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 === 2011년에 새로운 버전의 양직공도 [[신라]] 제기(題記)가 발견되었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1/08/23/0200000000AKR20110823082800005.HTML|#]] 이건 [[국립고궁박물원]]에 2본(새로운 버전)이 있는건데 양직공도의 모사본(원본을 배껴서 본뜬 책)이다. 양직공도는 중국 남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양직공도에는 [[백제]] 사신의 모습만 볼 수 있었지만 대만에 있는 고궁박물관의 모사본에는 [[신라]]와 [[고구려]]의 사신의 모습도 볼 수 있다. 그 내용에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 한때는 한에 속하기도 하고, 한때는 왜에 속하기도 하였다.)란 구절이 있어 언론에서는 이것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가 아니냐는 논란이 일고 있다'고 보도했다. 고궁박물관에 있는 2본의 모사본은 2011년이 돼서야 대만에서 나타났다. 그러나 큰 맥락에서 볼 때 '혹속왜'라는 구절은 앞에서 말한 책봉 내용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되며[* 물론 앞서 말했듯이 이건 왜곡된 것이다.], '혹속한'이라는 구절 또한 [[삼한]] 시대를 가리키는 서술이거나 [[백제]]의 [[언론플레이]]로 추정된다. 그도 그럴 것이 양서(梁書)는 신라 사신이 중국어를 못하였기 때문에 백제 사신의 통역을 거쳐야 말이 통했다 하고, 신라를 문자도 없고 한자도 엉터리로 쓰는 허접한 나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에 기반한 발언이긴 하다. 신라의 6세기 초 까지만 봐도 금문석이나 문헌을 보면 신라어의 어순 그대로를 사용해서 한자로 표기하는 등 엉망이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고구려와 특히 백제는 중국인 이민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문장력과 한자 구사 수준을 보이고 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중국의 고전을 수없이 인용하며 자신들의 세련된 문장력을 한껏 뽐내고 있다. 여담이지만 후에 7세기 경에 중국에서 사망한 흑치상치의 무덤만 봐도 어릴 때부터 중국 고전을 독학하고 있었다는 등의 자뻑을 한다. 이를 보아선 당대 백제인들의 교양 수준은 매우 높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애초에 양나라에 조공하러 갈 때 신라는 백제에게 부탁해, 양나라에 데려달라고 부탁하여 동행했다. 이것이 신라의 최초 중국 남조와 통교한 기록이다.[* 신라는 381년에 처음으로 중국 전진(북조)에 [[위두]](衛頭)를 파견하여 북조와 통교를 맺은 바 있다.] >語言待百濟而後通焉 > >신라의 언어는 백제의 통역을 거쳐야 중국과 통한다 이를 미루어 보건대, 백제가 신라 사신의 말을 의도적으로 오역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이나 정치력을 과대포장한 듯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이후 백제 무령왕이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라는 작위를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놀랍게도, 고구려 안장왕이 받은 영동장군(寧東將軍) 직위보다 오히려 위다.] 무령왕이 신라의 사신을 데려와 양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했다고 황실에서는 인식을 했던, 아니면 백제가 신라를 부용국이라고 언론플레이하여 황실로부터 인정을 받았던간에, 양나라는 백제의 행동에 상당히 뿌듯해 했던 것이다.[* 실제로 중국 북조와 남조는 누가 더 많은 조공국을 모으냐를 두고 경쟁을 하고, 입조하고 조공을 한 번국들에게 더 많은 물품을 하사하며 그 조공관계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왜냐하면 서로 누가 더 강대국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냐 등을 통해 대외인식으로 정통성을 확인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를 차치하고도 북조와 정통성 경쟁을 하는 남조로써는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손 아래의 나라가 강성하다고 하면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것이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나머지 기록 또한 다른 신라 관련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이렇게 차이가 나는 부분 또한 큰 맥락에서 기존 기록과 거의 일치하니, 예전 사서에서 그저 발췌한 내용 이상을 넘을 수 없다고 추정한다. 