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나일본부설 (문단 편집) === [[중국]] 역사서의 왜왕 책봉 기사 === 한편 중국 남조(南朝)의 [[송(육조)|송]](宋), [[제(육조)|제]](齊), [[양(육조)|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 기사도 일본 학자들이 근거로 든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하사해주었다고 나온다. 왜왕은 최초에 임나 모한(마한) 진한 신라 백제의 명칭을 요구 했으나 백제가 빠진뒤 가라(가야)로 대체된다. 자세한 내용은 [[왜5왕]] 문서를 참조하자 그러나 왜왕의 책봉에 대해서는, 당시 가야와 신라가 중국 남조와 통교하는 부분에서 별로 활발하지 못했기에 남조에서는 사정을 잘 알지 못했을 것이며, 이를 왜에서 차지하지도 않은 땅을 [[언론플레이]]용으로 책봉명에 갖다붙인 것이라고 반박한다. 신라의 조공 기록은 377년과 382년에야 처음 등장하는데, 이 또한 고구려를 거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그나마도 북조인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에 대한 조공 기록이다.[* 공교롭게도 왜국의 중국과의 최초 통교 기록은 마찬가지로 진나라며 이후에 아무 관계도 없다가 5세기 초반에 고구려를 통해 동진과 통교하는 정황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413년에 왜국의 사신이 고구려의 특산물인 인삼과 담비 가죽을 바쳤다고 적혀 있으므로, 실제 왜국이 파견한 사신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의 남진 정책에서 전리품으로 사로잡은 왜구 포로를 데려와 왜국 사신인척 위장시키고 고구려에게 유리한 증언을 시키게 하여 고구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켰다는 해석도 있다] 이러한 예는 중국의 책봉 사례에서 수도 없이 발견된다. 대표적으로 [[진덕여왕]]은 '신라낙랑군왕'으로 책봉되었는데, 낙랑은 정작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에 있었다. 백제의 [[위덕왕]] 또한 '동청주지사'라는 책봉명을 받았는데, 동청주는 참고로 '중국 [[산둥]]지방'이었다. --[[요서경략설|산둥경략설?]]-- 이러하듯이 '''남의 영토 이름을 책봉명으로 하사받는 일'''은 당시에 매우 흔했다. 남조에서 내린 작위에는 본래 일본이 요구했던 작위 명에서 백제가 빠졌다. 백제와는 이미 교류하면서 어느 정도 안면이 있었으니 '일본이 백제를 거느리고 있다'고 굳이 써서 외교 관계에 지장이 생길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남조가 내려준 저 관작명은 그냥 '''[[왜국]]측의 허세'''라고 보는게 옳다. '수서 왜국전'과 '송서 왜국전'에 분명 일본측에 유리한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애당초 [[수서]]에는 신라를 고구려 패잔병이 세웠다느니, 신라 왕이 백제 출신이라느니 같은 잘못 알려진 사실들도 다 사실인것 처럼 서술되어 있으니 교차검증이 반드시 필요한 사서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왜]]가 지속적으로 자칭하고 당시 중국에게 인정해달라고 요구한 관작명은 '사지절도독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이었다. 그런데 왜왕 '제'와 '무'에 이르러서는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국왕'으로 '가라(가야)'가 추가된다. 아마도 백제를 제외하고 나니깐 대신에 가라를 넣어줄게 하고 삽입한 모양이다. 그리고 중국 또한 실제로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작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왜나라가 요청하고 중국이 인정해준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작명을 보면 왜나라가 요구한 관작명에 있던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혼자 빠져있는걸 알 수 있다. 바로 '''[[백제]]'''이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활발했고 백제는 중국 남조와 지속적인 교류로 선진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성장을 한 상황이었다. 당시 백제가 받았던 '진동대장군'이라는 직위는 정확히 일본이 받았던 '안동장군'[* 438년에 안동장군을 하사 받는다. 왜왕 진(珍)은 안동대장군을 자칭했을뿐 안동대장군을 받은 적은 없다. 안동대장군을 하사받은 것은 무(武)의 치세기(478)의 일이다. 무(武)는 후에 정동대장군으로 승급한다.]이라는 직위보다 네 단계 더 높은 직위였는데[* 그리고 고구려는 이보다 두 단계 더 높은 '정동대장군'이라는 직위를 받기도 했다.][* 鎭東將軍 中軍將軍 鎭軍將軍 撫軍將軍 安東將軍], 이것은 당시 일본이 백제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근거이다. 제군사직 자체로도 백제왕의 관직인 장군호보다 한 등급 아래의 직위라고 한다. 이왕 자칭하는거 백제보다 높은 작위를 요구했을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왜왕 스스로도 백제왕보다 자신이 하위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다. 