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육군사관학교 (문단 편집) === 일본인 === * [[우가키 가즈시게]](1기): 우가키 군축의 그 우가키가 맞는다. [[가토 다카아키]] 내각에서 제35대~37대, 39대 육군대신을 지낸 뒤 제6대 [[조선 총독]]을 역임했으며, 이후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외무대신을 맡았으나 이후 정계를 은퇴.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시라카와 요시노리]](1기): [[러일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으며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관동군]] 사령관, 제38대 육군대신을 역임. 한국인들에게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암살당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무토 노부요시]](3기): [[러일전쟁]]과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한 적이 있으며 이후 [[관동군]] 사령관에 이어 요직으로 손꼽히는 육군 3장관의 세 자리[*육군3상 육군대신, 참모총장, 교육총감] 중 둘에 해당하는 교육총감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미나미 지로]](6기):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관동군]] 사령관과 제36대 육군대신을 역임했고 이후 제7대 [[조선총독]] 직을 맡는다. 한국인들에겐 [[민족말살정책]]으로 유명하다. 총독 퇴임 이후 추밀원 고문, [[귀족원(일본)|귀족원]] 의원 등을 지냈고,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이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6년 종신형이 선고되었으나 건강 문제로 1954년 가석방, 1955년 사망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하야시 센주로]](8기):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이후 [[조선군]] 사령관, 교육총감을 거쳐 제39대, 40대 육군대신을 맡는다. 이후 정계에 입문해 외무대신, 문부대신을 역임했으며 제33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나 얼마 안 가 사퇴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아라키 사다오]](9기): 죽창 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고 정치 군인의 행보를 보였다. 헌병사령관 시절 [[기타 잇키]] 등 극우 인물들과 교류하고 과격한 청년장교단을 이끄는 [[황도파]]의 핵심인물로 있었다. 육군 교육총감 직을 맡던 중 [[이누카이 츠요시]] 내각에서 육군 대신으로 발탁, 뒤이은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 이르기까지 제37, 38대 육군 대신을 역임한다. 하지만 [[황도파]]가 극단으로 치닫자 점차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에 청년 장교들을 가라앉히려다 이들에게도 신망을 잃게 되어 육군 대신을 사임했다. [[2.26 사건]]이 일어나자 같은 [[황도파]]였던 아라키는 공범 혐의가 씌워질까 우려, 쿠데타군에게 원대복귀를 요구했지만 이 일로 제대로 찍혀 이 이후 진행된 황도파의 제거 작업으로 인해 예편되었다. 이후 1938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문부대신으로 발탁, 황도교육을 추진하고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으나 이로 인해 2차대전 패전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 구속되어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병으로 1955년 가석방되었고 1966년 사망.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마쓰이 이와네]](9기): 러일전쟁에 참전했으며, 관동군 산하 특무기관장을 역임했다.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한 후 예편했으나,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며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중지나방면군 겸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을 맡아 전쟁을 지휘한다. 