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문제점 (문단 편집) === 비실용적인 [[훈련]] === 어느나라 군대에서든지 정해진 [[TO]]가 넘는 지원자가 몰리면 TO를 넘어간 인원은 무조건 잘리게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필요한 조종사는 100명인데 요구사항에 걸맞는 후보생이 2~3백명쯤 있다면, 선발 과정중에 사소한 결함이나 핑계로 잘리는 사람이 나올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그 선발 과정에서 또 [[똥군기]]와 오컬트로 좋은 자질을 가진 조종사 후보자를 여럿 날려먹었다. 그중 가장 압권은 모든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비행학교 졸업 전날에 "군복 [[단추]]를 잘못 잠갔다"고 복장 불량으로 퇴교시키고, 졸업 전날 몰래 [[술]]을 마셨다는 이유로 퇴교한 것이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 대공의 사무라이에는 이런 식으로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정신머리가 썩었다!"라면서 퇴교시킨 사례들이 다반사였다고 나온다. 그가 졸업한 츠치우라 해군 항공대의 경우 1500명이 지원해 70명이 합격했는데 10개월간의 훈련 기간 중 45명이 탈락하여 조종사가 된사람은 겨우 25명 뿐이다. 이정도면 조종사가 아닌 장인을 키우는 수준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시 일본 해군은 평균 650시간, 육군은 500시간의 비행시간을 경험한 우수한 조종사가 3500명이나 있었다. 그러나 진주만 전투 같은 일방적인 대승에 55명의 조종사를 잃었는데 이정도만 해도 인력 손실이 부담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후 몇 번의 전투 만으로 해군 조종사 대부분을 날려 먹고, 이후 급하게 양산한 초보 조종사들로 메꾸게 된다. 당연히 전쟁이 거듭되며 조종사는 죽어나가고 필요한 비행기 숫자와 조종사 숫자는 계속 늘어났고, 모자란 조종사 수요를 맞추기 위해 이런 혹독한 선발 기준은 갈수록 낮아진다. 1943년 이전: 700시간, 1943년 이후: 500시간, 1944년: 275시간, 1945년: 90시간이다. 2년 사이에 훈련 시간이 1/8 정도로 급감한 셈이다. [[미드웨이 해전]]과 [[필리핀 해 해전]] 등을 거치며 숙련된 조종사를 대량으로 잃은 뒤에는 반대로 비행기 이륙하고 착륙할줄만 알면 죄다 전선에 투입할 정도로 선발과정이 날림이 된다. 이 시기에는 사카이 사부로가 자신이 비행학교 있을때 [[군복]] 단추 따위로 퇴교당한 아까운 [[동기]]들이 다수의 일선 조종사들보다 더 뛰어난 조종사였다고 회고할 정도가 된다. 그러나 선발과정이 비교적 양호 할때도 [[교과]] 내용중에는 [[비행]]과 아무 상관없는 [[검사]] 및 [[수업]]등이 있었다. 20여 명을 일렬로 앉혀놓은 뒤 비행기로 이륙한다고 생각하고 뛰어봐라며 훈련생을 [[서전트 점프]]로 날게 만든다는 황당한 과목도 당당히 정식 훈련과정으로 있었고, 훈련생에게 행하는 신체 검사 중에는 [[손금]]과 [[골상학]] 검사도 있었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서 인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