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수서]] [[왜국]]전의 내용 === 그 외에도 《[[수서]]》 [[왜국]]전 등에 "[[신라]], [[백제]] 모두 [[왜]]를 대국으로 여겼는데, 귀한 물건이 많아 또한 숭앙하였고, 항시 사신을 통하게 해 왕래했다."(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仰之、恒通使往來。)라는 기록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위의 문장만으로 임라일본부설의 근거이자 종속관계의 증거라고 해석하는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以~爲 용법을 보면 ~를 ~로 삼다. ~를 ~라 여기다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한데 여기서는 '여기다'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섬기다'라는 뜻은 어디에도 없다. 즉, "신라와 백제가 왜를 대국이라고 여겼는데 보배가 많고 아울러 그것을 부러워했다. 그리하여 항상 사신을 통하고 왕래했다."라고 해석한다. 요약하면 단지 신라와 백제가 일본을 보배가 많아 큰나라라고 여겼다는 소리일뿐 종속적인 관계로서 섬긴다는 소리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수서에는 왜의 부용국을 분명 한정하고 있다. 이로서 전문맥의 백제와 신라가 왜를 보배가 많아서 그러한 기준에서만 대국으로 여긴다일뿐 왜를 섬기는 것과는 관계가 없으며 그냥 보물이 많이나는 국가라 대국이라고 여긴다고 할 뿐이다. 무엇보다 《[[수서]]》 왜국전에서는 죽사국 동쪽만이 왜에 부용한다고 명백히 나와있다. >裴世清使倭國度百濟行至竹島南望耽羅國經都斯麻國逈在大海中又東至一支國又至竹斯國又東至秦王國其人同於華夏以為夷洲疑不能明也又經十餘國達於海岸自竹斯國以東皆附庸於倭倭王遣小徳何軰臺從數百人設儀仗鳴鼓角來迎後十日又遣大禮哥多毗從二百餘騎郊勞既至彼都其王與世清来貢方物此後遂絶 > >다음 해인 대업(大業) 4년 (서기 608) 황제는 문림랑(文林郞) 배청(裴淸)을 사자로 왜국에 파견하였다. 백제를 건너 죽도(竹島, 珍島?)에 닿았다. 남으로 ○羅国 (제주도?)을 바라보며 쓰시마국(都斯麻国)을 거쳐 멀리 대해로 나섰다. 다시 동으로 이키국(一支國)에 이르고, 다시 쯔쿠시국(竹斯國)에 이르고, 또 동으로 진왕국(秦王國)에 닿았다. 그곳 사람들은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다시 십여국을 지나 해안에 닿았다. 쯔쿠시국(竹斯國) 동쪽은 모두 왜의 지배하에 있다고 한다 근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쓰시마국을 지나 이키국을 지나면 다시 쯔쿠시국 동쪽 진왕국이 나오는데 일본열도 깊숙히 뜬금없이 "중국인과 같아서 중국의 변방의 땅(夷洲)이라 하여도 믿을 정도였다" 이런 소리가 갑자기 나온다. 배세청이 가는 도중 중국인 같아보이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본적은 만무하고 지나가던중 그곳의 복색과 문화가 중국의 변방지방 같이 선진적으로 보였다는 다소 뜬금없는 지역으로 즉, 이곳이 키비국이든 사이토바루든 백제계나 신라계의 분국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참고로 [[역사 갤러리]]에서는 2006년에 이 기사의 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 부분을 두고 한 때 '신라와 백제가 왜를 통해 대국이 되었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그냥 개드립. '以 A 爲 B'는 'A를 B로 삼다, 여기다'로 해석한다. 다른 용법은 없다. 차라리 이걸 까고 싶다면, [[당태종|《수서》가 편찬된 시기]]를 고려해서 정치적 목적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거나, 아니면 본문에도 나오지만 편찬 과정이 엄밀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다. 실제로 [[수서]]에는 신라를 고구려의 패잔병들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같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다 사실인 것처럼 서술되어 있으니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수서에 나오는 기록들을 전부 다 사실로서 볼 수 만은 없다는 것이다.''' 