그가 지휘하던 병력들이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는데, 그는 결핵으로 당시 지휘 계통에선 물러나 있었지만 어쨌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패전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 하지만 난징 대학살 당시엔 병석에 있었단 이유로 A급이 아닌 B, C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아베 노부유키]](9기): 육군성 군무국장, 육군 차관,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외무대신과 제36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 하지만 의회의 불신임으로 사퇴 후 마지막 [[조선총독]]으로 부임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 후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고 9월 9일 [[존 하지]] 중장과 만나 항복 문서에 조인했으며, 이후 재조선 일본인들을 버려두고 가족과 함께 도망치다 걸리기도 하고, 일본인들을 철수시킬 자금을 마련한다며 조선은행권을 남발하여 조선에 인플레이션 공황을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미국 측에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광복 이후 조선은 각종 경제 사회적 혼란을 겪게 되었으니 떠나면서 끝까지 재를 뿌린 셈.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혼조 시게루]](9기): 러일전쟁과 시베리아 출병에 참전. 이후 일본 육군 제10사단장, [[관동군]] 사령관, 시종무관장 등을 역임하였다. 관동군 사령관 당시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남작 작위를 수여받고 퇴역한다. 2차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 측이 체포명령을 내리자, 11월 30일 일본 육군대학 내 보도회 이사장실에서 할복으로 자살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데라우치 히사이치]](11기): 한국 통감과 초대 [[조선총독]], 제18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총독]]을 지내며 무단 통치로 악명높았던 그 사람 맞는다. 아버지인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871년 일본 육사 출범 전에 소위로 임관했다.]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걸었다. 조선군 참모장, 대만군 사령관을 거쳐 [[히로타 고키]] 내각에서 제42대 육군대신을 지냈고, 1937년에는 육군 교육총감 직을 맡게 되었으나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으로 전보된다. 이후 1941년 11월 남방군 총사령관으로 이동하여 [[태평양 전쟁]]의 작전 계획을 입안하였으며, 전쟁 발발 이후 남방총군을 지휘하며 일본군의 동남아시아 전역을 총괄한다. 1943년 [[원수]]로 진급했으며[* 다만 일본군에서 원수는 계급이 아니라 칭호기에, 여전히 육군 대장이었다. 즉 원수 육군 대장.] 남방군 사령관 재직 중 그 [[임팔 전투]]를 결재한 최종 책임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극동군사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후 1946년 포로수용소에서 뇌경색으로 숨졌다. 최종 계급 원수 육군 대장. * [[고이소 구니아키]](12기): 육군성 군무국장, 육군차관, [[관동군]] 참모장, 조선군 사령관을 거쳐 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뒤를 이어 1942년 조선총독에 취임한다. 이후 1944년 제 41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태평양전쟁]]을 이끈다. 관동군 근무 시절엔 만주국의 성립에 앞장섰으며 조선 총독 시절엔 미나미 지로의 뒤를 이어 [[민족말살정책]]을 강화시켜, [[학도병]] 제도와 강제 징용 및 징병제를 실시했고 근로정신대나 [[위안부]]제도를 실시하며 한반도에서의 착취를 지휘했다. 1944년 [[사이판]]이 미국에 점령당하자 책임을 지고 물러난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어 4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군 내에 우군이 별로 없었고, 당시 일본 정계의 정치 싸움 끝에 무난하다고 총리에 지명된 터라 군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거기에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을 해임하려다가 반발한 귀족 출신 원로들과 해군 출신들의 탄핵으로 인해 지명 8개월 만에 총리대신 자리에서 물러나고 만다. 2차대전 패전 이후 1948년 [[극동군사재판]]에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금고형을 받고 수감됐고 1950년 옥중에서 사망한다. 최종계급 육군 대장. * [[스기야마 하지메]](12기): 일본군 [[삼대오물]] 중 한 사람 맞는다. 그런데 정작 역대 일본 육군 중 단 두 명만이 할 수 있었던 육군 3장관직[*육군3상]을 모두 거친 인물이란 게 특징. [[러일전쟁]]에 참전했었으며 [[2.26 사건]]을 진압할 당시 육군사관학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공로로 육군대신에 지명되어 제44대, 45대 육군대신을 역임한다. 엘리트 가도를 걸었으나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한심한 작전 입안 및 업무능력으로 무려 덴노인, 군사 전문가도 아닌 [[히로히토]]에게 직접 갈굼을 당하기도 했고 그 [[임팔 작전]]을 [[무타구치 렌야]]의 얼굴을 봐서라도 결재해 달란 희대의 뻘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후 패전의 책임을 지고 유서를 남기고 권총자살. 