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문제점 (문단 편집) == [[연합군]]에게 애초부터 밀리는 경제력 == [[일본군]]이 아시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군대가 제대로 근대화/조직화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탄탄하고 강대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10년]],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넘어가게 될 정도로 경제력이 커진다. 여기에 [[제1차 세계 대전]]을 정점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한다. 그러나 중후반 들어서면서 슬슬 일본군의 한계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영국군]]이야 [[1945년]]이 돼서야 다시 아시아에 발을 들였으니 상관없고, 중국군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륙타통작전]] 등을 통해 대처를 좀 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사실상 미군에게 물량, 무기의 질, 전략, 기타 인프라 측면에서 압도당하게 되었다. 일단, 무기의 질은 초기에 좀 나은 축에 속했던 병기조차도 업그레이드가 현저히 느린 편인데다 그나마 그럴싸한 후속병기들도 미군에 미치지 못했으며 기존분에 비해서도 물량이 모자랐다. 반면 미군은 최고 혹은 그에는 약간 못 미치지만 그래도 몇 년 사이 엄청난 [[업그레이드]]를 거쳐 양질의 무기들을 [[콘비프]] 통조림에 [[소시지]]마냥 대량으로 뽑아대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에도 [[Ki-84 하야테]]와 같이 성능이 나름 괜찮은 병기들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일본의 [[공업]] 능력이 매우 부족하여 이를 위한 대규모 생산라인 설치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당장 [[전선]]에서 병력과 물자가 갈려나가는데 새로운 부품과 공장 생산라인, 그리고 [[시간]]을 요구하는 신형 후속병기를 위해 투자할 여력 따위는 없었다.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연합군에 비해 부족한 산업역량을 가졌던 독일도 어떻게든 수없이 다양한 신형 무기를 개발하고, 개별 생산라인을 올렸지만 생산량이 매우 부족한 건 마찬가지였다. 사실 [[1944년]] 기준 독일의 GDP 수치는 여전히 개전 초 공업지대의 대규모 상실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소련보다 훨씬 높았고, 전 유럽의 [[공장]]과 [[자원]]을 사용할 수 있었던 데다가 실제 사용한 군비도 소련이나 영국보다 훨씬 높았고, 사실상 미국 다음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생산량이 나름 많은 편이었는데도, 독일의 당시 [[GDP]]와 [[군비]]를 감안하면 실제 생산량보다 훨씬 많이 나와야 정상이었다. 이건 당시의 나치 독일도 충분히 인식하던 문제였고 실제로 당시 독일 수뇌부는 빨라도 1944년 이후를 기점으로 연합군과 개전을 해야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1944년 ~ 1945년 시기이면 1차 대전으로 갈려나간 공업지대의 복구가 완전히 완료되고, 기술력을 통해 최신예의 장비들을 쌓을 시간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전쟁으로 공장이 박살나는 와중에도 미국 다음가는 GDP를 1944년 기록함으로써 사실임이 입증됐다. 하지만 너무 빨리 개전한데다가 군수업체끼리의 알력 다툼과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나치게 [[중구난방]]으로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전쟁병기가 가지면 안될 생산법을 지닌 탓에, 가지고 있는 공업력을 100%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독일의 장비를 보면 알겠지만, '''지나치게 종류가 많다'''. 물론 후대에 게임을 개발할 게임사나 밀덕들이야 환장할 요소지만, 현대의 모든 군대가 그러하듯이, 전쟁병기는 최대한 소품종으로 대량 생산을 하는게 더 적합하다. 가령, 독일군은 전차만 무려 7 ~ 8종 가까이 뽑아댔는데, [[소련]]처럼 그냥 [[5호 전차 판터]]와 [[티거 2]]같이 쓸만한 놈으로 이원화만 시키고, 모든 생산 라인을 집중했어도 [[규모의 경제]]로 어마어마한 전차를 뽑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치 독일도 이런 문제점을 알았지만 전장의 상황이 너무 다급해서 중구난방으로 개발하느라 다품종 소량생산이 유지되었다. 반면 미국과 소련은 [[M4 셔먼]], [[T-34-76]]과 같은 전차들을 소품종 대량 양산하면서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켰고, 이를 통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보일 수 있었다. 오늘날 밀덕들은 타 참전국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은 종류를 자랑하는 2차 대전 나치 독일군의 병기 목록을 보며 즐거워하지만, 이는 결국 독일의 생산능력을 갉아먹는 요인이 되었다. [[알베르트 슈페어]] 같은 사람도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고, [[E 시리즈]] 같은 해결책도 강구했지만 지지부진했고, 결국 패전했다. 또한, 일본은 보급에 대한 마인드나 [[인프라]]가 현저히 부족했으며, [[정보전]]에서도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국방]]은 군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한 전쟁도 [[군인]]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만에 하나 [[국방비]]가 미국에 맞먹을 수준이라 할지라도, 러일전쟁 시기와 같은 소액의 [[재정]]으로는 미국과 전쟁을 펼칠 수 없다.