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병영부조리 (문단 편집) == 원인 ==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프로이센]]식의 엄격한 내무규율과 강한 군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당시 농민과 구 [[사무라이]] 출신이 대부분이던 일본군을 단기간에 근대화한 군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프로이센식 군제를 도입했고, 그 전의 [[프랑스]]식의 자율적인 군사 제도보다 일본 무가 사회의 분위기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지라 일본군 안에 급격히 퍼져 단기간에 근대화한 일본군의 모체로 거듭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프로이센 등의 18세기 당시 엄격한 군기의식은 전열보병을 이용한 당시 전투방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구 시대의 이런 측면은 독이 되기 시작한다. [[전열보병]] 문서로. 일본군의 구타 자체가 최소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부터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악습 중 하나라는 설도 있다. 애초에 센고쿠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를 폭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이를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시선도 있다. 사실 그 시대에 구타만으로 끝나면 정말로 크게 봐주는 거고 대부분 그냥 즉결 처분하기 일쑤여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다시피 일본군은 [[센코쿠 시대]]부터[* 허나 이것도 너무 얕게 시작한거고 깊숙히 보면 센코쿠 시대 시작 불과 70년 전만 해도 60년간 일본이 두쪽으로 갈려 싸운 남북조시대도 있었으며 그 이전인 가마쿠라 막부 말기도 영 아니었고 가마쿠라 막부도 겐페이 전쟁을 거쳐 일어섰다.] 시작해서 [[세이난 전쟁]]에 이르기까지 하도 서로 치고 박기만 해서 전쟁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느꼈는 데다가 그러다보니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으로 보이는 인명 경시가 만연했기 때문에 일본군 내에서는 즉결 처분이나 구타가 일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일본 [[선종(불교)|선불교]]가 종교적으로 영향을 끼쳤단 주장도 있다. 일본 선종은 한국과 매우 달라서 승려들에게 엄격한 군기를 강요했고, 고참승이 신참승[* 일본 불교에서는 갓 출가한 사람을 그냥 신참 혹은 신도(新到)라 부르며, 삭발식이 끝나면 바로 정식 승복을 착용하므로 일반 승려와 행자를 복장으로 구별하는 한국 불교와 조금 다르다.]을 마구 갈구고 구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http://blog.goo.ne.jp/a_pup_king/e/fcdad21076ca3b1ac6593a7aa813d2b7|관련 블로그]]. 기타 영향을 들자면, 일본군에는 지금 한국과는 달리 무작위배치가 아니라 자기 고향에 있는 군부대로 입대하였다.[* 아마도 타지사람들과 섞이면 지역감정으로 싸움날것을 예방하는 차원같다. 한국군은 훈련소 입대시 본적지가 같은 이들로 편성한다.] 이렇게 하다보면 입대해보니 사촌형, 사촌동생, 친척, 친구, 직장선후배들이 섞여있을 확률이 높다. 군 계급의 위계서열을 따르지 않고 사회계급을 따르는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계급이 깡패가 되게 한 요인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창설기에는 [[천황]] 숭배 교육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군기가 세워지지 않았다. "만세일계인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황에게 위대한 권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신화가 천황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겠어? 그래서 군 지휘부는 폭력으로 철저한 군기 확립을 하려고 한 거야. '''[[논리적 오류/비형식적 오류#s-3.21|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납득시키는 방법으로는 폭력이 제일 쉽지]].'''" >---- >― [[카리야 테츠]]의 [[일본인과 천황]] 中 [[카리야 테츠]]의 만화 [[일본인과 천황]]에 따르면, 일본군 창설 당시, 각 군은 번주(藩主)에 충성하는 체제에서 국왕(천황)에게 충성하는 체제로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구타를 묵인했다. 실제로 이러한 구타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 중 하나가 [[메이지 덴노]]가 내린 상관의 명령을 곧 천황의 명령으로 규정한 군인칙유로, '''일본의 근대화는 껍데기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사실 일본에서 천황은 빠르면 헤이안 시대, 늦어도 가마쿠라 막부가 자리잡은 이후부터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실권은 헤이안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후지와라가나 타이라가를 비롯한 섭정가에, 가마쿠라 막부와 아시카가 막부를 거쳐 전국시대까지는 막부의 쇼군에게 있었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는 명분조차도 쇼군에게 이양되었으며, 왕실은 돈있는 귀족이나 영주들에게 서예 작품을 팔거나 하는 식으로 따로 경제활동을 해야 했다.