패잔병들에 대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 동천왕 시절에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격파하자, 남쪽으로 도망간 이들이 옥저에 거주하다가 후에 더 남하하여 신라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모용족의 침입으로 동부여가 세워진 연유와 비슷하다.] 또 후에는 백제에게 고구려가 침략당하자, 고구려인들이 신라로 도망갔다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에는 마한 출신의 사람이 진한에서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추정컨데 이 기록들을 재편집하면서 마한=백제 진한=신라로 확대해석하여 잘못 기록된 게 아닐까 하는 해석도 있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서의 내용들중 일부는 오해와 오류를 바탕으로 기록을 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수서》에는 [[쇼토쿠 태자]]가 [[수양제]]에게 "동천자가 서천자에게, 잘 지냄?ㅋ(日出處天子日沒處天子)[* 일출의 천자가 일몰의 천자에게]" 하는 패기넘치는 사례도 등장하는데, 학계에서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당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일본 열도가 아닌 한반도 중심의 지리관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강한 지지를 얻고 있다.[* 김후련,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고대일본의 자타인식」, 『역사문화연구』21, 2004] 어쨌든 《[[수서]]》의 기록에 대해서는 일본 자신의 정체성이 국제질서 이상으로 표출되던 시절이라, 여기에 고무된 일본의 허세가 기록에 반영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많다. >三十餘國(서른여 나라가 있는데) 皆自稱王(우두머리들마다 자신을 임금이라고 일컫는다.) 夷人不知里數(오랑캐들(왜)은 거리를 잴 때 리(里)를 쓰는 법은 모르고) 但計以日(다만 걸린 날수로만 셈할 뿐이다.) > >중략.. > >人庶多跣足(백성은 대부분 맨발로 다닌다.) > >중략.. > >漆皮為甲(가죽을 칠하여 갑옷을 만들고) 骨為矢鏑(뼈를 갈아 화살촉을 만든다.) 雖有兵(비록 군대가 있지만) 無征戰(이웃나라를 빼앗기 위한 싸움은 벌이지 않는다.) > >중략.. > >沒水捕魚。(물속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無文字(글자는 없고)、唯刻木結繩。(나무에 금을 새기거나 새끼줄을 묶어 기록할 뿐이다.) 敬佛法(불교를 높이 받들어)、於百濟求得佛經(백제에서 불경(佛經)을 구하니)、始有文字。(비로소 글자를 알게 되었다.) [* 물론 구마모토 철검명이 5-6세기의 물건으로 소급 할수 있기 때문에 그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고 반론 하겠지만, 이 뜻은 체계적인 사관제도와 문서행정이 없었다고 해석하는게 옳다. 왜국 소수의 상류층이나 왕족에서 한자를 사용하기는 오래전부터 사용 했을 것이다. 당연히 중국계 왜인도 상당히 이른 시절부터 들어와서 살았을 것이고, 삼한 및 백제 가야 신라인들도 많이 이주 했었을 테니깐.. 중국과 야마타이의 최초 통교는 1세기 경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당시 왜국 내에서 한자를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더 후대로 가면 왜5왕 중 한 사람이 남송에 보낸 국서를 보면 상당히 유려한 한문을 구사하는 것으로 반추 할수 있지만, 학자들 다수는 이 국서는 개로왕이 북위에게 보낸 국서와 유사점을 들어 백제계 혹은 중국계 백제 출신이 작성 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知卜筮(점칠 줄 알고)、尤信巫覡。(무당과 박수를 굳게 믿는다.) > >중략.. > >俗無盤俎(민가에는 쟁반과 도마가 없는 대신) 藉以檞葉(겨우살이 이파리를 음식 밑에 깐다.) 