게다가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같은 작위를 자칭하고 하사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이 사실 자체가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사실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왜는 무개념하게도 백제에 자신들의 영향력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중국측에 마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제와의 잦은 교류로 백제의 국력을 이미 알고 있던 중국 남조는 일본이 달라고 자칭한 관작명에서 백제를 아예 제외시킨다. 처음에는 백제 신라 모한(마한) 임나 진한의 지명을 요구하지만 완전히 거부 당했다. 제차 조공하며 직위를 요구하자 백제는 제외시키고 대신 가라(가야)를 포함시킨다. 한마디로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은 그저 [[정신승리]]용 허울뿐인 관작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왜나라가 자칭하고 당시 중국이 인정해준 '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육국제군사'라는 관작명을 보면 '진한'과 '모한'이 나온다. '모한'은 '근초고왕'때까지 전라남도와 규슈 지방에 세력을 떨치던 '마한의 후손'이었고 '진한'은 당시에 이미 없어진 나라였다.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 국가의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아 허울뿐인 작위라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통설은 전라도 지역에서 발굴되는 전방후원분의 영향으로 마한은 꽤 오랜 시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고 6세기 무렵까지 유지 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대세이다. 애초에 백제 멸망 시기와 개로왕이 전사한 것을 보면, 백제는 군사 편제 시스템도 개판에다가 지방호족들에게 많이 휘둘리던 나라였다. 4세기 말부터 6세기 후기까지 일어나는 일련의 백제왕 암살 사망 사건들을 상기해보자. 그러므로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을 복속시켰다라는 해석은 주류학계에서도 많이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황실도 처음에는 왜왕의 무리한 요구를 몇차례 고사하다가 451년에 이르러 백제를 제외한 작위를 하사한 이래로 왜5왕에게 계속 같은 관직을 하사했다 거기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임나'는 분명 '가야'라고 했다.[* 일본서기에서는 가야 10개국과 전라도 일대 충청도의 일대 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임라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가라'와 '임나'를 같이 언급하며 신라 모한 진한 왜 가야=임나를 6개국제군사로 임명한 것은 분명한 오류다. 한국측 서적에서는 임라와 가야가 같이 불리는게 일반적이며 가야를 나라라고 부르는 일반명사로 추정하고 임나는 지역명으로 칭하는 용례가 많다.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삼국사기에도 임나가야가 같이 불리면 금관가야 즉, 가야의 일부분을 칭한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의 기록이나 광개토대왕릉비 + 삼국사기의 기록 어느쪽을 봐도 임나 혹은 가야를 별개의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말이 되지만 임나 가야를 같이 언급하면서 다른 국가로 취급하는 것은 어느쪽의 정보를 취한다고 해도 이치에 맞지 않다.][* 다만 임나가 가야의 연맹체 국가의 일부라는 해석은 가능하지만 "국가"라고 칭하며 임나와 가야을 동렬로 병기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 일본이 요구한 관작명이나 중국이 하사해준 관작명에는 '임나'와 '가야'가 서로 다른 나라로 따로 나오고 있다. '''[[일본서기]]와 순수한 [[임나일본부설]]을 따른다면 '임나'와 '가야'는 분명 같은 나라가 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임나와 가야를 다른 국가로 취급해서 '육국'[* 六國 = 6국 = 여섯 나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중국 황실에서 집요하게 자신이 '육국 제국사'라고 주장하는 [[왜국]]의 주장을 대충 인가(認可)해줬다라는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또 임나와 가야는 같은 국명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도 정정요구도 하지 않고 그 관작을 그대로 받은 왜왕은 허울뿐인 직위에 집착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혹 왜왕이 이 오류를 인지하지도 못했다고 하면, 스스로 통치하는 나라의 실정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반증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한 허구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학자 왕건군도 한국의 국내 학회에 참석해, 왜왕이 자칭한 작위는 지극히 개인적인 요구이며, 백제 신라 가야 등을 지배했다고 반복하고 있는 것은 왜가 통치한 사실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1992년에 한국어로 발간된 "임나일본부와 왜의 요청", 출판사 -가야문화 참조] 또 당대에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와 신라 임나가라만 존재했는데 가야와 임나를 별개 국가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 지적했고 이는 자신이 자칭해서 다스리는 나라의 실정도 제대로 모르고 요구한 것이라며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한일공동역사연구회 단락에 첨부된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내용이다.] 