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영신 (문단 편집) === 제1공화국 당시 === 1945년 9월, 조선여자국민당[* 1948년부터 '대한여자국민당'으로 변경.]을 만들어 초대 당수가 됐고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창설 당시 의원을 지냈다. 1946년 말, [[민주의원]] 대표로 50개 회원국의 유엔 대표들을 상대하며 총선을 통한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외교 활동을 목적으로 [[유엔 총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파견되었다.[*a 조선일보사 출판국, 《전환기의 내막》, 1982, 조선일보사, p. 290] 유엔 본부가 있는 [[뉴욕]]으로 가기 전에 워싱턴으로 가서 [[해리 트루먼|트루먼]] 대통령과 번스(Byrnes)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명의의 공식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UN]]에서 활동하기 위해 도미할 때 국내에서 자금 지원을 할 형편도 못되어서 겨우 여비만을 마련하여 당시 [[LA]]에서 트럭 사업과 주유소업으로 크게 성공한 친오빠 임일(任一)을 설득하여 활동비, 교제비 등의 비용을 조달받았다. 이후 총선거를 치루고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임영신이 미국에서 활동하는데에 든 비용만 무려 38만 달러였다.[* 尹致暎, 《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1991, 三星出版社, p. 178] [[1946년]] [[10월 20일]], 뉴욕의 플러싱 메도우스(Flushing Meadows)로 가서 유엔 회의에 참석하였다. 아직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식 참석 자격이 없던터라 처음에는 입구에서 출입을 저지당했지만, 연합통신의 미스 시그리드 안(Sigrid Arne)의 도움으로 회의 참석 자격을 얻어냈다. 이후에는 [[로물로]] 필리핀 외상과 엘살바도르 대사, 리비아 대사 등 3명의 보증을 받아 2년동안 유엔을 자유롭게 드나들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a] 그녀는 한국의 문제를 말할 수 있도록 폴 핸리 스파크(Paul Henri Spaak) 의장과 트리기브 리(Trygve Lie) 사무총장을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산업통상자원부장관|초대 상공부장관]]에 취임했고, 이듬해인 1949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을 선거구에 출마해[* 전임 [[정현모]] 의원이 [[경상북도지사]]로 임명되어 사직.] [[외교부장관|초대 외무부 장관]] 출신인 [[무소속]] '''[[장택상]]''' 후보를 꺾고 당선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독직사건으로 기소되어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0년 2월부터 상공일보 사장을 맡다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해 [[무소속]] [[유진산]]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여자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금산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유진산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지만 재차 낙선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