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문제점 (문단 편집) === 비실용적인 [[사관학교]]의 교육과정 === 현대 서구식 군사학이나 군사 기술에 집중하는 대신 [[17세기]] 사무라이 [[전통]] 교육을 토대로 [[상명하복]]에만 집중한 교육을 했다. 장교를 [[사무라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일본육군사관학교]], [[일본해군병학교]], [[육군대학교]], [[해군대학]] 어디든 간에 이런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우선 [[정훈교육|정신교육]]을 한답시고 교과과정의 상당 부분이 군사학이나 군사기술이 아닌 17세기 사무라이들이 공부한 사서오경류를 가르쳤는데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보면 일본 육사 교과 과정의 반 이상이 이런 유학공부였다고 한다. 주자어류에 나오는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같은 유교경구를 장교들의 머리 속 깊히 박아 두고 전선에서도 [[반자이 돌격|어구에 기반을 둔 작전을 적절히 실현]]해서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성리학]]은 길고 폭넓은 유교 사상 중에서도 이론 중심적이고 형이상학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좋게 말하면 심오하고 나쁘게 말하면 뜬구름 잡는 소리인 [[철학]]을 상명하복 마인드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 써먹은 것이다. 이는 [[고전]] 동양 사상에 충실한 교육도 아니었고 [[전국시대]]의 [[무사도]]에 충실한 교육도 아니었다. [[유교]]에서 [[군국주의]]와 [[상명하복]]만 빼내어서 [[혼종|강조한 잡종 교육이었다.]] [[메이지 유신|근대화]]와 [[탈아입구]]에 그토록 열을 올리던 일본이 속으로는 이토록 보수적으로 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먼저, 전근대 [[동양]]에서 [[무관]]이라면 반드시 무경칠서를 읽어야 했다. 그 중 제일로 놓였던 것이 [[손자병법]]이다. 손자병법은 시대를 초월한 명저로 달달 외울만한 가치가 충분하지만, 일본군은 이 손자병법을 철저히 무시했다. 손무는 첫 장부터 '전쟁이 최선이 아니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선이니 명분이 없거나 국력이 뒤진 상태에서 전쟁을 하는 것은 극력 피하라'고 했으며, 또한 전쟁은 단기로 끝내서 장기전이 되는 것은 최대한 피하라고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싸그리 무시하고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가 [[멸망]]했다. 손자병법에서는 당연히 [[병참]]의 중요성도 강조했으나, 일본군은 이 가르침도 무시했고, 특히 [[무타구치 렌야]]는 보급이란 적에게서 얻는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물론 손자병법에서 식적일종 당오이십종이라며 적의 식량 1종을 빼앗아 먹으면 아군의 식량 20종에 해당하는 것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이 발언이 아주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였다. 그럴만한 게 전근대 시대에서는 [[식량]]이 그냥 떠오르는게 아니라 [[인력]]이나 [[동물]]로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아군이 힘들게 운반한 것보다 적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 힘들게 보급로 걱정하지 않고 바로 사용할 수 있었으니 효율이 좋았고, 이건 적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만큼 (적이 공격자일 경우) 그 힘들게 운반한 군량을 탈취해 [[관도대전|적을 엿먹이라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손자병법에는 분명히 "적에게서 탈취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고, 따라서 아군의 기본 병참의 중요성 또한 언급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역시 싹 씹어버렸다. 설령 적의 것을 탈취해서 사용할 수 있다 쳐도 그건 식량 정도에나 먹히는 얘기지, 각종 무기가 등장하는 현대전에서는 적이 아군과 동종의 탄환을 쓰지 않는 이상 [[탄환]]을 노획해서 쓸 수 없으므로 저 발언이 망언인 것은 바뀌지 않는다. [[무기]]를 노획해서 그걸 쓰면 그나마 좀 낫긴 한데, 전쟁이 무슨 [[게임]]도 아니고 적군한테서 노획한 [[장비]]를 사용하는 법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기 정비를 위해 무기를 분해하는 방법도 알아야겠지만, 받침대가 오목한 것 때문에 [[무릎]] 위에 넣고 쏘는 것으로 착각된 [[89식 척탄통]]의 예시에서 보듯이 무기를 사용하는 것도 그냥 그럴싸한 방법으로 쓰면 위험하다. 