[* 실제로 일본은 러일전쟁 때 무려 7년치 [[예산]]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당시 러시아는 [[피의 일요일 사건(러시아)|혁명]]이 일어나 나라가 어수선해 전쟁을 벌일 여력이 부족해 [[손]]을 뗀 것이다. 러일전쟁이 벌어진 기간이 1년 정도임을 감안해보면 이게 2년, 3년 갔다면 일본의 부담은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의 상대 미국의 경제력은 당시의 [[러시아]]보다도 더 강대했으며, 러일전쟁 당시 일본을 지원해줬던 국가가 영국과 미국이었다. 한 마디로 자기네들 부담을 좀 덜어줄 여력까지 있던 국가를 상대로 한판 뜨자고 한 것.]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돈이 어디서 나오느냐를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미국 이외에 [[국채]]를 사줄 만한 나라는 없다. 그런데, 그러한 미국이 적이 된다 하면, 그러한 방법은 조기에 차단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은 불가능에 수렴한다.''' 기본적으로 국방은 [[국력]]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춤과 동시에 국력을 함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교적 수단에 의해 전쟁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현재 세계 정세의 국방의 본의에 따르는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 >21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 원수 해군대장 정2위 공1급 [[자작(작위)|자작]] [[가토 도모사부로]] 당장 일본은 '''[[석유]] 연료의 92%를 수입'''에 기댔고, 그 중 75% 가량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물론 정밀 공작 기계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석유와 [[기계]]를 공급하는 미국과는 사이가 갈수록 나빠졌다. 끝내 이것이 진주만 공습의 원인이 되었다. 한 마디로 생필품과 자금을 대주는 [[물주]]에게 [[하극상|자기 능력도 안 생각하고 한판 붙은 격]]이었다. 굳이 물주와 붙을 생각이었으면, 그 전에 미리 물자를 비축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자금을 융통하고 [[수입]]이 필요한 물자를 얻을 다른 수입원을 강구한 뒤에 붙어야 했다. 이것도 장기전을 생각해보면 힘든 일이다. 그런데 이미 중국과의 전투로 인해 물자와 인원을 날로 소모하기만 했고, 미국 이외의 다른 국가와의 [[관계]]도 나쁜 상황에서 [[개전]]을 결심한 것이다. 일본의 마인드는 "'''한타 싸움에서 이겨 굴복시켜 [[협상]]해서 끝내자!!'''"였지만, 미국의 눈에는 헛바람 들어 날뛰어 대니 [[자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 셈이다. 당장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전비다. 2차 대전 전 기간을 통틀어서 [[일본군]]의 총 전비는 미국의 1/8도 안 된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이 투입한 전비의 70% 이상은 유럽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냉정하게 말하면 한타에서 이기지도 못했다. 그나마 승리한 [[진주만 공습]]은 정작 물자 시설은 전혀 건들지 않고 전투함과 전투기만 부숴댄 탓에 미군이 물자 시설로 빠르게 복구해서(...) 결과적으로 별 효용이 없었고, 정작 진짜 '한타'라고 부를만한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역|과달카날 전투]], [[레이테 만 해전]] 등은 모두 졌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아무리 열강이라도 [[지구]] 반 바퀴를 돌아와 [[상륙전]]까지 감행하는 원정은 상당한 지출과 시간을 요구하니 적당히 방어만 잘하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일본도 미국이 [[강대국]]임은 알았겠지만, 그들은 이런 거리적, 지리적 이점을 믿고 개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도 상륙전은 일반적인 지상전에 비해 비교도 안 되는 많은 전비와 자원 소모를 유발하며, 일본도 [[전간기]] 식민지들을 다 [[상륙]]해서 [[점령]]해 봤기 때문에 이 점을 매우 잘 알았다. 또한 일본의 국력이 어디까지나 미국과 비교했을 때 크게 열세였던 것이지, 기본적으로 강대국의 반열에 들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일본보다 확실하게 공업력과 경제력에서 앞서는 나라는 미국, 소련, 독일, 영국 정도였으며, 프랑스와는 거의 대등했고 이탈리아보다는 확실하게 우위에 있었다. 실제로 해군이 빈약한 소련 상대로도, 미국만큼의 물량은 안 됐던 영국 상대로도 이 전략은 매우 훌륭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바빠 상대적으로 부실한 Z함대, 일명 '영국 동양함대'를 보냈다가 [[말레이 해전]]에서 말아 먹으면서 일본의 이런 확신만 굳건하게 만들어놨다. 문제는 미국의 [[힘]]이 일본의 상상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강대국임은 알고 있었지만 공업능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미국의 인구는 일본의 2배였으며, [[미국인]]의 당시 [[국민 소득]]은 [[일본인]]보다 17배나 많았다. [[철강]] 생산량은 일본의 5배였으며 [[석탄]] 생산량은 7배, 그리고 [[자동차]] 생산량은 '''자그마치 80배'''였다. 