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고구려 주체설에 대한 의문점과 그에 대한 반박 ==== * 고구려는 육로로 백제, 신라와 연결되어 있기에 왜에 비해 바다를 건너와 공격할 가능성이 적다. 고구려는 육로로 백제 신라와 연결되어 있기에 왜에 비해 바다를 건너와 공격할 가능성이 적다라고 언급했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지적이다. 당장 신묘년 다음 기사인 396년 병신년 기사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을 정벌했다라고 기록 되어 있고, 또 다른 기사에서 수군으로 백제를 격파 했다는 정황을 증언하는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도 광개토대왕이 수군으로 신묘년에 4면이 바다인 관미성을 공격한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 392년 백제 본기와 고구려 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기사는,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의 기사인데, 릉비에서 渡海破 했다는 기록도 같은 년도에 일어난 사건이다. 삼국사기의 기년 문제로 인해 392년으로 오기 되어있지만, 즉위 원년에 발생한 일로써 신묘년의 渡海破와 완전히 교차검증 된다.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 대놓고 백제를 수군을 공격했다고 다른 기사에 나오니 이 지적은 완전히 무효하다. [* 고구려가 391년에 관미성을 공격한 사건의 발단은 백제가 먼저 같은 해 8월에 고구려를 침략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 되있고, 이 침공을 막아내고 같은해 10월에 백제에게 보복하러 토벌에 임한것임을 알수 있다]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討伐殘國 >396년에 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를 토벌하였다. >冬十月,攻䧟百濟關彌城。其城四面峭絶,海水環繞,王分軍七道,攻撃二十日,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그 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으로 바닷물이 둘러싸고 있어 왕이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91년) 즉,391년은 광개토대왕 즉위 원년이다. 아들인 장수왕으로써는 부왕의 즉위 원년에 실행한 군사 원정을 공덕비에서 빼놓는 것은 사리상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의 백제를 격파한 기록과 신묘년의 도해파 기록은 동일한 사건을 서술하고 있으므로 왜국이 주체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 정인보의 해석은 주어가 아무 단서 없이 바뀌어서 어색하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주어가 생략된 부분은 비단 신묘년조 기사만이 아니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영락 10년 경자년, (왕이 혹은 고구려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 391년에 백제를 이미 격파했다는 것은 396년에 새삼스럽게 백제를 공격할 이유가 되지 않으므로 병신년조에 신묘년의 일을 언급할 이유도 없다. 병신년조와 신묘년조에 대한 중복 논란은, 391년에 백제를 격파한 것은 왜국과 연합전선을 꾸린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신라로 돌려 왜구를 격파했다는 의미로,백제에 대한 예속의 관계를 내포하지 않는다. 오직 신라에 대한 예속관계 (신민)로 서술 할 뿐이다. 이에 대한 근거로, 신라는 391년 이후로 고구려에게 완전히 복속하고 저자세가 되지만 백제는 릉비의 원문상 396년에도 저항한 모양이다. 후에 나오는 396년 기사에서 고구려가 완전히 백제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한다. 즉, 391년에 신라를 왜국과 백제의 침략에서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는 393년에도 왜구의 공격에 시달린다. 앞선 해석처럼 신묘년 (391년)에 신라가 왜국의 신민이 되었다면 393년에 또 침공할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3년후인 396년에 이번에는 고구려가 백제를 (이미 391년에 신민으로 복속시킨 신라가 아니라)정복하여 신민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396년의 기록에 아신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이 되겠다고 맹세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고로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완전히 백제를 복속시키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생각할만 하다. 하지만 뒤의 릉비의 기록에서 백제가 약조를 어기고 왜와 재화통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391년에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로 군사를 돌려서 신라를 왜구로부터 구원했다는 해석과 일맥상통한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입장에서는 백제와 왜국의 공동전선이 매우 신경쓰인 모양이다. 다음은 396년의 기사다. >而殘主困逼 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 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 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391년 신라를 속민에서 신민으로 예속관계를 강화하고 신라를 백제나 왜국의 침입으로부터 보호 해줬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광개토대왕릉비 기사로 교차검증 되며 그 비슷한 시기에 신라를 고구려에 볼모를 보낸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히 신묘년의 기사이긴 하나, 고국양왕이 승하하기 전의 일이다. 이를 두고 고구려측에선 신라가 신묘년 이전의 속민의 근거라고 생각 했을수도 있다. 실제론 삼국사기에서 조공의 기록은 전해지진 않지만, 누락 되었을수도 있는 노릇이기 때문. 후에 400년 기사에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해왔다고 분명히 비석에 명기 되어있지만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 전하지 않으니 누락 되었다고 이상한 일은 아니다.]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영락 9년 (399) 기해년,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 화통은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에서 사용하는 단어다][* 아마 태자 전지왕을 397년 (혹은 광개토대왕릉비 기년 기준으로 396년이다.)에 왜국에 파견해서 군대를 원조 받는 것을 두고 화통이라고 고구려측에서는 이해 했는듯 하다.]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내려가 순시하였다. 그러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신라의 국경에 들어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신하, 즉 신라 내물왕)은 고구려의 민(民)으로써 [* 종래에는 왜가 노객을 백성으로 삼으려한다는 해석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렇게 해석하는 학설은 소수 의견이다. 