전체가 적극성이 [[거세]]되어 버린 것이다. [[진주만 공습]]이나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함대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보이던 소극성과 보신주의는 이러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나마 일본 육군은 해군보다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고, 그런 사람들이 승진에 유리했다. 물론 일본 육군도 기본적인 방침은 육군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우선 진급시키는 것이라 비육대 출신들은 [[중좌]] 달 때까지만 버텼다가 나름 좌관급이라고 대접해주는 [[사회]]에서 [[인생]] 이모작이나 하러 나갔지만, 이들도 그래도 17년동안 버텨서 소좌로 근속승진을 하고 그 후 몇 년 후 중좌를 달고 사회에 나가면 어쨌던 꽤 괜찮은 액수의 은사금이 매달 나왔던데다가 [[전문학교]]나 대학 교련교수 혹은 [[동척]]이나 [[만철]]같은 국책회사 간부같은 그럴듯한 [[직책]]이 나왔고 동네 예비역들 사이에서 완장질하는 것도 가능했다.[* 우리나라 소, 중령들 [[직업보도반]] 갔다 사회나가는 것 보다야 대접이 좋긴 했다.] 또한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초급 장교가 매우 부족해지자 위관급의 문을 크게 열어서 식민지 출신 조선인이라고 해도 대위까지는 현장에서 승진도 가능했고 기존의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최소한 전시에는 비육대 출신도 [[대좌]]를 달아봤고 참사관같은 명예직이라면 [[소장(계급)|소장]]까지도 달아봤다. 문제는 육군대학교 나와서 핵심 보직 라인 탄 인원 외에는 전략 전술에 대한 발언권 같은게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 문제였다. [[츠지 마사노부]]같은 영관급의 대좌가 작전의 신 따위로 불리면서 현장지휘를 독자적으로 하는 동안 라인 못탄 사람들은 그저 저런 놈이 내리는 말도 안되는 명령에 따라서 [[반자이 돌격]]이나 해야 했다. 이리하여 일본 육군의 그나마 몇 안되는 유능한 지휘관들은 대부분 기껏해야 [[군단장]](중장) 정도에 머물렀다. 그 이상의 제대를 지휘하더라도 대부분 [[후방]]에서 뒤치다꺼리나 하거나 무능한 인간들이 더 높은 자리들에 있었으니 뭐라도 해보고 싶어도 못 그럴 상황이었다. 해군은 그래도 나았지만 육군보다 낫다 정도의 수준이다. 또한 군사작전에서 무조건 적극적인 거라고 절대 좋은 게 아니다. 일례로 상대가 진지와 방어선을 구축하고 만일 휘하 부대에 그런 방어선을 돌파할 [[전력]]이 부족하다면 그것을 돌파할 수 있는 포병, 항공전력을 인내하며 기다리다가 합동해서 돌파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교리]]인데, 얘네는 그냥 무작정 돌격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만주사변]]을 획책한 [[이시와라 간지]], 정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조선주둔군을 동원해 [[관동군]]을 지원해 [[만주]]를 침략한 [[하야시 센쥬로]], 그리고 [[츠지 마사노부]]나 [[무타구치 렌야]] 등은 무모함을 적극성으로 포장해 높이 평가한 일본 육군의 고과 진급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육성된 일본 육군의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제대로 된 전쟁을 수행하지는 못하면서 [[하극상]], [[쿠데타]]같은 짓이나 일삼는 떨거지들 뿐이었다. 정작 고위급의 자리에 올랐어야 할 진정한 실력자들은 이런 떨거지들 아래에서 복무하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받아야만 했다. 무능한 인간이라도 [[인맥]]이나 사상만 맞으면 사고를 쳐도 넘어가고 오히려 멀쩡하고 유능한 자를 잡아다가 일선에서 내몰아버리니 조직이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일본군 [[똥별]]들에 대해 [[삼간사우]], [[삼대오물]] 등을 콕 찝거나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라고 조롱하면서 특정 똥별의 잘못된 행각을 부각하는 식의 접근이 많다. 