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선동 (문단 편집) === 스카웃 파동 === 졸업반 시절 [[일본프로야구]]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다이에 호크스]]와 [[한국실업야구]] 팀 [[현대 피닉스]], 지명권을 주장한 [[LG 트윈스]] 사이에 3중 계약 파문을 일으키며 마찰을 빚었다. 일본 다이에 호크스가 임선동에게 입단제의를 한 것은, 결정적으로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일본전 1실점 완투승, 동년 9월 일본 구라시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전 호투[* 결승전에서 [[임선동]]은 (선발투수 [[문동환]]의 조기강판 이후) 구원투수로 나와, 묵직한 속구와 타자의 바깥쪽과 안쪽을 정확히 찔러넣는 코너웍을 보여주면서 호투했다. 아쉽게도 9회에 끝내기 역전패를 당한 것이 옥에 티.[[https://www.youtube.com/watch?v=Vqgb4-tbpmY|영상]].] 등으로 일본야구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임선동의 회상에 의하면, 후쿠오카 [[유니버시아드]] 일본전 완투승 직후 바로 [[다이에 호크스]]한테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https://news.imaeil.com/page/view/1995090108155924648|19950901 기사.]][[https://blog.naver.com/sis_boom_bah/221882134170|2020년 인터뷰.]][[https://blog.naver.com/insidepitch/222740493732|2022년 인터뷰.]] 결국 임선동은 직업선택의 자유를 내세우며 [[LG 트윈스]]에 소송을 걸었고 2년간의 법정 공방을 통해 승소했으나 이 사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다이에]]는 [[KBO 리그]]의 지명권을 존중한다면서 영입에 손을 뗀 상태였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이 소식을 들은 임선동은 격분하여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다가 상처를 입기까지 했다. 여기에 학점 미달로 연세대학교 졸업이 늦어졌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에 뽑혔을 때 이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 현대 피닉스를 프로화하려던 [[현대그룹]]의 계획은 무산됐기에 [[현대그룹]]은 대신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서 1996년 [[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한 상태였다. 임선동은 울며 겨자먹기로 법원의 조정안에 따라 [[LG 트윈스]]에 입단했는데 당시의 조정안이 우선 지명권을 지닌 LG 트윈스에 입단 후 2년 뒤에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트레이드]]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런 임선동의 행위는 [[KBO 리그]]의 질서를 심각나게 어지럽히는 일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우선 프로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는 계약관계를 무시했으며 전체적으로 전력이 평준화돼야 보는 즐거움도 있고 판 자체가 커지게 돼있는 프로스포츠에서 [[현대 유니콘스]]와 같은 방식으로 특정 팀에 대한 비정상적인 전력 집중이 일어나면 전체적인 흥미 자체가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비정상적인 선수 수급으로 강해진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프로야구판을 지배하던 2000년대 초중반은 [[KBO 리그]] 역사에서도 관중 동원력이 가장 떨어졌던 시기였다. 700만 관중을 돌파한 2012년의 반도 안 되는 300만도 못한 수준이었고 1995년에 500만관중을 돌파하면서 엄청난 붐을 일으켰던 상황에 비해서도 엄청난 관중 감소가 일어났다.[* 물론 현대와 삼성이 무자비하게 돈지랄을 한 것도 원인이긴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와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으로 야구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쳤다.][* 현대는 창단 초기에 무지막지한 재력을 이용해 박재홍, 박경완, 조규제, 전준호, 마일영 등의 선수들을 편법으로 긁어 모아 강해진 전력이 있다. 삼성도 이에 영향을 받고 쌍방울로부터 김기태, 김현욱, 해태로부터 조계현, 이순철, 임창용, 이강철, 심지어 김응용 감독 등을 털어먹었다.] 다만 애초에 드래프트라는 제도 자체가 명백한 담합 행위에 해당하며,[* 구단 마음대로 지명할 선수를 선택하고, 거절하면 모든 구단이 계약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임선동은 법원에서 승소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럽 스포츠계는 대부분 드래프트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윗 문단에서는 프로의 기본인 계약을 무시하였다고 기술을 했는데, '''애초에 LG는 임선동과 계약을 한 적이 없다. 계약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했을 뿐이다.'''[* 법원이 임선동의 손을 들어준 이상 LG가 권리를 얻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권리를 '''일방적으로 주장'''했다고 말하는게 옳다. ] 즉, 드래프트는 어디까지나 원활한 리그 운영을 위해 선수노조가 자신들의 자유로운 계약 권리를 일부 포기하였기에 성립할 수 있는 제도이고, 선수노조가 존재하지 않았던[* 엄밀히 말하면 현재의 선수협도 선수노조는 아니다.] 당시의 KBO 리그에서 드래프트를 이유로 계약을 막은 것은 '''엄연한 불법행위가 맞다.''' [[https://m.blog.naver.com/sonsooho/222634844933|당시 법적 분쟁을 정리한 블로그]]. 사실 미국식 프랜차이즈 제도에 익숙한 대한민국 스포츠 팬들에게는 드래프트 제도가 익숙해서 별 말이 안 나오는 것이지, 드래프트는 '''근본적으로 헌법에 명시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무시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종목을 가리지 않고 이와 관련된 잡음은 꾸준히 터져나온다. 독일로 떠난 [[문성민]], 1:8 트레이드로 이적한 [[황선홍]], 상무로 도피한 [[양준혁]]이 대표적이며, 여자축구계에서는 팔자에도 없는 군생활을 해야 하기 때문에 반대로 상무를 거부한 [[최유리(축구선수)|최유리]]같은 사례도 있다. 리그 전체의 이득을 위해 개별 선수의 권익을 제한하는 제도이니만큼 한번쯤은 생각을 해 볼 문제.[* 그렇다고 드래프트 제도 자체를 없애자니 구단간 부익부빈익빈의 심화 등 부작용이 크게 나타날 우려가 높기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다.(소송의 천국으로 불리는 미국에서 드래프트 제도 자체에 대한 소송이 나오지 않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실제로 드래프트가 없는 유럽 스포츠는 빈익빈부익부가 심하며 해먹는 팀들만 해먹는 구조이다. 반면 드래프트가 있는 미국식 스포츠는 특정 팀이 오래 해먹기가 어렵고, 약팀들도 몇 년 버티면 해볼만한 경우가 많다. MLB에서 1965년 드래프트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뉴욕 양키스]]가 우승을 20번 했으나, 이후 60년 가까운 동안 7번의 우승으로 숫자가 급감했으며, 2000년 양키스의 3연패 이후, 아예 리핏조차 안나오고 있다.] 이는 트레이드나 FA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임선동의 소송은 [[KBO 리그]] 선수 전체의 권익 신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본인의 사리사욕을 목적으로 행했다는 것이 중론이었으며 훗날 선수협 창립 당시 동료들을 외면하고 프런트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는 의혹도 있는 것을 보면 더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임선동이 법적으로 승소는 했지만 이 시기를 전후해서 LG 팬들로부터 도덕성 문제로 무수한 욕을 들어먹어야 했다.[* 특히 LG에서의 2년차에 사실상 태업성 플레이를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