뒤에 첨부된 일본학자 하마다 고사쿠도 신라왕이 자신을 대왕의 노객이라고 자청하며 그의 신분은 고구려의 民이니 왕께 귀의 합니다 라고 해석한바 있으며, 가야사 연구자 김태식 교수 또한 왜가 신라왕을 民으로 삼았거나 삼으려고 했다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낼수도 없는 처지니, 모순이라고 발언한바 있다. 일본측에서 이때부터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다고 해석하고, 일부 한국측에서는 신묘년 고구려 주체설을 내세우며, 그 이전부터 (391년부터) 복속 해석했다고 한다.]왕께 귀의해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은 은혜롭고 자애로와서 그 충성심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 고하게 하였다. >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37년(392)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했으므로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 또한 왜국이 신라를 그 비슷한 시기에 침공한 내용은 삼국사기에서 증언하지만, 오히려 신라에게 패퇴 당했다는 내용이 전해질 뿐이다 실례로 삼국사기에서 제일 신묘년에 제일 근접한 왜국의 신라 침공 기사(393년)를 보면, 왜국이 침공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신라에게 패퇴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왜국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사는 교차검증 되지않는다. 만약 고구려인들이 진짜로 392년을 391년 신묘년으로 착각하여 광개토대왕릉비에 오기했다면, 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내용은, 일본측에서 해석하는 바에 따르면 왜국이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은 후, 바로 이듬해의 일이다. 반대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의 광개토대왕의 즉위기사가 실제로는 391년에 있었던 일이라면, 신묘년조 기사와 2년의 차이를 두고 생겨난 일이다. 백번 양보해서 일본측 주장이 맞다고 상정해도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고 1~2년만에 어떻게 신라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또 다시 침공 했는지가 의문이다. 게다가 今賊弃舟深入, 즉 배를 버리고 쳐들어왔다고 기록 되어있는데, 진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가야를 지배하고 있다면 배를 타고 재침공을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백제와 신라를 스스로 복종시키고[* 신민의 뜻] 신하로 삼았는데 왜 저항하고 있는가. 게다가 단순 교전의 기록이 아니라 심지어 패주까지 한다. > 三十八年,夏五月,倭人來圍金城,五日不解。將士皆請出戰,王曰,「今賊弃舟深入,在於死地,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歩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 > 38년(393) 여름 5월에 왜인을 포위하고 5일 동안 풀지 않았다.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나가 싸우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지금 적들은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와 사지(死地)에 있으니 그 날카로운 기세를 당할 수 없다.”고 말하고 이내 성문을 닫았다. 적이 아무 성과없이 물러가자 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눈치 챘을수 있지만, 광개토대왕릉비에 백제 아신왕이 스스로 奴客이 되겠다고 칭하며 광개토대왕 앞에사 약조하는 기사, 또 그후에 신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奴客으로 청하며 왜군으로부터 방위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기사가 나오고 있다. 상술한 고구려 주체설 해석이 맞다면 奴客이라는 단어가 고구려가 백제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될수도 있다. 실제로 아신왕과 내물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자처했든 고구려가 과정과 윤색을 덧붙였든간에 奴客이라는 단어를 신묘년조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해 '의도적'으로 선택해 백제 신라가 노객을 자청하고 굴복 했다고 언급했다면 고구려 주체 해석론이 힘을 얻고 설사, 그것이 과장과 윤색이라고 해도 이것은 신묘년조의 왜구가 신라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은 공존 할수 없으므로 일본측에서 주장하는 신묘년 해석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학계에서 노객을 당대에 사용하던 신하 [* 같은 용례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광개토대왕비릉 말고도,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에서도 등장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의역하는데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의 臣民으로 만들었다고 해석하면 신묘년조 기사와도 썩 어울린다. 광개토대왕릉비 원문에 나온 속민과 신민의 용례를 조사하자면, 속민은 조공을 바치는 상대국의 왕이나 백성들을 뜻하고, 신민은 신하로써 복종하여 상대국 왕이 직접 대왕께 조공을 바치거나 항복한 주체로 해석할수 있는 것이다.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은 그들 스스로가 대왕을 직접 알현하고 아신왕의 경우에는 노객이 되겠다고 스스로 선언 했고, 내물왕 또한 사신을 보내어 대왕의 노객으로써 왕께 귀의한다고 말하였으며, 후에는 직접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까지 바쳤다. 그러므로 신민은 속민보다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고로, 이 노객이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부각 시켰다면 왜국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은 모순이다. 즉 노객이라는 단어와 백제왕의 광개토대왕에게 복속하며 했던 대화 내용등 전부 신묘년 기사의 신민이라는 단어를 의식해서 의도적으로 삽입한 프로파간다라는 것이다. * 백제와 신라가 인질을 일본으로 보낸것은 맞지만, 백제의 경우 신묘년의 한참 후인 397년에 후대에 기록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이며 [* [[전지왕]]이 397년에 태자 혹은 왕족 신분으로 왜국에 파견된바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인질이라고 나오지만, 당대의 사서인 백제삼서중 하나인 백제기를 인용해 기사를 작성한 일본서기에서는 친선을 다지기 위해 보냈다라고 나올뿐이다.], 일본서기에서는 인질이라는 기록은 없고, 당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하는 백제기라는 백제삼서을 인용해, 선왕의 우호를 잇게 했다라고 언급 되어있다. 미사흔의 경우는 401년 혹은 402년에 일본으로 인질로 보내지므로 이것 또한 신묘년과 시기도 맞지 않을뿐더러, 고구려의 세력을 위시하여 왕위에 오른 실성마립간이 정치적 숙청을 하기 위해 보냈다는게 중론이다. 실제로 '''전근대의 인질이란 지금과 같은 단순한 볼모의 의미가 아닌 외교관이나 보증의 증표 같은 역할도 표현하는 그런 단어였었다.''' 