최종 계급 원수 육군 대장. * [[하타 슌로쿠]](12기): 육군성 군무국장, 대만군 사령관과 [[관동군]] 사령관을 거쳐 육군 교육총감 직에 올랐다. 1937년 말 [[난징대학살]]이 터지자 당시 사령관이었던 [[마쓰이 이와네]]의 경질을 주장했고, 이후 마쓰이의 뒤를 이어 중지나방면군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지휘한다. 1939년 [[아베 노부유키]]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자 육군대신에 임명, 아베에 이은 [[요나이 미츠마사]] 내각에서도 육군대신을 역임(48, 49대)한다. 1941년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으로 돌아갔는데 이때 일본군은 각종 중국 민간인 대규모 학살 등을 저질렀다. 1944년 원수로 진급했고 1945년 4월 일본군의 본토결전에 대비해 [[히로시마]]에 제2총군이 창설되자 사령관에 임명된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될 당시 현장에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위기를 넘겼고, 이후 8월 18일 [[관동군]] 시찰 차 [[하얼빈]]에 갔다가 [[만주 작전]]으로 남진한 [[소련군]]에 붙잡힌다. 당시 소련군은 그가 원수였고 당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보다 선임이란 이유로 그에게 항복문서의 조인을 요구했고, 일본군이 항복한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언도받는다. 허나 1954년 [[가석방]]으로 출소했고, 이후 1962년 사망한다. 최종 계급 원수 육군 대장. * [[고모토 다이사쿠]](15기): [[관동군]] 소속 참모로 1928년 [[황고둔 사건]]을 일으킨 주역 중 하나. 이 사건으로 [[장쭤린]]이 암살되면서 [[봉천군벌]]과 일본과의 관계가 틀어졌고 당시 일본 정계와 국제정세에 큰 파장을 가져오며 시끌시끌해졌지만 그를 싸고 돈 군부 내 세력으로 인해 처벌을 받지는 않고 예편되는 순에서 마무리된다. 그 후 국공내전에 개입했다가 [[홍군]]에 붙잡혔고 전향을 거부하다 1955년 옥사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좌. * [[우메즈 요시지로]](15기): 참모본부 편제동원과장, 육군성 군무국 군사과장 등을 거쳐 참모본부 총무과장을 맡았고, 이후 [[2.26 사건]] 당시 2사단장으로서 진압에 참가하고 이후 육군 차관에 임명된다. 이때 [[황도파]]를 군에서 몰아내는 숙군 작업을 맡았는데 이 때문에 우익 인사들의 반발을 사 그를 비방하는 투서가 뿌려지기도 했다. 이후 1939년 [[관동군]] 사령관에 취임했고, 1944년 [[도조 히데키]]가 [[사이판]] 함락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그 후임으로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다. 도조 히데키는 당시 총리와 육군대신, 참모총장을 겸직하고 있었는데 총리 직에서 물러나는 대신 육군 대신 직은 유지하려 했으나, 육군 3장관[*육군3상] 회의에서 당시 교육총감이었던 [[스기야마 하지메]]와 손을 잡고 도조를 밀어냈고, 스기야마가 육군 대신을 맡게 된다. 참모총장이 되어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해당 직을 유지하였는데, 그는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와 본토결전을 주장해 왔지만 1945년 8월 14일 최종적으로 [[히로히토]]가 항복을 결정하고 이를 공식화하자 이에 따르며 육군 청년 장교단의 [[궁성사건]] 움직임에 반대하고 나섰다. 최종적으로 전쟁이 끝나자 [[일본의 항복|항복 조인식]] 당시 [[시게미츠 마모루]] 외무대신과 함께 미 해군 [[아이오와급]] 미주리함 함상에 올라 항복 문서에 조인한다. 이후 [[극동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이 언도되었으나, 복역 중 1949년 사망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오카무라 야스지]](16기): 일본군 최악의 전쟁범죄자 중 한 사람. [[신멸작전]]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을 학살했으며 [[일본군 위안부]]를 만들어낸 인간이기도 하다. 상하이파견군 부참모장과 [[관동군]] 부참모장 등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 북지나방면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5년 8월 [[대본영]]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소문이 돌자 당시 당초 이에 불복하려 했으나 덴노의 결정이 내려지자 이에 승복한다. 종전 이후 [[장제스]]와 손을 잡고 치안을 유지하며 무장을 [[국민혁명군]]에 전달하는 조건으로 재중 일본인들을 귀국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하며, 이후 전범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자 모든 책임을 [[마쓰이 이와네]]에게 넘기고 병을 이유로 빠져나와 처벌을 받지 않는다. 