그러나 일본군의 패전은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교육시킨 잘못, 높은 자리까지 진급시킨 잘못, [[미래]]에 잘못될 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해 중간에 확인하지 않은 잘못, 잘못을 발견했어도 쫓아내지 않은 잘못 등 수많은 인사제도의 오류가 중첩되었기에 만들어진 잘못이다. 모든 [[조직]]에서 [[무능력한 상사]]는 일부 있기 마련이고, 모든 군대에서 [[병영부조리]]는 늘 나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무능한 [[상사]]가 적시에 해임되지 못하였고, 이러한 악습들을 오히려 권장하는 쪽으로 갔다. 결국 일본군의 병영부조리는 암세포처럼 커졌다. [[기업]]에 있어서도 [[채용]], [[승진]], [[감사]], [[징계]], [[해고]]가 모두 엉망진창인데 잘 돌아가는 [[회사]]는 찾기 어렵다. [[일본군/병영부조리|일본군의 병영부조리]] 역시 겉으로는 잘못된 인물들의 악행이지만 원인은 부실한 인사제도에 있다. 당시 일본군 상층부에서는 [[가혹행위]]를 통제하려는 시도 자체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통제 수단은 중대장이 중대원들을 사열시켜놓고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은 손을 들라'는 정도의 유치한 수준에 머물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중대장의 질문은 덴노가 직접 명하는 것과 같으므로 중대원들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므로 이렇게 질문했을 때 가혹행위가 없다는 대답이 나온다면 중대장이 가혹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군 상층부에서 볼 때도 가혹행위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가혹행위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니 그 노력이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군에 대한 불만을 말할 수 없고 자유로운 부대 이동이 불가능하며 [[신고]]에 대해 [[손해배상]]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병영부조리가 무슨 군인칙유나 복창하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해소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가혹행위를 막으려는 형식적인 노력이 있긴 했는데 실제 가혹행위, 구타로 사망자나 불구가 되는 자가 나오면 [[헌병대]]가 출동해서 조사하므로 간부들의 인사고과에 빨간줄이 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건을 은폐할 수 있다면 은폐하려고 노력을 더 많이 기울였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하였다. 또 육군은 [[보병]]과 [[헌병]], 해군은 [[병과]](항해, 수뢰, 포술) 사관들에게만 권한과 승진이 집중되었다. 전쟁은 보병과 항해사관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일본군 패전의 큰 원인으로 [[병참|치중]], [[통신]], 포병, 기갑과 [[항공]] 등 다른 병과의 능력 부족이 꼽히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각종 병과를 맡은 [[참모]] 개개인의 능력치야 각 분야에서 전문성이 뛰어난 사람들도 많았는데, 문제는 이쪽 참모들의 발언 자체가 그들의 계급을 떠나 군대 운용에 영향을 줄 만큼의 힘이 없었다. 이들의 계급이 높지 않은 것 자체는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런 [[환경]]에서 [[아돌프 갈란트]]나 [[커티스 르메이]] 같은 [[파일럿]] 출신 지휘관이 나올 확률은 거의 없었다. 또한 파일럿의 경험을 통한 효율적인 항공 전략의 수립도 사실상 못했다. 장군급 계급이 사실상 3단계 밖에 없어서 일본군이 아무리 계급보다는 직책이 우선인 조직이라고 해도 동급 계급이 맡은 직책이 서로 달라서 동급 계급간에 명령이 내려지는 사태도 흔했다. 