조선족 연구자 박진석 (朴眞奭) 또한 왜왕 무(武)가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서 조미(祖禰), 즉 할아버지와 아버지(440~470년으로 추정)가 통일을 이룩한 것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소국으로 분열된 왜국이 4세기 초반에 한반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아래 항목에 첨부된 한일공동역사연구회 1기 고대사 - 5세기 노중국 교수의 논문 pg 182쪽 참조]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도 있다. 선술 했듯이 임나는 가야 제국의 총칭이 아닌 금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가라의 용례는 일본서기에서 당대 일본인들이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는데, 두 가지 용례가 있다. 첫번째는 가야제국을 의미하며 두번째는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가야이다. 왜왕이 '가라'로 자칭했다는 지명은 대가야로 추정하는데, 일본서기에서도 백제가 대가야에게 영토를 빼앗기자 백제왕이 왜왕에게 서신을 보내 다시 돌려달라고 하는 내용이 나오고 대가야에게 막대한 권력을 행사해 왜왕은 조칙을 내려 대가야로 하여금 백제에게 다시 할양하게 한다. 이로 미루어봐선 '가라'는 대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념으로 다른 두 개의 국가라고 치부하면 6국 7국 지위가 맞긴 맞다.[* 실제로 이 학설은 일본학자들의 지지를 얻는 학설이다. 제2차 한일역사공동연구회 하마다 고사쿠가 투고한 논문에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논리도 아직 맹점이 하나 있는데, 임나라는 용례는 당대 일본에서 금관가야로서 사용된 바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당대의 왜국의 인식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다.[* 임나=금관가야 혹은 임나가라 = 금관가야의 용례는 삼국유사 광개토대왕릉비 등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한국인인들의 인식이지 일본인들의 가야,임나의 정의와는 차이를 보인다.] '''또한 하술된 수서에서는 가라[* 이 경우도 대가야로 추정됨]는 백제의 속국이었다가, 6세기에 신라에 의해 다시 속국이 되었다고 하므로, 가라를 백제의 속국 혹은 부용국 내지로 보는 중국의 사서와 상충되고 있다.''' 일본서기에서도 성왕이 말하길, 근구수왕 치세기부터 탁순국 안라국 가라국 등과 서로 왕래하며, 우호를 두터이하고 백제를 형의 나라로 여겼다고 언급하고 있다. 또한 당대의 송나라의 국력에 주목해야 한다. 송나라는 당대에 전성기가 막 지나가고 망국으로 향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한이나 권력을 부여할 수 없는 처지므로 의미없는 관직이라는 것이다. 또 남조 북조로 갈라져서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북조 남조는 서로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조공-책봉 관계를 대외적으로 맺으려고 애썼다.이런 차원에서 접근하면 당연히 자신의 제후국이 막강하다고 하면, 자국은 그런 막강한 제후들을 거느린 막강한 황제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조공하는 나라가 강하고 또 더 멀리서 왔을수록 천자 입장에서는 위신이 더 산다. 이외에도 왜5왕 중 한명인 武가 중국에 사신을 보내어, 마치 자신들의 강역이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자신들의 영토가 바다를 건너서 까지 이르고 있고 마치 한반도의 일부를 복속시키고 통치하는 것 마냥 중국 황실에 고한 적이 있다. 宋書에 기록되어 있는 478년의 기사다. >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王道融泰,廓土遐畿,累葉朝宗,不愆於歲。 >동쪽으로 모인 55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중이 66국을 복속시키고, 바다 건너 북으로 95국을 평정하여 왕도가 무륵익어 태평하고, 땅은 서울에서 멀리까지 넓혔으며, 해마다 세공을 어긴 적이 없었습니다. >臣雖下愚,忝胤先緒,驅率所統,歸崇天極,道遙百濟,裝治船舫, >신이 비록 어리석지만, 선대를 이어 나라를 평안하게 통솔하고 있으며, 천극으로 가는 길은 백제를 통해 가야하기에 배를 타고 가야합니다. >而句驪無道,圖欲見吞,掠抄邊隸,虔劉不已,每致稽滯,以失良風。 >그러나 고구려는 무도하여 우리나라를 집어 삼키려하고 변방을 침략하고 약탈하여[* 노중국 교수 또한 김태식 교수와 의견을 같이하여, 일본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구려가 왜의 변방(백제의 영토)의 속한 곳을 약탈하려고 한다가 아닌 왜가 황실에 보낸 遣使船으로 해석했다. 노중국 교수의 1차 한일공동역사연구회 5세기 논문 207쪽을 참고] 근심이 적지 않습니다. 이렇게 늘 일이 막히고 거슬리는 바람에 어진 풍속을 잃고 있사오니, (중략)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