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성민(남배우) (문단 편집) == 일생 == 1956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인천 선인중학교와 서울 [[숭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체육학과에 다녔다. 특히 숭실고 시절에는 육상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고3 때 영화 [[빠삐용]]을 보면서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에 반해 배우의 꿈을 키우기 시작하여, 대학생 신분으로 청년 영화집단 '영상시대'의 신인배우 응모에 당선되어[* 해당 단체 출신 배우로는 임성민 외에 [[이영하(배우)|이영하]]가 있고, 감독으로는 [[정지영]], [[장길수]], [[신승수]] 등이 있다.] 1976년 이성구 감독의 영화 <마지막 밤의 탱고>에서 출연해 연기 인생을 시작했으나,[* 다만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서 본명인 임관배와 예명인 임성민의 필모그래피가 각각 나뉘어져 있으며, 네이버 영화 등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KMDb에선 2022년경에 프로필이 통합되었다.] 아쉽게도 개봉관엔 못 걸렸다. [[1977년]] [[동양방송|TBC]] 18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다. 데뷔 초기 시절 '미스터 태평양'으로 뽑힐 정도로 건장한 체격에, [[노주현]]과 [[한진희]]를 이을 차세대 주연급 연기자 후보로 제작진들에게 주목받았으며 연수가 끝난 1978년 TBC 주말연속극 <시집갈때까지는>에서 당대 인기 여배우 [[정소녀]]의 상대역으로 캐스팅되어 처음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 시기부터 '임성민'이란 예명을 처음 썼다. 후속작 <그리워>에서 [[서미경|서승희]] 상대역으로 열연했으나 도중에 군 입대를 했다.[* 이에 따라 그가 맡던 배역은 [[이덕화]]로 교체.] 입대 당시 [[홍두표]] 상무로부터 금일봉을 받을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듯했다. 1981년 4월에 제대했으나 이미 TBC는 [[언론통폐합]]으로 폐국됐고, [[KBS]] 탤런트로 재등록하는 데 4개월이나 걸렸다. 이후 여러 단막드라마에 나오면서 적응해 오다 1982년 KBS1 [[TV 문학관]] '바라암'에서 삭발을 한 채 주연으로 나와 처음 주목받았다. 다만 이 단막극을 찍으면서 삭발한 탓에 한동안 섭외가 뜸해지다 1983년 2TV 아침드라마 [[은하의 꿈]]과 1TV 일일드라마 <사통팔달>에 겹치기 출연했지만 전부 짧게 끝났다. 그렇지만 2TV 일일연속극 [[금남의 집]]에도 [[차화연]]의 상대역으로 열연하여 주가를 더욱 올렸고, 1985년부터 [[LF(기업)|반도패션]]의 전속 모델로도 활동했다. 이러한 활약과 더불어 당대 남배우 기근에 시달리던 영화계에선 그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1983년 이황림 감독의 영화 <달빛 멜로디>[* 제작은 1984년, 개봉은 1985년 3월 1일.]에 캐스팅되어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인 후, 1984년 한 해 동안 [[무릎과 무릎사이]], <탄드라의 불>, <바람난 도시> 등 에로영화 --요즘 수위로는 애들영화-- 총 4작에 연속으로 주연을 맡아 [[안소영]], [[오혜림]] 등과 열연해 주목을 받았고, 1985년 <장사의 꿈>과 같은 이쪽 분야의 간판급 배우로서 [[오수미]], [[오혜림]], 오경아 등과 함께 현대적인 섹시미로 열연했다. 주로 바람둥이 혹은 남창(지골로) 역할을 주로 맡았다. "달빛 멜로디"에 이은 두 번째 에로영화인 "탄드라의 불"에선 여주인공와의 베드신 때 부끄럼을 타서 자신의 주요부위(?)를 두손으로 가렸다는 순진하고 풋풋한 에피소드가 있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로는 "색깔있는 남자"와 "[[무릎과 무릎사이]]"를 들 수 있다. 이후 에로영화는 1989년 "애란"[* [[박영규(배우)|박영규]], 김구미자, 진희진 등과 함께 출연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로 나와 일본인 자매인 김구미자, 진희진과 정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을 끝으로 이후엔 노출도가 없는 영화만 찍었다. 얼굴이 아주 멋지고 키까지 큰 데다 연기도 곧잘하는 배우라 월등한 비주얼로 많은 여심을 사로잡았다. 다만, 벗어서 유명해진(?) 배우라는 프레임만 씌우는 것도 부당한 게, 1986년 '장사의 꿈'으로 [[백상예술대상]] 남자신인연기상, 1991년 '[[사의 찬미(영화)|사의 찬미]]'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이 있는 편이었다. 드라마에서도 한때는 선역보다 악역을 자주 맡아서 한동안은 비호감이었다.[* '푸른 해바라기'에선 절친의 여친을 탐하는 역할, '황금의 탑'에선 크게 도약해서 절친을 죽이고 약혼녀를 빼앗는 무자비한 역할을 맡았다. 두 드라마 모두 메인 남주인공은 [[홍요섭]].] 1986년 영화 <몸 전체로 사랑을>에 출연한 후 반도패션 광고를 뺀 연기 활동을 중단한 채 이미지 중심에서 탈피하기 위해 창을 배우며 수영과 골프로 체력 단련을 했고, 금주/금연에 매진하며 도예 및 낚시를 하기도 했다. 1987년 초 [[KBS 대하드라마]] [[노다지(드라마)|노다지]]를 통해 김도흡([[김진태(배우)|김진태]] 분)의 아들 김수인 역으로 컴백하여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고, 1989년 주말연속극 [[사랑의 굴레]]에서 젠틀하고 유능한 데다 발군의 비주얼 "고영국 실장" 역할을 맡아 주인공 [[김미숙(배우)|김미숙]]과 같이 열연하며 급호감으로 대반전을 이루게 되었다. 여기서 극중 의부증 쩌는 [[고두심]]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은 것은 물론이고 전국 주부들의 지지도 No.1으로 급상승 하며 이후 서브남주에서 메인남주로 격상되었다.[* 당시 드라마 한편으로 떠서 아줌마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배우로는 '내일은 잊으리'의 [[박영규(배우)]]와 '[[엄마의 바다]]'에 나온 [[독고영재]]가 있었다.] 1992년 [[억새 바람]]을 시초로 [[MBC]]에서도 얼굴을 내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