이러다보니 당연히 일본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함선]] 건조량으로 비교하면 더욱 차이가 심각해진다. 민간 상선부터 보면, 미국은 전쟁 기간에 총 3,399만 톤이 넘는 상선을 건조했지만 일본은 불과 400만 톤의 상선을 건조했다. 그나마 건조한 상선들도 미 해군에 의해 격침되어 [[일본 경제]]는 그야말로 고사되기 직전이었다.[[http://www.combinedfleet.com/economic.htm|예시]] 전투함으로 넘어가서 비교해보면, 일본은 한 해에 건조한 항공모함 숫자가 10척 이상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미국은 각종 전투함을 한 해에 기본 두 자리 단위로 생산하여 1943년에는 '''65척'''이나 건조했으며, 구축함 생산량도 '''128척'''에 달해 일본 구축함 생산량의 10배를 넘어섰다. 그리하여 미국은 2차대전 중 수송함 [[리버티선]] 2,810척과 각종 항공모함 151척[* 정규 항모 28척 및 나머지 대부분은 경항모 및 호위항모. [[카사블랑카급]] 호위항공모함 50여척 포함.]을 건조했다. 그러나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은 18척 뿐이었다. 그리고 미 해군은 이렇게 복붙 수준으로 대량으로 건조한 주력함들을 태평양 전선에 부담없이 투입할 수 있었다. 미국의 [[동맹]]인 영국은 세계구급 해군국가였던 반면 독일은 영국을 상대하기도 벅찬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였고, 실제로 독일은 영국 해군도 제대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은 미국을 해군으로 칠 가능성이 없었고, 따라서 미국은 대서양에 해군력을 투입할 이유가 없었다. 일본은 미국인들이 향락적인 문화에 빠져 전쟁을 싫어할 것이고 반면 일본인들은 정신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이길 것이라고 [[정신승리|자기들 멋대로 판단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전쟁이 터지자마자 그동안 전쟁 개입을 반대하던 분위기는 다 사라지고 미국인들이 '''너도 나도 일본, 독일과 전쟁하겠다고 자원입대하던 상황'''이었다.[* HBO의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인 카우드 립턴의 증언을 들어보면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지 잘 알 수 있다. 그가 살던 곳은 인구가 많지 않은 시골이었는데도 '''입대 심사에 탈락했다'''는 이유만으로 3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는 또 다른 드라마 [[더 퍼시픽]]에서도 이 점이 잘 나타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유진 슬레지는 폐질환을 앓고 있어 부모가 가지 말라고 만류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입대했다.] 이렇다보니 전쟁 기간동안 미군의 총 병력은 '''1,236만'''으로 불과 600만을 동원한 일본보다 두 배의 전투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https://www.quora.com/What-country-had-the-largest-army-in-World-War-II|예시]] 일본은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열강들에 비해서도 뒤쳐진 경제력과 총력전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도 점령지에서 다량의 소강과 무쇠를 생산했지만, 일본은 식민지인 조선과 만주에서 그보다 매우 뒤떨어지는 수준의 생산력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독일 본토와 일본 본토를 비교해봐도 독일이 일본보다 몇 배 앞서는 건 마찬가지였다.[[https://blog.naver.com/spartacus2/80033993353|예시]] [[GDP]] 면에서도 영국, 나치 독일, 소련보다 한참 뒤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https://www.quora.com/During-WWII-generally-was-Germany-or-Japan-the-more-powerful-enemy-and-which-was-more-threatening-to-the-United-States|예시]] 철강 생산량 면에서도 나치 독일과 영국보다 [[https://brainly.com/question/19162662|한참 뒤쳐졌으며]] 전차와 항공기 생산 부분에서도 나치 독일에 비해 한참 밀리는 수준이다.[[https://www.quora.com/What-was-the-biggest-strength-of-the-Allies-during-WWII|예시]] 그럼에도 독일군은 항상 연합국 대비 전차와 항공기가 부족했던 상황이었을 정도였으며, 이런 악조건 하에서도 나치 독일이 홀로 유럽 전선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일본이 득을 봤다. 실제 독일은 양면전선도 아니고 무려 전선을 3개(영국-독일 전선, 북아프리카 전선, 독일-소련 전선)나 만들어놓은 상황이었다. 그나마 영국과 독일 간에는 항공전 정도만 있었다고 해도, 2개 전선을 만들고 수년이나 버틴 셈이다. 심지어 생산력을 100% 발휘 못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면 대전략이 망해서 그렇지 제대로 버티긴 한 셈이다. 그러므로 나치 독일 없이 일본 단독으로 연합군들과 싸웠다면 거리의 장벽이고 뭐고 간에 다 씹어먹고 1945년까지 버티지도 못하고 패망했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을 것이다. 애초에 실제 역사상에서도 1939년 9월에 개전한 나치 독일보다 한참 늦은 1941년 12월에 개전해놓고 패전은 나치 독일이 1945년 5월인데 반해 일본은 1945년 8월이므로 나치 독일보다 전쟁 기간이 압도적으로 짧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