가령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주장하는 백제가 일본에 보냈다는 인질들만 보아도 정작 당사국들인 [[백제삼서]]의 기록[* 백제'와 '왜'라는 양 당사자 간에는 '선왕이 쌓은 우호를 잇기 위해 방문하였다']과 일본 쪽의 기록[* '내조하였다.']들 중에서는 그 어디에도 '''인질을 보냈다고 하진 않는다.''' 즉, [[일본서기]]에도, 또 일본서기에서 인용했다는 백제의 기록에도 '인질'이라는 표현은 없고, 정작 한참 후대인 고려시대에 쓰인 [[삼국사기]]에'''만''' 이런 표현이 나올 뿐이다. 문제가 되는 삼국사기조차도 해당 구절을 살펴보면 결호(結好)라고 하여 상하관계에 따른 인신공납이 아닌 단순히 우호관계를 맺기 위해 일종의 [[외교관]]으로서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인질(質)의 의미도 상하관계와 무관함을 밝히는 견해를 [[http://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00956677#|나행주]]를 위시한 학자들이 제시하여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로 일본측은 외교관으로서 일본을 방문했었던 [[김춘추]]도 인질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인질이란 단순히 볼모가 아닌 [[외교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덴쇼 14년(1586)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자신의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를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인질]]로 보냈지만 당시 히데요시가 이에야스에게 굴복을 선언한 것이 아니듯, '''전근대의 인질은 지금처럼 단순한 볼모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외교관 또는 보증의 증표 같은 여러 의미들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었다.''' 2004년에 정인보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이 유물은 '호태왕'과 '신묘년'이 적힌 [[http://news.joins.com/article/283056|방울]]이다. 방울을 만들었으므로 중요한 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요한 일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킨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대측에서는 그 정도로 중요한 일을 병신년조에 끼워서 언급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방울을 만들었음 → 중요한 치적이 있었음 →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켰음 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이라고 본다. 즉위 1년에 방울을 새로 만드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 다만, 주어 교체설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후술한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릉비의 1년 격절에 대한 의문을 해소 시켜줄 중요한 단서로 작용한다. 그 외에도 해(海)가 매(每)를 잘못 읽은 (혹은 변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며, 이 경우 "왜가 바다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가) 매번 격파하고 백잔,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 혹은 "왜가 바다를 건너왔지만 (고구려가) 매번 격파하자 백잔이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등으로 해석한다. 단 이러한 설 역시 정인보의 설과 같은 약점이 있다. 그 외에도 渡海破(도해파)가 入貢于(입공우)를 변조한 것이라는 주장[* 2005년 [[전북대]]의 김병기 교수가 제기한 주장. 하지만 한국사 전공자가 아닌 한문학자라 설득력이 떨어진다. 2018년 1월 3일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방송에서도 이 주장을 사실인 양 내보내서 논란이 되었다.]도 나왔지만, [[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5/05/009000000200505252054031.html|이 주장]]에 따르면 원래의 글자 중 入은 높이가 다른 글자의 절반 정도였어야 하고 于는 오른쪽 2/3 정도에 몰려있었어야 하며, 변조 과정에서 획을 채워 없애기까지 해야 하는 등 치명적인 문제들이 있어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신묘년조 해석에 큰 문제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신묘년조 이후에도 백제가 맹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했기 때문에 왕이 평양성까지 몸소 나갔다는 언급이 나오는 등 백제와 왜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고 왜도 신라를 공격하거나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기존의 신묘년조 해석이 문맥상 잘 맞는다는 것. 이러한 쪽에서는 신묘년조 앞부분에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고 하는 부분에 주목하며 '신민'의 의미가 잘못 해석되었다고 본다. 백제와 신라가 원래부터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호태왕비를 세울 당시에는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영락 1년인 신묘년의 시점에서는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한 일이 없었다. 이는 단순히 《[[삼국사기]]》 등을 통한 해석이 아니고, 『[[광개토대왕릉비]]』 자체의 영략 10년 경자년조에서도 "지금껏 신라 매금은 스스로 와서 명령을 청하고 조공논사하지 않았다. 광개토경호태왕에 이르러 신라 매금은 명령을 청하고 조공하였다." 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공의 기록은 없지만, 선술했듯이,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의 1년의 격절[* 현재로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석의 오류가 아니라 삼국사기의 오류라는게 중론이다. 단순히 고구려본기에서만의 오류가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의 교전이 서술되어 있는 백제본기와 눌지왕의 기록을 토대로 역산해보면 신라본기에서도 오류가 나타남을 알수 있다.][* 백제의 소실된 역사책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도 백제삼서를 인용한 아신왕 진사왕에 대한 기록에서 1년 오차가 있음을 알수 있다. 즉 삼국사기와 백제삼서는 기년을 같이하고 있다.]이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료를 찾아보면, 신라본기의 기사 [* 392년 1월 기사이다]로 신라가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401년에 귀국하여 이듬해 402년에 왕위를 이어받은 [[실성 마립간]]이다. 정치적 입지도 변변치 않았고 직계도 아니었던 그가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고구려가 친고구려파의 수장격인 실성마립간을 후견 했을거라는 의견이 대세다.]