또 단순히 왜왕 무(武)가 남조 송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자칭한 관직과 그 상표문을 가져온 사신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한 기록을 후대에 와서 재인용하여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서는 혹속한 혹속왜(或屬韓或屬倭)란 구절에서 속(屬)이 '복속되다', '속국'이란 뜻이 아니라 '혹(或)은 진한(韓)의 족속(屬)이거나 혹(或)은 왜(倭)의 족속(屬)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오류로, '屬'은 '속하다', 즉 속국이란 뜻이다. 즉, 어느때는 한(진한 추정)에 속하였고 어느때는 왜에 속하였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글은 "그래서 신라왕이 사신을 보낼 수 없었다."이다. 이것은 신라 사신이 백제 사신을 통해 통역을 했는데 백제인으로서 신라를 오해하여 말했거나, 당시 백제는 왜의 힘을 빌어 신라를 공격했다가 고구려에 발렸는데 그때 미사흔을 인질로 보낸 신라를 속국이라 표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 설명했듯 백제 사신이 악의적으로 통역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게다가 양직공도 백제 부분에는 가야로 보이는 국가들(반파, 전라 등)과 사라(신라)라는 국가가 백제의 '부용국'이라는 기록도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5193&cid=46620&categoryId=46620|#]] 임나일본부설은 왜가 한반도 남부에 영향력을 가졌다고 주장하는데, 양직공도는 오히려 백제가 영향력을 가졌다고 적혀있어 반박이 된다.[* 참고로 여기 양직공도에 적힌 '사라(斯羅)'라는 국가가 '신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도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분명 '사라(斯羅)'라고 기록하는 등 '사라(斯羅)'는 분명 당대 신라인들이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한자로 음차해 표기하던 또 다른 국명이 맞다. 신라는 원래 초기에는 사로국, 사라, 신라 등 여러 이름이 혼용되었는데, 당시 고유어 이름을 (아직 [[한글]]이 없었던 시대이므로) 비슷한 음의 한자를 제각기 끼워맞춰 자신들의 국명을 한자로 음차하여 표기한 것이다. 물론 이를 반박하여 사라가 신라를 뜻하는지 확실치 않고, 양직공도에서는 사라라 하지 않고 신라라 하였으며, 양직공도가 만들어질 무렵에도 백제는 사라가 아닌 신라라는 명칭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대에 신라를 제외하고 '사라(斯羅)'라는 국명을 쓰는 별개의 국가가 신라와 함께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기 때문에, 사라(斯羅)는 신라의 또 다른 음차라고 보는 것이 학계 주류의 의견이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는 임나일본부를 주장하기가 매우 어려운 게 '''당시에는 사실 관계와 전혀 다르게 각국의 역학 관계를 서술하고 책봉하는 경우가 매우 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참고로 '중국 [[산둥]]지방'이었다. 이러하듯이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 그리고 북사의 구절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들도 나온다. >「新羅」者,其先本「辰韓>種也。地在「高麗」東南,居「漢」時「樂浪」地。「辰韓」亦曰「秦韓>。相傳言「秦」世亡人避役來適,「馬韓」割其東界居之,以「秦」人,故名之曰「秦韓」。 >新羅는 그 선조가 본래 辰韓의 종족이었다. 그 땅은 高[句]麗 동남쪽에 있는데, 漢나라 때의 樂浪 지역이다.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한다. 대대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秦나라 때 流亡人들이 役을 피하여 [馬韓으로] 가자, 馬韓에서는 그 동쪽 지경을 분할하여 그들을 살게 하고, 그들이 秦나라 사람인 까닭에 그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 하였다고 한다. > >其言語名物,有似中國人,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不與「馬韓>同。又「辰韓」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傳,「辰韓」不得自立王,明其流移之人故也。恒爲「馬韓」所制。 >그들의 언어와 물건 이름은 중국 사람이 쓰는 것과 비슷하니 나라(國)를 邦이라 하고, 활(弓)을 弧, 도둑(賊)을 寇, 연회석에서 술잔을 돌리는 것(行酒)을 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데는 모두 徒라고 하여 馬韓과 같지 아니하다. 