食用手餔之(음식은 손으로 집어 먹는다.) >---- >수서(隋書) 왜국전(倭國傳) 애초에 당시 쇼토쿠태자의 이런 허파에 바람든 행동은 수나라 쪽에서도 (진위를 파악하기도 전에) 어느정도 인정을 해줬고, 또 진위 파악을 하기 위해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裵世淸)[* 수서에는 배청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본서기에는 배세청이라고 되어있다. 삼국사기에도 중국 수나라 사절이 백제를 기착지 삼아 일본으로 갔다고 기록 되어있다.] 등을 왜국에 파견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수서에서는 왜국의 수준을 거리조차 제대로 잴 줄 모르고 백성들은 대부분 맨발로만 살며 뼈로 만든 화살촉이나 사용하고 백제에게 배우기 전까지는 문자도 전혀 없었고 물고기를 수렵하며 식기대신 이파리를 사용하고 손으로 음식들을 먹는 족속이라고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즉, 이러한 구체적인 서술들은 "신라와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여겼다."[* 애초에 양서나 송서의 다소 일본에게 유리한 내용을 반복하며, 내용을 살짝 바꿨을 가능성도 있다.] 라는 추상적인 문구보다는 수나라에서 직접 파견한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裵世淸)이 직접 체험한 경험들을 통해 증언한 내용들에 의해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므로 당대 일본의 실상을 훨씬 더 정확히 반영한다고 볼 수 있으며, 훨씬 더 신빙성이 높은 내용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신라와 백제가 모두 진귀한 물건이 많아서 왜국을 대국으로 여기고 섬겼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누가봐도 모순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중국의 사서들은 옛 사서들을 복붙하거나 저자가 옳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은 조금 고치되, 개괄적인 내용은 받아쓰기 형식으로 쓰는 경우가 흔했었는데, 상기의 "신라와 백제가 모두 왜를 대국으로 여겼다."라는 내용은 수서에서만 처음으로 등장하는 내용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사서들에서는 똑같은 내용들이 전혀 반복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수 양제가 쓴 편지에서는 왜왕이 아닌 왜황(倭皇)[* 물론 倭皇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니깐 공식적으로 중국측이 그렇게 불렀는지 안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에서 쓰는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있기 때문에 혹자들은 倭皇이라는 표현을 중국 황제가 인정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이러한 언론 플레이가 어느정도 먹혀들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황제라고 자칭하고 나니 번국을 만들어내고 백제와 신라가 자국을 섬기고 있다고 떠들었을 개연성도 크다. 또한 수서의 기록을 온전히 따르자면 당시 왜국의 인구는 10만 호였는데[* 그러나 이것은 오기일 가능성이 크다. 3세기인 삼국지에서 이미 야마타이국과 주변국가들의 인구 합산은 15만호 이상으로, 7세기 무렵에 이미 다 일대를 통합했다고 치면 이것보다 훨씬 컸을것이다.], 당대 백제의 인구는 20~30만 호[* 삼국유사에 의하면 7세기 무렵에 76만호라고 한다. 아마 당나라측에서 집행한 호구조사에 기반한 기사로 추정]로 추정한다. 순전히 국력 규모만 놓고봐도 신라와 백제가 왜국을 대국으로 섬길만한 수준의 작고 약한 나라들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문제의 전문은 이러하다. > 其王朝會,必陳設儀仗,奏其國樂。戸可十萬。俗,殺人,强盜及姦,皆死,盜者計贓酬物,無財者沒身爲奴,自餘輕重,或流或杖。毎訊寃獄,不承引者,以木壓膝,或張强弓,以弦鋸其項。或置小石於沸湯中,令所競者探之,云理曲者卽手爛,或置蛇瓮中,令取之,云曲者卽螫手矣。人頗恬靜,罕爭訟,少盜賊。樂有五弦,琴,笛。男女皆黥臂,點面,文身。沒水捕魚。無文字,唯刻木結繩。