을 볼모로 보내는 기사가 나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의 즉위 이전의 일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같은 해 5월에 즉위한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를 두고 속민이라고 칭했을수도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245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공하여 신라측에서는 [[석우로]]를 내세워 방어 했으나, 패배한 기록도 나온다. 고로 고구려가 신라를 신묘년 이전부터 강하게 몰아세운건 맞다. 또한 백제의 근초고왕이 신라에게 말 두필을 선물하며 우호를 싹트던 신라 백제의 관계도 근초고왕의 사망 전후부터 고국양왕 시절 신라가 인질을 보내기까지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삼국간의 역학관계에 대변혁이 감지되고 있다. 실제로 근초고왕 사망직후와 광개토대왕 즉위 직전까지 신라는 백제와 결탁하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고구려와 결속하는 모습이 나타는데, 그 근거는 377년과 382년의 신라사신의 전진 황실 입조가 있다. 이는 고구려 사신과 같이 동행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덧붙여 흥미로운점은 신라와 백제가 우호를 쌓고(366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말 두필을 신라에게 선물을 보내며(368년) 친선을 도모하기 전후에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왜국의 침입은 없었지만, 다시 극성을 부리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와 결속이 강해진 (고국양왕 치세기로 볼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국양왕의 죽기 직전에 신라는 고구려에 인질을 보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 즉위 직후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이를 두고 백제가 배후에서 왜국을 포섭하여 고구려와 결탁한 신라를 괴롭히라고 사주한게 아닌가하고 추정하기도 한다.[[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0/10/1-04k.pdf]] 본론으로 돌아와서, 혹자들은 '신민'은 '속민'보다 오히려 예속의 정도가 약하기 때문에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말도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혹은 이런 점 때문에 아예 신묘년조의 서술 전체가 역사적 사실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그러나 광개토대왕비석의 원문을 보면 속민이라는 단어가 한번 더 등장하지만. [* 410년 기사 : 영락 20년 경술년,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중도에 배반하여 조공을 하지 않았다.] 용례를 따져보면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꽤 느슨한 관계로 정의하는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실제로 396년이나 399년의 기사를 보면 백제의 아신왕과 신라의 내물왕이 고구려의 노객을 자칭하고 있으며, 아신왕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 무릎 꿇고 알현 하며 자신의 동생을 인질로 보냈고, 내물왕은 후에 직접 대왕을 알현 했거나 왕자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 학계에서는 내물왕이 직접 알현하며 조공을 바쳤다고 해석하지만, 일본학계에서는 후에 고구려로 인질로 파견되는 복호를 시켜 알현하며 조공을 했다고 주장한다]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신묘년에 등장하는 속민의 관계보다는 앞서 언급한 396년이나 399년 기사가 예속성이 더 강하다고 볼수 있는 것이다. 즉 하마다 고사쿠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셈이다. 신묘년조를 병신년조와 또 이후에 등장하는 왜와 신라 백제 가야 등 한반도 남부의 기사들을 위해 꾸몄다는 대전치문설에 대한 한국 학계의 반응은 가야사 전문가 김태식 교수가 제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에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알수 있다. 일본측 신묘년 해석에 대한 한국학계의 대표적인 반론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다만 요즘 학계에서 대체로 인정되는 것은 신묘년 기사가 광개토대왕의 '王躬率'(왕의 친정) 즉 원정 이유를 설명하는 전치문이거나 혹은 영락 6년 백제 토벌의 '전치문'일 뿐만 아니라 이후 모든 원정 기사의 導論(명분)이 되는 '대전치문'이며, 왜가 강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를수 있으나 고구려는 왜를 트릭스타로 사용하였다는 등의 견해이다. 광개토대왕릉비의 왜는 왜구일 뿐이나 과장되게 표현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 견해들은 비문을 통해 (왜국의) 남한경영론 (임나경영설)을 주장할수 없다는 점에는 동의 했다고 보이나, 고구려가 주목할 만한 왜의 실체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 >그러나 이 기사가 원정의 '전치문'이라면 고구려가 - 자신에게 적대행위를 한 왜가 아니라- 백제를 공격한 이유라고 보기에 합당치 못하다. 이 기사가 모든 남정의 '대전치문'이라고 한다면 그 바로 뒤에 백제를 공격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변명할 수 있어도, 이 기사가 어째서 이곳에 위치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왜냐하면 영락 6년조 뒤에 이어 나오는 8년조는 숙신(息愼)에 대한 것으로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비문의 구조상으로는 신묘년 기사를 '王躬率' 형태를 띠는 영락 6년 백제 討置文의 '전치문'으로만 보는 것이 가장 논리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장의 뜻은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속민이었으나 신묘년에 왜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여 백제가 여기서 이탈하고 신라만이 그대로 신민이 되었다는 내용이 되어야 한다. > >여기서 辛卯年 기사의 原文을 다시 살펴보자. > >B.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 >가장 문제되는 것은 '百殘□□新羅'가 왜의 신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이다. 혹은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했는가의 문제도 포함된다. 그러나 비문 자체의 용례만 분석해 볼 때,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첫째는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면 영락 6년조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왜의 면모가 보여야 하나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가 항복하는 장면에서 그 타협을 왜의 총독(總督)이 아닌 백제왕이 주도하고 있으므로, 고구려가 백제를 왜의 신민이라고 인정할 여지가 없다. > >둘째로 영락 9년조로 보아 왜는 백잔과 화통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는 영락 6년에 백제왕이 고구려의 노객이 되기로 맹서한 이후의 상황이기는 하나, 만일 그 전에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또는 고구려가 그렇게 인정하였다면 비문의 이 대목에서도 그 위세의 차이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화통'이란 대등한 상대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 >셋째로 비문에 나오는 民의 개념에는 오로지 고구려의 民만 있을 뿐이고, 다른 나라의 백성을 '民'으로 표기한 사례가 없다는 점이다. 