이러니 강력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예 서로간의 관계를 파탄시키는 급에 해당하기 쉽기 때문에 형식만 명령이지 간접적인 두루뭉실한 문서가 전달되고 이걸 감으로 두들겨 맞춰야 하는 촌극이 발생한다. 당장 대장이 맡을 수 있는 직책 중 중장이 못 맡을 직책은 [[조선총독]] 정도밖에 없었다. 육군대신이나 교육총감과 같은 최고위 자리들도 중장으로 보임하는게 가능했다. [[사단장]] 위의 군사령관은 당연히 중장이었고 군사령관 위의 방면군 [[사령관]]도 중장 보임이 가능했던데다 원칙상 [[대장(계급)|대장]] 보임인 방면군 위의 총군사령관조차도 중장이 임명된 예가 있었다. 이런 기형적 인사제도의 문제는 [[19세기]] 대부분 유럽 국가들의 장성들이 [[중장|3성 장군]]이 대장인것을 본따와 만들어진것인데, [[세계 대전]]을 겪으며 유럽은 군 조직이 방대해지자 [[소장(계급)|소장]]과 [[대령]]사이에 [[준장]]계급을 추가시켰고, [[독일군]]은 아예 대장 위에 [[상급대장]]까지 만들어 해결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런 세계적 추세와 변화를 따라잡지 않고 19세기에 제정된 인사제도에만 집착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식으로 [[여단]] - [[사단]] - [[군]] - 방면군 - 총군의 지휘관을 모두 차이나는 계급으로 제정한다면, 6~7성 장군까지 나와야 하니, 조직구조의 문제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차라리 그렇게 계급을 신설하는게 더 나았을 것이다. 당장 임팔 작전의 총지휘관인 [[무타구치 렌야]]도 중장이고 휘하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도 중장이니 말 다했다. 거기에 [[육군성]]과 [[해군성]], 그리고 전시에 이 둘 위에 같이 설치한 [[대본영]]도 [[무능]]으로는 일본군 제일이었다. 거기다 그도 모자라서 [[관동군]]과 [[연합함대]]까지 끼어 넷이어 [[파벌]] 싸움을 하기까지. 참고로 현대 일본인들은 오만방자하고 자기만 옳다고 우겨서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대본영 참모'라고 하고,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물어보거나 보고하지 않고 자기주장대로만 하는 사람을 '관동군'이라고 부른다. 즉 육군 내에 말 안 통하는 대본영과 보고 없이 사고부터 치는 관동군과 한판 붙는 양상이라는 것. 여기에 육군의 경우 [[육군대학교]]를 졸업해야만 대좌 이상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이후 진급은 육군대학의 성적순으로 결정되었고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바꿀 수가 없었다. 그런데 육군대학 응시는 [[일본육군사관학교]] 졸업 성적 상위 20%안에 들어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유년학교 출신이 아니면 육사에 육대를 나와도 차별당했다. 유년학교를 나와지 않더라도 육사나 육대를 갈 수는 있었지만, 비유년학교 출신 육사 육대 출신도 차별했던 게 당시 일본 육군의 분위기였다. [[1942년]] 과달카날 작전 당시 대본영 항공참모였던 구몬 아리부미(久門有文) 중좌의 사례가 있다. 육대에서도 우등졸업을 한 소위 '군도조'에 명색이 대본영 작전참모였는데도 유년학교가 아닌 [[사범학교]]에서 육사로 진학했다는 이유로 대본영 주요 회의에서도 이 사람을 빼놓은 채로 [[회의]]를 했고, 과달카날 작전이 승산이 없다면서 항공전력 지원을 반대하는 [[의견]]을 아예 묵살한 채로 일선 [[부대]]로 [[좌천]]까지 시켜버렸다. 참고로 저 짓거리를 할 때 대본영 참모들의 좌장 노릇을 하면서 구몬하고 얼굴 붉히고 싸운 놈이 다름 아닌 [[츠지 마사노부]]... 참고로 구몬과는 육사에 육대 [[동기]]였다고... 결국 구몬 중좌는 혼자 비행기를 [[알류샨 열도]]로 몰고 간 채로 [[실종]]되는데, [[분노]]로 인한 [[자살]]로 보고 있다고 한다.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즉 비육사, 비육대 출신이라면 어떠한 대공로를 세워도 이 구조를 깨트릴 수가 없었다. 