敬佛法,於百濟求得佛經,始有文字。知卜筮,尤信巫覡。毎至正月一日,必射戲飲酒,其餘節,略與華同。好棊博,握槊,樗蒲之戲。氣候温暖,草木冬靑。土地膏腴,水多陸少。以小環掛鸕鷀項,令入水捕魚,日得百餘頭。俗無盤俎,藉以檞葉,食用手餔之。性質直,有雅風。女多男少,婚嫁不取同姓,男女相悅者卽爲婚。婦入夫家,必先跨火,乃與夫相見。婦人不淫妬。死者斂以棺槨,親賓就屍歌舞,妻子兄弟以白布製服。貴人三年殯,庶人卜日而瘞。及葬,置屍船上,陸地牽之,或以小輿。有阿蘇山,其石無故火起接天者,俗以爲異,因行祭禱。有如意寶珠,其色靑,大如鷄 卵,夜則有光,云魚眼精也。新羅•百濟皆以倭爲大國,多珍物,並仰之,恒通使往來。 > > 왕이 조회할 때는 반드시 의장(儀仗)을 진설하고, 그 나라의 음악을 연주한다. 호(戶)는 10만 정도이다. 습속이 사람을 죽이거나, 강도 및 간음하면 모두 죽이며, 도둑은 훔친 물건을 헤아려 재물로 변상하고, 재물이 없는 자는 본인을 노비로 삼으며, 그 나머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유배를 보내거나 몽둥이로 때린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고발사건[冤獄]을 조사할 때 죄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나무로 무릎을 누르거나 강한 활에 줄을 매고 그 활줄로 목을 톱처럼 켠다. 혹은 끓는 물 속에 작은 돌을 넣어두고 다투는 자들로 하여금 찾게 하여 이치에 어그러진 쪽이 손을 데인다고 하며 혹은 항아리 안에 뱀을 넣어 두고 이를 잡게 하여 그릇된 쪽이 손을 물린다고 한다.사람들은 아주 얌전하여, 소송으로 다투는 일이 드물고, 도적이 적다. 악기에는 5현(絃), 금(琴), 피리가 있다. 남자들은 모두 어깨에 문신을 하고, 얼굴에도 점을 찍고, 몸에도 문신한다.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는다. 문자는 없으며, 나무에 새기고 끈을 묶을 뿐이다. 불법을 숭경하여, 백제에서 불경을 구하여 얻어서,비로소 문자가 있게 되었다. 점을 칠 줄 알며, 특히 무당을 믿는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반드시 활을 쏘고 놀며 술을 마시며, 다른 절기는 거의 중국[華]과 같다. 바둑과 장기, 쌍륙[握槊],주사위와 같은 놀이를 좋아한다. 기후가 온난하여 초목이 겨울에도 푸르다. 땅이 기름지며, 물이 많고 땅이 적다. 가마우지의 목에 작은 고리를 걸고, 물에 들어가 고기를 잡게 하는데, 하루에 백 여 마리를 잡는다. 풍속에 큰 쟁반이나 도마가 없고, (음식을 담을 때) 떡갈나무 잎을 쓰고, 먹을 때는 손을 써서 먹는다.[* 대부분 후한서에서 차용한 것들로 6-7세기의 실상을 반영한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다만 그릇이 없고 손을 사용해서 먹는다는 것과 문자가 없다는 내용은 수서에서 처음 등장하며, 북서에서 차용했다.] 성품이 질박하고 솔직하며, 우아한 기풍이 있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으며, 혼인할 때는 같은 성(姓)을 취하지 않는다.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곧 혼인한다. 부인이 지아비의 집에 들어가며,반드시 먼저 불을 타넘고 가서 지아비와 서로 만난다. 부인들은 음란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관곽에 넣으며, 친척이나 손님들은 시신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처자형제들은 흰 베로 상복을 만든다. 귀한 사람은 3년 동안 빈례를 행하고,일반 사람들은 날을 점쳐서 묻는다. 매장할 때에 이르러, 시신을 배 위에 두고 육지에서 배를 당기거나, 때로는 작은 수레로 한다. 아소산(阿蘇山)이 있는데, 그곳의 돌은 까닭없이 불이 일어나 하늘에 닿는데, (아럴때)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겨서, 그 때문에 제사와 기도를 행한다. 여의보주가 있는데, 그 색은 푸르고 크기가 달걀만 하며 밤에는 빛이 나므로 물고기 눈의 정기[眼精]이라고 한다. 신라와 백제는 모두 왜를 큰 나라로 여겨 진기한 물품이 많고 아울러, 그것을 우러러 보고 항상 사신을 통하여 왕래한다. >---- >출처: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jo.k_0015_0094_0090_0040]] 동북아역사넷 -중국정사외국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