백제왕조차도 노객일 뿐인데 왜국의 民을 奴가 아닌 신민으로 표기하였을 리가 없다. '民'의 용례는 비문에 모두 11회 나오는데, 그 중에 신민 외에 고구려의 民이 아니라는 논란이 있는 것은 영락 9년조의 '以奴客爲民'[* 이에 대해서는 김태식 교수가 후술하였는데 신라 내물왕이 광개토왕에게 사신을 보내 (신라왕 자신을 ) 고구려의 노객이라고 칭하며 "(고구려의)노객은 (그 신분이 대왕의)民(백성이니) 귀의하여 구원을 청합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일각이나 일본 측에서는 "(고구려의) 노객을 (내물왕) 왜가 (그들의) 民으로 삼았다." 혹은 "삼으려고 한다."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내물왕 스스로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조차 요청하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고 발언 하였다. 같은 학회에서 4세기를 당담한 하마다 고사쿠 역시 개인이 투고한 논문에서 같은 근거를 들어,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 했다.][* 또한 399년의 기록의 바로 앞 기사인 396년 기사를 보면, 아신왕이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을 칭하고 있다. 프로파간다적 성격이 매우 짙은 릉비의 기록의 성격상, 내물왕이 자칭하고 있는 노객이란, 백제 아신왕의 경우와 동일하게 고구려의 노객일 가능성이 객관적으로 봤을때도 높다. 이 경우 신묘년 신민의 고구려 주체설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신민은 스스로 복종하여 신하를 자칭하는 처지이며, 단순히 조공을 수취하는 속민의 관계보다 더욱 종속성이 강하다고 볼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바로 뒤에 등장하는 400년 기사에서는 신라에 구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퇴 시키고 나서, 여태껏 신라왕이 스스로 입조하여 조공한적은 없었지만, 스스로 대왕을 알현하고 조공 했다고 기록 되어 있지 않은가]뿐이나, 그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또한 사실의 문제로서 접근해 볼 때, 백제와 신라가 옛날부터 조공해왔다는 것은 허구이다. (하략) >---- >출처: [[https://www.jkcf.or.jp/wordpress/wp-content/uploads/2019/11/1-02k.pdf]] 제1차한일역사공동연구회 4세기 한일관계사 19-21쪽 -김태식 그가 제기하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복전쟁 부문에 대한 구조를 알아야한다. 정복전쟁 부분의 첫번째로 등장하는 기사는 395년의 비려(稗麗) 정벌 기사이다. 그 다음에 391년 신묘년으로 돌아와 문제의 기사를 서술하는 구조이다. 즉, 신묘년 391년의 기사는 연대순서에서 열외된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인 고구려사 연구자 왕건군은 정확한 의미에서 신묘년 기사는 없고, 후에 등장하는 남정 기사들의 명분과 프로파간다를 기록한 이른바 '전치문'으로 봤고, 하마다 고사쿠를 위시한 일본학계에서는 더 나아가 이후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사들을 수식하는 '대전치문'[*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은 모두 백제, 왜,신라, 가야에 관한 기사다.]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김태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6년조 백제 정벌 직후에 등장하는 8년조의 숙신에 대한 원정은 일본측이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이용하는 왜에 대한 내용 혹은 백제와 신라 가야등 한반도 남부의 정세와 하등 관련 없는 내용이므로 '대전치문'설에 흐름이나 연속성이 깨진다며,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17년 정미년[* 이해의 정복 기사는 정확히 무슨 세력을 정복했는지는 문자 파손이 너무 심해서 알수 없지만, 지명으로 보아 백제로 추정한다. 즉, 일본학자들은 신묘년조가 407년까지 수식하며,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경우에는 신묘년 기사를 활용하여, 407년까지 왜구의 세력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도적으로 개입했다고 주장한다.]까지 수식한다는 '대전치문설'에 대해 문제를 제기 했고, 오직 6년 백제 원정의 명분만 프로파간다로 활용 했다는 것이다.[* 일본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신묘년 기사가 396년 399년 400년 404년 407년 기사들을 모두 수식하는 것이라면 395년 비려(稗麗)을 정벌한 기사처럼 따로 앞으로 빼내서 서술해야 하는데 8년조의 숙신에 대한 기사의 앞뒤는 396년 백제 정벌과 399년 신라의 내물왕이 노객을 자청하며, 성지에 가득찬 왜군을 격퇴 시켜달라고 요청하는 기사다. 391년 기사와 396년 백제 정벌 기사만 그 맥락이 닿아있고, 그 후에 등장하는 399년 400년 404년은 맥락상 다른 결이라는 것이다.] 고로 '대전치문설'이 아닌 '전치문설'이 합당하고, 이 전치문은 6년 병신년의 백제 원정만 수식하고 있으므로, 신묘년의 도해파 주체는 왜와는 아무 관련 없는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396년의 기사 직후는 신묘년 전치문의 수식이 종결상태 혹은 완결 상태다. 즉, 백제 정벌 396년 직후의 문장들은 신묘년 전치문이 종결된 상태이므로 396년 기사의 직후의 기사인 398년 숙신 정벌부터 시작해서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벌 마지막 기사까지는 신묘년과 아무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되면 또 신묘년의 주체는 왜국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이 생기고, 그것을 고구려가 실시한 원정 혹은 신라 구원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충주 고구려비]]는 당초 알려진것과 다르게 광개토대왕 치세기인 영락 7년 정유(정유년)라는 문자가 써져있음을, 3D 스케닝을 통해 동북아역사재단이 밝혀냈다. 고로, 학계의 기존 정설이던 광개토왕의 치세기 이후에 신라가 속민화 되고 더 나아가서는 신민화 되었다는 주장과 전면 대치되며, 신라의 신민화나 종속화가 된 시점은 영락7년에서 더 이 전일수도 있다. 다만 이는 아직 연구중인 사안이니 더 기다려봐야 한다.] 또 이런 식으로 해석할 경우 신묘년에 고구려가 부각 시키고 있는 주동 세력은 왜가 아닌 백제로,왜는 단순히 백제의 지원 세력이다. 왜냐하면 신묘년에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거나 백제를 격파하고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면, 직후의 병신년 기사에는 백제을 정벌 하는게 아니라 왜를 공격해서 고구려 중심의 질서에서 백제를 이탈시킨 왜에게 응징하는 내용이 나와야만 의미가 통하며, 설사 고구려가 (왜가 아닌) 백제를 공격 하였다고 해도, 백제를 신민 혹은 복종 시킨 왜의 존재가 어떤 형식로든 도출 되어야 하는데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묘년조에서 파손된 문자가 갱토신라(更討新羅)라고 해석할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왜와 백제가 같이 신라를 침략 했다라고 해석해도, -선술된 398년 숙신 정벌의 기사 문제로 인해 396년 후의 기사들은 신묘년/병신년의 맥락과 닿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묘년은 병신년의 기사만 수식하는 '전치문'이고 병신년에 나오는 정벌의 대상은 '오직' 백제이므로 문제의 신묘년 전치문에서 부각하는 주동 세력은 백제이고 왜는 단지 백제의 지원세력이라고 해석한다. 