또 辰韓의 王은 항상 馬韓 사람을 세워 대대로 이어가고, 辰韓 스스로 왕을 세울 수 없었으니 그들이 분명히 흘러 들어와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辰韓은] 항상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 > >「辰韓」之始,有六國,稍分爲十二,「新羅>則其一也。或稱魏將毋校勘 丘儉討高麗破之,奔沃沮,其後復歸故國,有留者,遂爲新羅,亦曰斯盧。其人雜校勘 有華夏•高麗•百濟之屬,其人雜有華夏高麗百濟之屬 諸本 「雜」 訛作 「辯」, 據隋書卷八一新羅傳改. 兼有沃沮 •不耐 •韓 •濊 之地. 其王本百濟人, 自海逃入新羅, 遂王其國。 >진한은 처음 6國이었다가 차츰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는데,註 128 신라는 그 중의 한 나라이다. 일설에 의하면 魏나라 장수 毋丘儉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격파하니, [고구려인들은] 沃沮로 쫓겨 갔다가 그 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자들이 마침내 新羅를 세웠다고 한다. [신라는] 斯盧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중국•고[구]려•백제의 족속들이 뒤섞여 있으며, 沃沮•不耐•韓•濊의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 나라의 王은 본래 百濟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마침내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 > > 初附庸于百濟,百濟征高麗校勘 ,不堪戎役,後相率歸之,遂致强盛。因襲百濟,附庸於迦羅國焉。傳世三十,至「眞平」 以「隋」「開皇」十四年,遣使貢方物。「文帝」拜「眞平」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 >당초에는 백제에 附庸하였는데,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軍役을 견디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와 신라에 귀화하니, [신라는] 마침내 강성하여졌다. 그리하여 백제를 습격하고, 迦羅國을 附庸國으로 삼았다. 왕위가 대대로 전하여져 30世인 眞平에 이르렀는데, 隋나라 開皇 14년 (A.D.594; 新羅 眞平王 16)에 遣使하여 方物을 바쳤다. 文帝는 眞平을 上開府 樂浪郡公 新羅王에 拜授하였다.[[: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12_0010_0030_0010|#]] 북사에서는 본래 진한의 사람들은 중국 진나라의 사람들인데 이 진한도 12개국으로 갈렸고 그중 하나가 신라이며 이 신라는 고구려인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다.[* [[알렉산더 보빈]]이 왜 한국어가 부여어족(고구려어)의 직계후손이라는고 설명하는지 이해가 가는 구절이다. 즉, 진한계 언어를 고구려계인 신라가 밀어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신라의 기원을 고조선에서 찾는 국내의 사서들과 대조적이다.]그리고 처음엔 신라가 백제의 부용국이었다가 백제를 버리고 가야의 부용국이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여기선 초기 [[신라]]가 혹속[[백제]] 그리고 혹속[[가야]]였었다고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근데 '양직공도 신라재기'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신라는 혹속한 혹속왜라는 구절이 나오게 된다. 즉 韓의 속국이거나 倭의 속국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여기서 왜는 가야를 왜로 오해하여 쓴 표현일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후한서 한전 변진조를 보면 >弁辰與辰韓雜居,城郭衣服皆同,言語風俗有異。其人形皆長大,美髮,衣服絜淸。而刑法嚴峻。其國近倭,故頗有文身者。 변진은 진한과 의복 성곽이 같으나 언어와 풍속이 좀 달랐는데 왜와 가까이 접하여 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가야는 왜와 교류가 많은 곳이기에 양직공도에서 가야를 왜로 오해하여 이런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서들의 발간순서를 살펴보면 후한서 ㅡ> 양직공도 ㅡ> 북사 순인데 결국 연대순서대로 그 내용이 사실에 맞춰져서 점차 업데이트 즉, 수정됨을 알 수 있다. 요약하면 처음 후한서 변진조에서는 변진의 풍습에서 왜와 비슷한것이 있다고 밝히고 있고 이에 양직공도는 신라 성립 때 백제와 가야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韓과 倭라는 추상적 정보를 써서 기록하였으나 이후 북사에서 이러한 오류들이 모두 정정되고 업데이트(수정)되어 부용우백제 부용어가락국으로 업데이트 정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