비육대 출신이 대좌로 승진하려면 중좌에서 전사하여 1계급 추서받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추축국 [[독일 국방군]]은 달랐다. [[독일 제국]] 시절부터 독일군, 특히나 참모진영은 철저한 실력주의를 고수해온 덕에 장교가 4천 명으로 제한되었던 전간기 시기에도 독일군은 유능한 자원들을 보유했고, 이는 재무장 선언 후 빠르게 군세를 확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들인 미국, 소련, 영국을 상대로, 그것도 양면 전쟁을 치르면서 한 때나마 [[모스크바]], [[런던]]까지 위협하며 6년이나 전쟁을 끌고 간 건 독일군 사령부와 지휘관들의 [[능력]]을 빼놓고는 이야기 할 수 없다. 그 독일 국방군도 군비제한 시기에 현존 장교자원들을 향후 대부대 지휘관으로 써먹기 위해 주로 전술적 역량 배양에 집중한 결과 전략적 안목을 갖추는 데 소홀했고 그 결과 전투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지는 독일군의 전형을 야기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나마 실질적인 지휘능력에 올인하고도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데 유교 경전 같은 데 시간을 할애한 일본군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을지는 더 말 할 것도 없다. 현 [[자위대]]는 이러한 결점을 의식했는지 [[병참|군수]] 출신의 [[항공막료장]], [[통신|통신과]] 출신의 [[육상막료장]], [[보급|주계]] 직별 출신의 [[해상막료장]]을 배출하는 등 비전투병과 출신들이 육상, 해상, 항공자위대의 총수를 1번씩은 해 봤다. 그래도 장성의 90% 이상은 [[방위대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비전투병과 출신의 각군참모총장은 미군조차 드문 걸 생각하면 꽤 나아진 것이다. 사실[[연고]](가문 또는 출신 지역, 서열)가 진급에 영향을 끼치거나, 사관학교 성적이 진급에 중요한 요소가 되고, 특정 [[병과]](주로 전투병과) 우대, 일부에게만 고급 교육 이수 기회 제공은 [[제2차 세계 대전]] [[일본군]] 뿐만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의 군대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당장 같은 2차세계대전 당시의 [[독일 국방군]]만 해도 인구의 1% 이내인 귀족 출신이 [[대령]]의 25%를 차지했고, [[장군참모]]는 전체 [[장교]] 중 1% 가량만이 취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이 있더라도, [[전시]]나 그에 준하는 위기 상황에서는 이러한 인사 기준에 더하여 별도의 특진 제도 등을 통해 능력 있는 장교들을 현장에 배치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평화시에는 전투에 재능 있는 군인보다 관리에 재능 있는 군인이 전투력 유지와 전력 건설 측면에서 유능할 수도 있다. 즉, 평시의 '관리형' 장교들은 주로 교육 훈련이나 [[조직관리]]와 같은 분야에 투입하고, 전시에 두드러지는 '현장형' 장교들을 [[특진]] 등의 형태로 전투 부대의 지휘를 맡기는 것. 물론 평시에도 전시에도 능력있는 장교가 최고이긴 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다른 국가들을 예로 들자면, [[미국]]은 (물론 이전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기는 했으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41년 준장으로 진급한지 2년도 안 돼서 [[대장]]으로 승진하고 유럽 전선을 총괄할 연합원정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조지 S. 패튼]]도 인성 문제로 인하여 [[전간기]]에는 한직을 전전했으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수 많은 불화에도 불구하고 전선 지휘를 맡아 정예 부대들을 지휘했다. [[독일]]의 경우에는 [[에르빈 롬멜]]은 당시 총통이었던 [[아돌프 히틀러]]를 수행하며 얻은 개인적인 친분으로 인해 기병이나 기갑 병과가 아님에도 제7기갑사단장으로 임명되어 [[프랑스 침공]]에서 대공을 세웠다. 즉, '진급 기준이 불합리했다' 관점 뿐만 아니라,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평시의 진급 기준만을 고수했다' 관점에서도 일본군 인사 체계의 불합리함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