괜히 [[http://www.easy39th.com/files/Special_Series,_No._19_Japanese_Infantry_Weapons_1943.pdf|적군 무기 도감]]을 만들어 노획 무기 사용법을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일본 제국은 무사도를 국가적으로 장려했다. 그러나 이 역시 전국시대의 무사도와 전혀 관계가 없는 짝퉁이었다. 원래 무사도도 시대에 따라서 변했다. 그러니까 전국시대의 무사도도 가마쿠라 시대에서 보면 근본없는 짝퉁이다. 문제는 에도 시대의 무사도의 지침서인 하가쿠레는 에도 시대에 맞는 무사도를 제시한 것이 아니라 전란의 와중에 온갖 속임수와 비열함이 난무했던 전국시대적인 마인드를 무사도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슷한 개념인 [[기사도]]가 그 시대에 맞는 정신을 부여하기 위함인걸 감안하면 참 문제가 많았다. 당연히 에도 시대에 이런 시대에 불필요한 무사도는 막부에 의해 규제되었고 하가쿠레 역시도 음지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일본 제국의 무사도는 야마모토 쓰네토모가 [[에도 시대]]에 쓴 [[하가쿠레]]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 책은 전문성이 전혀 없는 [[불쏘시개]]에 가깝고 저자 역시 입만 산 정신병자에 가깝다. 저자는 [[시마바라의 난]]이 끝나고 20년 뒤에 태어나서 [[치킨 호크|전쟁 경험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다. 물론 저자는 대대로 사가 번을 섬겨온 이름있는 사무라이 출신이긴 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사람 말고 무사도를 제시하는 책을 쓴 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막상 무사도를 부활시키려고 하다 보니 하가쿠레가 가장 마음에 들어서일수도 있지만 그보다 '''하가쿠레를 대신해 삼을만한 지침도 없었다.''' 이러니 원판부터 온갖 속임수와 비열함이 난무했던 전국시대적인 마인드를 기본으로 해서 그나마 실전경험이 전혀 없는 자가 전문성이 전혀 없는 식으로 무사도라는 것을 써놓은 책을 경전으로 삼았으니 일본군을 전국시대 수준이라고 말하는 것도 오히려 전국시대 쪽에 엄청난 실례나 다름 없는 소리인 셈. 사에키 신이치의 저서 전쟁터의 정신사 - 무사도라는 환상(戦場の精神史―武士道という幻影―) (한국 출판본 제목: 무사도는 없다)에서도 이 하가쿠레의 무사도를 깠다. [[일본 제국 해군|일본 해군]]은 그나마 기계를 다루는 일이 많아서 이런 [[병맛]]나는 짓은 안한 듯하지만, 지나치게 [[기술]] 과목을 중시한 나머지 [[리더십]]이나 위기 대처능력을 기르는데 소홀했다. [[해군]]이라는 [[군종]] 특성상 육군 정도까지는 막장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서구 문물을 잘못 받아들여 자기네들의 편협한 시각으로 잘못 해석해 다른 방향의 문제를 일으키는 등 결국 피장파장이었다. 일본군 공통으로 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엘리트주의]]는 심각해서, 비사관학교 출신에 대한 [[차별]]은 엄청나게 심했다. 당시 기술직 장교들은 [[학사장교]] 형태로 배치했는데, 더 웃긴 사실은 비사관학교 출신 장교는 아무리 [[계급]]이 높아도 사관학교 출신 장교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비사관학교 출신의 [[좌관급 장교]]조차 사관학교 출신 소위의 명령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되니 토목공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관학교 초짜 소위가, 수많은 [[공사판]]에서 [[경험]]을 쌓은 비사관학교 출신 좌관급 공병장교를 지휘하는 경우도 벌어지는 등 사관학교만 나오면 [[자네가 주임원사인가?]]를 시전할 수 있는 [[골품제]] 사회가 되었다. 사관학교 출신의 우대가 심한 한국군도 이 따위 짓거리를 시도라도 했다가는 닥치고 하극상으로 [[군사재판]] 감이다.[* 한국군의 사관학교 출신 우대는 어디까지나 진급이 타 출신에 비해 빠르다는 거지 하극상을 용인한다는 말이 아니다. 짬밥 역시 어느 정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쏘가리 따위가 [[자네가 주임원사인가]]를 구사했다가는 상관한테 조인트 까일 정도는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