전후 중국 국민당과 협력관계를 이어갔기에, 전범 기소를 피했고 1966년 병사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도이하라 겐지]](16기): 육사 16기와 육군대학을 거쳐 참모본부 지나과(중국과)에 배치되어 오랫동안 근무했지만 집안 연줄 탓에 진급과는 인연이 없어 40세가 되도록 소좌 계급에 머물러 있었으나, 황실과 연줄을 만들어 베이징 무관보로 전출되었고, 이후 [[황고둔 사건]]을 주도한다. 1931년 [[펑톈]]의 특무기관장에 임명되어 만주로 일본 자본을 침투시키는 역할을 맡았고 이어 [[만주사변]]의 발발에 주도적 역할을 맡았다. 이후에도 각종 첩보 및 정치공작을 진두지휘했고 [[화북분리공작]]을 고안, 실행하고 각종 정치사건 및 군사작전을 주도하였다. [[왕징웨이 공작]]을 이끌어 [[왕징웨이 정권]]을 성립시킨 이후 1938년부터 [[관동군]] 사령관을 맡았고, 이후 육군사관학교장과 군사참의관을 역임하고 1941년 [[진주만 공습]]과 [[남방작전]]을 입안하는 데 참여하였다. 동부군 사령관과 남방 싱가포르 7방면군 사령관을 거쳐 1945년 4월 교육총감에 임명되었고 이후 1945년 8월 14일 [[아나미 고레치카]], 우메즈 요시지로 참모총장과 함께 [[히로히토]] 덴노가 결정한 항복에 승복, 찬성하는 결의문에 서명한다. 1945년 9월 전쟁 지도 및 남방군 시절 포로 학대 혐의 등이 적용되어 A급 전범으로 [[극동군사재판]]에 서게 되었고 1948년 12월 22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이타가키 세이시로]](16기): [[관동군]] 참모부장 및 주만주 대사관 국방무관, [[관동군]] 참모장을 역임하였고 1938년 제46대 육군 대신에 임명되어 47대까지 연임한다. 지나파견군 참모장을 거쳐 노몬한 사건으로 일본군이 소련군에 대패하자 이후 [[조선군]] 사령관에 임명된다.이후 [[남방군]]으로 전보되어 7방면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5년 [[싱가포르]]에서 [[루이 마운트배튼]]에게 항복하며 종전을 맞는다. 1948년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고, 12월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안도 리키치]](16기): [[영국령 인도제국]] 주재 국방무관과 육군 참모본부 근무를 거쳐 육군성 병무과장과 육군 보병학교장을 맡았고, 1940년에는 남지나방면군 사령관 직을 맡게 된다. 이 때 남지나방면군이 [[나치 독일]]에 항복한 [[프랑스]]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무단으로 진주, 당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키게 된다. 이는 미국을 자극하여 외교적 마찰이 발생, 미국은 석유 금수와 자산동결 조치를 일본에 취하게 되는데 안도 리키치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1941년 1월 예편된다. 하지만 1941년 11월 현역으로 복귀, [[대만군]]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레이테 만 해전]] 이후 대만 방위가 위험에 처하자 대만 총독 직을 겸임하게 되면서 최후의 대만 총독이 된다. 종전 이후 중화민국에 항복했고, 이후 상하이로 압송되었으나 감옥에서 음독자살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도조 히데키]](17기): [[2차 세계대전]]이나 [[태평양전쟁]]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름 한 번은 들어봤을 제국주의, 군국주의 일본의 상징 그 자체이자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히로히토]]와 동급의 취급을 받는 [[추축국]]의 전쟁범죄자. 육사를 거쳐 [[육군대학]]에 들어갔지만 3수 끝에 들어가고 성적도 매우 좋지 않았으나, [[관동군]] 헌병사령관[* 사실 육군대학 출신이면 갈 일이 없는 한직이었다.] 직을 맡으면서 잔혹하게 반일세력을 탄압하며 악명을 떨쳤고 1936년 [[황도파]]가 주도한 [[2.26 사건]]을 진압하면서 세력을 넓히게 된다. 1937년 관동군 참모장 당시 [[루거우차오 사건]]을 확대시켰고, 이후 일본군의 대륙침략에 앞장섰으며 이후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에서 제50대 육군대신을 역임하며 일본을 [[추축국]]에 가입하도록 이끌고 [[태평양전쟁]]을 기획한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수렁에 빠져들자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는 건 역부족이라 생각해 개전 반대파로 선회했지만, 육군 강경파가 전쟁을 주장하며 결국 이들을 달래기 위해 제40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한다. 하지만 육군 강경파의 전쟁 여론을 잠재우는 데 실패했고, 그는 군을 달래기 위해 [[히로히토]]를 설득, 결국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을 명령,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전쟁 초반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하자 힘을 얻게 되었고, 문부 및 군수, 상공대신까지 역임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렸으나 이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군이 열세로 전환되자 육해군과 정계의 신임을 잃게 된다. 