또한 그가 언급했듯이 릉비에 등장하는 다양한 민(民)을 포함한 단어들이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신민(臣民), 속민(屬民), 구민(舊民), 신민(新民) 등인데, 각각 속민은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치는 국가, 구민은 원래의 고구려 백성들, 신민(新民)은 정복 사업에서 새로 얻은 백성들을 뜻한다. 즉, 전부 고구려를 주체로 해석해야 의미가 통한다. 고로 같은 '민(民)'자가 들어가는 신민(臣民)은 그 용례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것이다. 후에 제2차 한일공동역사구회에 참가하게 되는 조법종 교수 또한 신묘년 호태왕 방울이 발굴된 이후로 신묘년에서 신라를 신민으로 삼은 주체는 고구려가 되어야 하지 않냐는 발언을 한적이 있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63509]] 한국 주류 학계에서도 일본의 신묘년 대전치문설을 비판없이 모두 수용한다라는 일부 재야학계의 주장과 다르게 일본측 해석에 문맥이나 내용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개찬설을 주장하다가 일부 보기좋게 논파 당하였으니, 확실한 증거나 연구가 진전될때 까지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느낌이다. 사실 그냥 일본 측 해석대로 보더라도, 신묘년조의 내용이 반드시 임나일본부설에 유리한 것만도 아니다. 만약 임나 지역이 오래전부터 일본부 영토였다면 왜 신묘년에 임나를 백제 및 신라와 나란히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오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즉, 파백제, 파신라(신라와 백제를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은 시기가 391년이고 광개토대왕의 원군으로 격퇴된 시기가 400년이니 왜군이 점령했던 기간은 '''길게 봐야 9년'''이다. 즉,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이란, 왜국이 서기 4-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 지방에 일본부라는 통치 기구를 세워서 이를 오랫동안 식민지로 삼았다는 주장인데, 일본이 원하는 대로 신묘년조를 해석하면 오히려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내용이 되어버린다. 반대로 임나가 언급되지 않았다고 보면 임나일본부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된다. 혹은 임나가 이미 일본 영토이면 왜가 '바다를 건너'올 이유가 없다며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쪽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일본서기》에도 왜군이 바다를 건너서 임나 지역에 있는 세력과 합세하는 식으로 기술했기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고구려에서 왜군이 일본 영토 내부에서 한반도로 이동한 것까지 기록하고, 과연 그런 일본 내부의 이동 상황들까지 당시에 세세하게 알 수 있었을까? 그래서 단정하기가 어렵다. 이와 비슷한 예로 일본측의 주장하는 신묘년조 해석을 수용하고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하여 왜국이 진짜 신라를 391년 혹은 392년에 신민으로 만들었다고 가정하보자. 그러나 이 해석을 곧이 고대로 받아들이자니 393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적혀있는 今賊弃舟深入 문장을 보면 적들이 배를 버리고 깊숙이 들어왔다라고 명기 되어있는 내용이 공존할수 있냐에 의구심을 지울수 없다. 정말 신라를 391년에 신민으로 만들었다면 다시 배를 타고 재침공 할 하등의 이유도 없다. 또 신민 즉, 스스로 복종 시켰는데 왜 신라는 왜국에 대항하고 또 이 기록에서는 심지어 왜군이 패주까지한다. 짧은 문장 하나가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논란이 되는 형국이다. 사실 전쟁, 외교 관련해선 뻥카가 심해서 유력집안 전설까지 끼워넣으며 [[평원왕]] 대에 고구려 왕이 도망가고 고구려 궁궐까지 털어먹었다고 기술하는 《일본서기》391~396년 기사에서 백제 침략기사가 전혀 없음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와 임나일본부를 끼워맞추는 논리의 크나큰 약점이다. 《일본서기》에서 해당되는 기간의 백제 관련 서술은 '백제 왕(진사왕)이 천황에게 예의가 바르지 않아 사신 4명을 보내 책망하니 부끄러워서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을 왕위에 옹립했다.'는 것, '아신왕이 왕자를 일본에 보내 우호를 닦았다.'것, 딱 둘이다. 첫 번째 서술에서 천황 관련한 개드립을 지우면 아신왕이 진사왕을 일본세력을 끌어들여 암살하고 왕위에 옹립했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의 破百殘○(파백잔x)은 바로 이를 설명하는 구절로 볼 수 있다. >우선 5세기 초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廣開土王碑文의 경우 그 해석과 관련하여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한반도 내 倭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및 고구려에 대항하는 주체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다.''' > >하지만, 그동안 36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왔던 七支刀(칠지도)의 銘文을 재고찰하면 七支刀는 369년이 아니라 408년 11월16일 백제의 腆支王 4년에 만들어진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七支刀를 통해 5세기 초 百濟와 倭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즉, 七支刀 銘文에 나오는 「泰四年」 및 「宜供供侯王」 등은 百濟가 주체가 되어 倭王인 侯王이 百濟에 신속하고 있던 侯王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5세기 초 百濟와 高句麗의 전쟁에서 倭가 주도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百濟가 주체가 되어 수행한 전쟁에 倭가 지원군의 형태로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宋書』에서 5세기의 소위 倭 5王이 한반도 남부에 대한 諸軍事權을 자칭하고제수를 요청했던 문제가 쟁점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남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百濟가 관할하고 있었던 영역을 倭가 자신의 영역으로 주장하려 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 >즉, 이러한 요청은 倭王 珍에 있어서나 武에게 있어서 百濟와 軋轢이 있었던 毗有王 시기 또는 웅진 초기 등 百濟의 정국변동이 있었던 경우에 요청되었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腆支王 이래 百濟와 야마토 倭가 양국 왕족 간 혼인에 의한 혈연,인척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촉발된 사건이며, 이처럼 백제 왕실과 야마토 왕실은 4세기말 이래 지속적인 인적교류를 통해 화친을 맺음으로써 정치적, 군사적으로 유대감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 > - 홍성화, 5세기 百濟의 정국변동과 倭 5王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2010, vol., no.60, pp. 75-115 (41 pages) 호태왕 10년에 신라를 구원한 사건 역시 논란의 대상이다. 