[* 심지어 천황이 지나가자 동네 아이들이 돌무더기를 던지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 무로마치 막부 시절엔 막부 쇼군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아 일본을 동아시아 책봉-조공 질서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니[* 명과의 무역을 목적으로 한 조치였기도 했으나, 민족주의가 발흥한 근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꽤 굴욕적인 모습.] 자국 황제(천황)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던 셈.[* 다만 그렇다고 덴노가 정말 투명인간 취급만을 받은건 아니다. 덴노가 역대급 치욕의 시대를 보낸 시절은 고나라 덴노로 대표되는 그 전후까지 합쳐 3대 시절로 이 시절의 덴노는 정말로 서예 작품을 파는 식으로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갸야 했고 길거리에서 돌이나 얻어맞는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보통은 덴노도 조정도 실권은 없었어도 조정의 관위는 헤이안 시대에도 귀족들의 격을 나누는 기준이나 다름없었고 이는 지배층이 귀족에서 사무라이로 교체된 가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천하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 덴노를 아주 대놓고 개무시하지 않아서 적어도 경제적인 지원 정도는 해줬고 덴노가가 쇼군가와 혼사를 맺거나 영지를 받기도 했다. 앞에 언급한 쇼군도 아시카가 요시미츠라고 일본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찬탈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는 쇼군이라 좀 특이 케이스이긴 하다. 물론 그만큼 덴노가 쩌리 취급을 받은건 맞지만]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조차도 에도 막부의 무능력함과 부패한 쇼군 일가에 대해 다이묘들이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쇼군에 대항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찬밥신세였던 천황을 얼굴마담용으로 들고 나온 사건일 뿐, 이 과정에서 천황이 주도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다.[* 그나마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를 고메이 덴노도 35세로 단명했다.] 즉, 애당초 고대 일본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약 1000여년 가까이 천황은 사실상 일개 평민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던 것.[*오류 나라 시대까지는 확실히 실권이 어느정도 있었고 헤이안 시대에는 비중이 줄어들었지만 허수아비 군주 노릇은 하고 있었으며 이후부터 정말 껍데기만 남지만 그 껍데기라도 남은 것 덕분에 센고쿠 시대 개막 전까지는 남은거라도 그럭저럭 유지되었고 센고쿠 시대에야 좀 비참해졌지만 에도 막부 시절에 다시 경제적으로는 나름 괜찮았다. 애초에 귀족들의 격은 거의 관위로 표출이 되었기에, 쇼군은 미나모토 출신만이 될 수 있다는 불문율이 있는 바람에 쇼군을 칭하려면 거짓으로라도 자기 조상의 성이 미나모토였다는걸 증명해야 했고 미나모토가 원래 덴노가 내려주던 성(주로 신적강하될 때 미나모토 아니면 타이라가 많이 주어진다.)이었던 만큼 귀족도 쇼군도 덴노를 허수아비로 만들 순 있었을망정 정말 평민이나 다름없이 개무시할 순 없었다. 현대 한국으로 억지로 따지자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대기업에서, 오너인 명예회장과 그 2세는 실권이 없지만, 이들의 친인척이 로얄패밀리 행세하며 실권 장악하는 격.] 심지어 천황은 쇼와 시대에 와서야 그나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메이지 덴노는 사실상 실권이 없어서, 다이쇼 덴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등의 이유로 메이지 유신 이후까지도 천황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랬던 천황을 갑자기 '만세일계의 천황'이라는 식으로 없는 권위를 세우려고 하니 당연히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천황의 권위를 받쳐주는 것은 구타였다. 관련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3ehRsvxJeE&list=PL5JtuBINLqWr68BpxxPDt6glNhRra82Mm&index=12&t=0s|아키히토 vs 아베: 상징천황과 초국가주의 [한겨레 다큐] ]] 영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일제의 만행은 천황제라는 극도의 권위주의 체제와 [[선민사상]]이 빚어낸 참극이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