하지만 그는 육군 참모총장과 해군 군령부총장을 경질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이후 총리대신과 육군대신, 육군참모총장 세 자리를 겸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하지만 일본군은 제대로 반격을 시작한 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결국 1944년 7월 [[사이판]]이 미군에 함락되자 책임을 지고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군부와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도조를 견제하려 한 [[히로히토]]의 의지로 [[스즈키 간타로]]가 총리직을 맡게 되었고, 이후 일본 정부의 항복 교섭을 방해하며 끝까지 항전을 주장했으나 결국 일본은 항복한다. 이후 당연히도 전쟁과 패전의 원흉으로 일본 국민들과 세계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었고, 역시 당연히도 제국주의 일본의 전쟁 지도자로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극동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야마시타 도모유키]](18기): 히로시마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중앙유년학교를 나왔고 육군대학교를 28기로 졸업후 스위스와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한 뒤 귀국후에는 육군성 군사과장, 군사조사부장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고 25군 사령관이 되어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군 싱가포르 주둔군 사령관인 [[아서 퍼시벌]]에게서 항복을 받아내는 전공을 세웠으나 황도파 출신이었기에 [[도조 히데키]] 등의 통제파에게 견제를 받아 만주로 좌천되기도 한다. 그러던 중 전황이 불리해져 패전이 다가오자 필리핀 방어전을 맡으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으나 이미 대세는 기울었고, [[필리핀 방어전]]에서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시켜서 지연전을 펼치는 전략을 수립했으나, 그에 반대한 해군 병력은 [[마닐라 대학살]]을 일으킨다. 그의 가혹한 부하 관리와 포로 대우는 결과적으로 학살과 전쟁범죄를 유발했고 최종적인 필리핀 방면군의 최고 지휘관은 그였기에 결과적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범으로서 교수형에 처해진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이마무라 히토시]](19기): 도쿄대학 법학부를 지망했으나 아버지의 이른 죽음으로 어머니와 많은 형제들을 돌봐야 했기에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한다. 육군유년학교와 사관학교를 나온 뒤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이후 5사단장으로 중일전쟁에 참전, 난닝 공략에 전공을 세우고 태평양 전쟁 개전 시엔 16군 사령관으로 [[남방작전]]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공략을 맡는다. 점령 이후 자바 섬에선 민간인 학대를 금하고 보호하란 명을 내렸지만 그를 물러터졌다고 본 대본영은(...) 그를 대장으로 진급시키며 제8총군 사령관으로 라바울로 보냈고 식량과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둔전책을 고안, 종전시까지 라바울을 방어했으나 미군이 굳이 라바울을 건들려 하지 않아 그대로 전쟁이 끝난다. 패전 이후 휘하 장병들의 교육과 복지에 고심했으며,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임무를 맡은 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 이후 호주군 주관 전범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네덜란드 동인도제도에서도 전범재판을 받았으나 그가 현지인을 학대하지 말도록 지시한 점이 인정되어 네덜란드에선 무죄판결을 받는다. 이후 부하들을 걱정해 그들이 있는 라바울로 이감을 자처, 맥아더를 비롯한 이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고 석방 이후 저술활동을 하다 병사한다. 최종 계급 육군 대장. * [[기무라 헤이타로]](20기) *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20기) * [[이시와라 간지]](21기) * [[무타구치 렌야]](22기) * [[스즈키 데이이치]](22기) * [[아마카스 마사히코]](24기) * [[다치바나 요시오]](25기) * [[도미나가 교지]](25기) * [[사토 고토쿠]](25기) * [[미야자키 시게사부로]](26기) * [[쿠리바야시 타다미치]](26기) * [[하나야 타다시]](26기) * [[사토 겐료]](29기) * [[사나다 조이치로]](31기)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34기) * [[츠지 마사노부]](36기) * [[세지마 류조]](44기) * [[다카히토]](48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