대한민국 학계에서는 그 전해부터 신라를 공격한 것을 '''백제 - 왜 - 가야의 연합군'''으로 간주하고 백제가 공격을 주도했다고 보고 있지만, 실제로 비문에서는 왜군만이 언급되어 있다. 백제군이 주력이었다면 왜 백제군이 언급되지 않는지가 문제가 되며, 가야군이 참전했으리라는 것 역시 왜군이 패주할 때 임나로 달아났다는 점 이외에는 근거가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에 맞서기가 좀 애매하다. (이에 대해 노중국 교수와 김태식 교수의 견해는 가야나 백제의 행색과 전혀 이질적인 왜군의 존재를 부각 시켰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연히 고구려 자신들이 오랜 속민이었다던 백제와 신라보다 새로운 세력과도 전쟁을 하여 복속 시켰다고 말하는게 부왕의 공덕을 찬양하는 공덕비에도 더욱 어울리는 서사다.) 왜군의 규모는 기록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이때 고구려는 5만명을 동원했으므로 왜군도 상당한 규모였을 것이다. 이 부분도 한국 학계에서는 왜군은 1만 명 정도로 훨씬 적었고 단지 압도적으로 쓸어버리기 위해 대군을 동원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결과가 신속한 승리라는 것 이외의 근거도 없고, 당시 고구려 서북면의 국경도 그다지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문이 있다. 실제로 고구려군이 신라를 원정하는 동안 후연의 공격으로 신성을 비롯한 땅 700리를 잃었고, 고구려군은 신라에서 급히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오히려 서북면의 국경이 안정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더욱 신속하게 한반도 남부에서 최대한 빨리 왜군을 쓸어버리기 위해서라도 당시 왜군보다 훨씬 더 많은 대군을 동원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주장 또한 완전히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애당초 이 부분은 가야의 역사가 아직 제대로 밝혀진 부분이 별로 없다기 때문에 어떠한 설명도 별 근거가 없다는 꼬리표를 떼기가 어렵다. 가야의 역사를 가장 자세히 서술한 사료, 아니, 유일하게 서술답게 서술한 사료가 다름아닌 《일본서기》이다. 이걸 그대로 믿을 수도 없고, 부정하자니 다른 기록도 마땅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왜가 진짜로 백제, 가야, 신라를 모두 자신들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보기에도 일본측의 해석과 주장은 그 근거가 매우 약하다. 삼국사기는 실제 금석문의 년도보다 1년 늦은 오차가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392년 사건들이 비석의 신묘년(391년)이 된다. 1년 오차를 보정해 백제본기의 기록을 보면 진사왕 8년이 392년이므로 이때가 비석의 신묘년 즉, 실제 391년의 사건이다. 삼국사기와 백제의 실전된 사서인 [[백제삼서]]를 인용한 일본서기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기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칭원법에서 기인한 오차로 보인다. 당대에는 두가지 원년 기산 문제가 있었는데, 간단히 말해서 선왕이 죽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그 새로운 왕이 즉위한 년도를 원년으로 지정 할 것이냐 아니면 해당년도를 선왕의 마지막 년도로 계산하고 그 이듬해를 원년으로 계산 할 것이냐이다. 또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395년 기록을 보면, 백제가 먼저 선공을 했고 이에 고구려는 방어에 성공하고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서 크게 백제를 대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사는 광개토대왕릉비 396년과 동일한 기사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기년를 단독표기로 기사가 써져있는 반면에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육십갑자와 광개토왕의 기년을 병기하고 있으므로 (ex, 영락5년 병신년=396년 / 영락8년 무술년 = 398년 etc)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당대 고구려인들이 계산에 착오가 있었다고 이해하기 어렵다. 고로 삼국사기에의 기록을 1년씩 당겨와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년도부터 사망한 년도까지 계속 1년씩 어긋나기 때문에, 적어도 광개토왕의 치세기에 한해서는 삼국사기의 오기가 지속 되고 있다. 그렇지만 광개토대왕릉비의 년도가 맞고 삼국사기의 기록을 1년 당겨오면, 백제본기 395년의 기사가 광개토대왕릉비 병신년의 기사와 2년씩 격절이 나오기 때문에 의문점이 생긴다. 그렇지만 같은 사건을 두고 기록을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추정의 영역이지 확실하지는 않다. 혹자는 일본서기와 삼국사기가 연대가 일치하니깐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년을 1년 뒤로 당겨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신묘년 호태왕이라는 문구가 기록된 청동 방울이 발굴되면서 광개토왕의 원년은 391년[* 왕의 즉위 원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 해에 만들어졌을 공산이 매우 크다. 즉, 1차 사료로써 아주 큰 의미를 지니며, 릉비가 오산으로 오기 되었을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것이다]이라는게 중론이고, 이렇게 되면 삼국사기의 기록이 1년 오차가 있다는 것으로 결론 내려진다. [[https://news.joins.com/article/283056]] 임나일본부설과 관련된 광개토대왕릉비의 자세한 기년 문제는 해당항목 [[광개토대왕릉비]]를 참조하길 바란다. [[파일:호태왕:신묘년.jpg]] [[파일:호태왕:신묘년2.jpg]] ><삼국사기 백제본기 392년조 진사왕> >八年,夏五月丁卯朔,日有食之。秋七月,「高句麗」王「談德」,帥兵四萬,來攻北鄙,陷「石峴>等十餘城。王聞「談德」能用兵,不得出拒,「漢水」北諸部落,多沒焉。冬十月,「高句麗」攻拔「關彌城」。王田於「狗原」,經旬不返。十一月,薨於「狗原>行宮。 ><해석> >8년 여름 5월 초하루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 가을 7월, 고구려왕 담덕이 4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석현성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용병에 능통하다는 말을 듣고 대항하기를 회피하였다. 한수 북쪽의 여러 부락을 빼앗겼다. 겨울 10월, 고구려가 관미성을 쳐서 함락시켰다. 왕이 구원에서 사냥하며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11월, 왕이 구원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왜가 백제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또한 광개토대왕릉비 신묘년 바로 앞 기사를 보면, 백제와 신라는 과거에 고구려에 조공해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고구려는 광개토대왕이 즉위하기전 까지 오히려 백제에게 신나게 털렸으면 털렸지, 고구려가 우위에 입던 입장이 아니었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투중 전사한 사실을 상기해보자.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391년 신묘년까지 혹은 백번 양보해서 그 이전까지 고구려가 백제를 지배하고 조공을 받았다고 볼만한 껀덕지가 하나도 없다. 