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시수도 (문단 편집) ==== [[한국사]] ==== [youtube(wV7fIAgrWAY)]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던 부산. * [[신라]]의 [[명활성]][* 임시수도라기 보다는 고대 한반도 수도 특유의 전시성~평시성 체제에 가깝다. 수도 바로 근처에 전시에 농성할 수 있는 성을 쌓아 전시에 대비하는 것.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의 경우에도 국내성(평시성)과 환도산성(전시성) 이중 구조였고, 한성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역시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북성(평시성)과 남성(전시성) 이중 구조였으며, 신라의 명활산성 또한 그런 역할을 하는 성이다.] - 475년~488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 위협을 경계해 옮겨 있었다. * 고려시대 * [[나주시|나주목]] - [[제2차 여요전쟁]] 시기 [[요성종]]이 4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자 당시 [[고려]]의 국왕 [[현종(고려)]]이 개경을 떠나 나주로 피난했다. 나주는 건국초기 [[태조왕건]]이 나주호족들을 포섭하여 고려왕실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었다. 나주는 2차 여요전쟁 기간 동안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 [[강도(고려)|강도]](江都) - [[여몽전쟁]] 기간인 1232년부터 1270년까지 지금의 [[강화도]]에 있었던 [[고려]]의 임시수도. * [[안동시|복주목]] - [[홍건적의 난]] 때 홍건적이 10만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자 당시 [[고려]]의 국왕 [[공민왕]]이 개경을 떠나 안동으로 피난했다. 안동은 건국초기 [[태조왕건]]이 안동호족들을 포섭하여 고려왕실의 친위세력으로 만들었다. 안동은 2차 홍건적의 난 기간 동안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 조선시대 * [[평양부]] -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진격으로 인하여 임시수도로 삼았던 두번째 고을. 당시 전쟁 준비를 위해서 평양성 내부에 쌀을 비롯한 곡식, 군수물자를 비축하였으나 선조의 의주피난 결정으로 인하여 함락되었다. * [[의주부]] -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당시 [[조선]]의 국왕 [[선조(조선)|선조]]가 한양을 떠나 [[의주목]]으로 피난했다. 당시 [[의주목]]은 명나라와 가까워서 유사시에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여러 이점이 있었으며, 이때문에 의주는 임진왜란 기간 중 임시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 [[강화군|강화도호부]] - [[정묘호란]] 당시 후금군이 한양으로 진격하자 당시 조선의 국왕 [[인조]]가 여몽전쟁 시절처럼 한양을 떠나 강화도로 피난했다. * [[남한산성]] -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다시 한양으로 진격하자 [[인조]]는 원래 정묘호란 때와 같이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으로 갔다. 그러나 결국 항복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고 만다. * 현대 * [[대전광역시|대전시]] - 1950년 6월 27일 ~ 7월 16일. 6.25 전쟁 당시 수도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에 정부를 대전으로 이전했고 [[대전 전투]] 도중 대구로 이전했다. 대전은 4일 뒤인 7월 20일 북한군에 점령되었다. * [[대구광역시|대구시]] - 1950년 7월 16일 ~ 8월 17일. [[다부동 전투]] 전후로 대구도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최종적으로 부산으로 정부를 이전했다. 기간이 짧아서 부산시에 비해 임시수도였다는 존재감은 낮은 편. 다만 다부동 전투에서 방어하는데 성공하고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대구는 끝내 인민군에게 함락당하진 않았다.[* 그래도 낙동강 전투 중에는 [[대구역]] 등지에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 '''[[부산광역시|부산시]] - 1950년 8월 18일 ~ 10월 27일, 1951년 1월 4일 ~ 1953년 8월 14일.''' 아마도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임시수도일 것이다. 임시수도였던 기간이 대전이나 대구보다 훨씬 길었기 때문에 6.25 전쟁 당시 임시수도는 부산이 가장 유명하다. [[서울특별시|서울]] 탈환 이후 북진한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한 다음날인 10월 27일 환도가 이뤄졌으나, 1951년 1월 4일 [[1.4 후퇴]]로 서울이 재점령되자 다시 임시수도가 되었다. 그 후 UN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재탈환했지만 환도는 하지 않고 정전 후인 1953년 8월 14일까지 부산을 임시수도로 유지한다. 부산시는 이를 기리고자 [[부산광역시]] [[서구(부산)|서구]] [[부민동]]에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관저를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이 시기에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 [[제2대 대통령 선거]] 등의 사건이 있었다. 현재 관련 유적들이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 [[평양시]] - [[1948년]] [[9월 9일]] ~ [[1972년]] [[12월 27일]].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은 헌법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首部, 수도)는 서울시다"라는 조항을 삽입하고 별도의 법률을 통해서 평양을 임시수도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사회주의 헌법]] 통과 이후 정식 수도를 평양으로 바꾸었다. * [[강계시]] - [[1950년]] [[10월 12일]] ~ [[1950년]] [[12월 6일]].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해오자 북한 정부는 1950년 10월 12일 평양에서 철수해 강계로 이동하였다.[* 이때 방송으로는 정부가 [[신의주]]로 이동한다고 선전하였다.]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12월 6일 평양을 재점령한 후 평양으로 환도했다.[* 지금도 유사시 방어하기 힘든 평양 대신 [[개마고원]] 안쪽의 후방 강계가 임시수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