당장 광개토대왕의 부왕인 고국양왕대의 기록을 보면, 백제에게 신나게 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수 있다. 즉 백제를 침공한 이유는 명분 쌓기용 거짓말과 과장이라는게 중론이다 거기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도 고구려와의 전쟁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고[* 일본 주장대로 신묘년조를 해석할 경우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일본서기에도 5만 대군의 고구려군과 싸운 전쟁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의 백제왕 사망사건의 단편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일본서기에서 전승이 되지 않는 이유는 일본서기는 각 지방 호족이나 혼재하던 국가들의 구승을 일본이 통일을 이룩한뒤 집대성 하고, 이것을 마치 통일된 왕조에서 있었던 일인양 소급적용 했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왜군의 실체는 통일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이 소규모 국가들에서 파견한 용병 내지는 해적이었기 때문에 기록에서 누락 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게다가 당대에 문자가 없던 일본은 구전에 전적으로 의존 할수 밖에 없었으니 중간에 누락 된다고 이상할게 하등 없다. 간혹 일본인들중에 중국인 학자 왕건군도 일본의 학설에 동조 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왕건군은 광개토대왕릉비가 개찬되지 않았고 일본측의 판독을 지지하는 것일 뿐 일본측 해석을 지지 하는 것은 아니다. 왕건군도 상기한 점에 주목 했는지, 당시 한반도 남부에서 전횡을 일삼은 것처럼 묘사되는 왜구의 존재를 규슈 일대에 본거지를 둔 해적 수준이라고 말했다. 즉 정규군도 아니고 지방 호족이나 국가의 군대나 해적 수준으로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거나 경영할만한 능력이 있는 주체로 본 사실이 없으므로 임나일본부설과 배치 되는 이론이다. 그리고 일본측 해석되로 신민이 되었다는 신라는 신묘년 이후 비문이나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여전히 왜에 적대적이다. 신라가 왜의 신민이었다면 왜에 적대적일 이유가 없으니 논리적인 모순 상황이다. 전략적으로 볼 때도 왜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납득이 안 가는 게, 강대한 고구려가 남하하고 있는 시점에서 신라 뿐만 아니라 평소 우호적 동맹 관계였던 백제까지 뜨금없이 공격해서 신민으로 삼는 것은 삼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당시 왜가 진짜로 백제와 가야, 신라를 모두 정복하고 지배 할 수 있는 역량이 있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당시 왜국의 역량은 가야 하나 조차도 자신들의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을 정도였고 엄연히 백제 + 가야 + 신라 삼국의 국력 총합을 뛰어넘을 정도로 그렇게 압도적으로 강대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신묘년조를 해석 했을 때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중 하나가 당시 일본에 고구려 같은 아주 강대한 세력이 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당대 일본에 그런 강대한 세력이 있었다는 유물적 증거는 전혀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일본의 사학가 나가스카(中塚氏)는 “당시 일본은 통일이 완성되지 못했다. 그런데 대군을 보내었다함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평가하였으며 다른 일본측 사학자인 와가모리타로(和歌森太郞) 교수 또한 “확실히 4세기에 일본이 군을 조선에 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日本每日新聞 1971, 8, 9, 日本史の虛像と實像).] 무엇보다 저 사건 이후에도 백제와 왜는 멀쩡히 협력 관계를 잘 유지했다. 애당초 《일본서기》에서의 391~396년 기사들에도 일본이 백제를 침략했다는 기록이 전혀 없음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와 임나일본부를 끼워맞추는 논리의 크나큰 약점이다. 광개토대왕 비문의 중요한 특성중 하나가 정복한 명분과 이유를 설명하고, 정복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서술구조이다. 즉 명분과 이유를 정복전쟁에서 아주 중요시 여겼다는 것인데, 일본측 해석을 따르자면, 왜국에게 신묘년에 얻어맞고 신민이 된 불쌍한 녀석(백제와 백제왕)을 왜 396년에 쳐들어와 노객으로 삼았냐는 것이다. 즉 광개토대왕은 일본측 해석을 온전히 따르자면, 애꿎은 녀석을 괴롭힌 악마로 인식 되는것이다. 가야사 연구자 김태식 교수도 이러한 점을 한일역사공동연구회에서 지적한바 있다. 또 그에 따르면, 속민과 구민(舊民)등 '民'이 들어가는 단어는 전부 고구려가 주체로 해석하기 때문에 '신민'도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신민'을 뜻하는 것이라고 발언한바 있다. 또 비문 396년과 407년[* 407년의 지명에서 백제 원정임을 암시하는 문장들이 있다.] 기사를 보면,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매우 강하게 밀어부쳤고, 백제왕의 고구려에 굴종하는 것에 대해 매우 길고 섬세하게 서술 했고 백제왕과 광개토대왕의 대화 내용까지 기록하며 신하로써 복종했다고 부각 시키고 있지만, 이에 반해 침략의 주체이자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만든 왜구는 침략하자 격파하였다, 종발성까지 몰아부쳤다 정도의 무미건조한 서술 밖에 없다. 즉, 신묘년조를 일본식으로 해석하면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주장을 뒷받침할 다른 기록들이 한국과 일본 양측의 그 어떤 사서들에서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신묘년조의 해석은 말 그대로 일본측의 자의적인 해석만 있지, 그 어떤 근거 사료도 전혀 없다는 점이 일본 해석의 큰 약점이다. 현재 역사가들은 [[경주시]]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총|호우명 그릇]] 등과 '왜'라고 기록된 침공기록이 있으므로, 당시 고구려가 신라에 군사를 파견해서 그 정체가 어찌되었든 당시 '왜'라고 불린 세력을 격퇴하고 그 대가로 신라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 주장한다. 한 가지 고려해야할 점은, '''『[[광개토대왕릉비]]』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용비어천가처럼 광개토대왕 찬양을 위해 세워진 것이라 업적을 과장할지언정 훼손하는 쪽으로는 쓰여질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1974년에 일본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策)가 제기한 주장) 이 때문에 업적 예찬을 위해 과장과 은폐, 혹은 곡해된 내용 등이 섞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즉, 《[[일본서기]]》가 기록상으로 가치가 크지만 자국을 과장하고 사실을 왜곡했다는 논란이 큰 것처럼, 『[[광개토대왕릉비]]』 역시 무조건적으로 사실만을 바탕으로 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사료는 쓰여진 내용을 곧이곧대로 수용해선 안 되고, 당대 타 사료나 유물들 등과 비교/대조하는 등 비판적으로 엄격하게 교차검증해야만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