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원경제지 (문단 편집) == 상세 ==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육조판서와 관찰사를 두루 역임했던 서유구는 관직을 떠난 뒤, [[파주]] 장단 집에 내려와 살면서 몸소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실천, 82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임원경제지를 집필했다. 총 113권 54책, 252만 7083자로 개인이 저술한 단일 저작물로는 국내에선 최대 규모다. 관념에 치우친 조선 유학자의 학문 태도[* 서유구는 당시 유학자들의 태도를 토갱지병(흙으로 만든 국, 종이로 만든 떡)과 같다고 비판했다.]를 버리고 직접 음식을 차리고 옷을 짜보고 농기구를 만들며 조선시대 생활 전반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한다. 그야말로 서유구가 36년간 혼자 만든 조선판 [[브리태니커]].[* 역사스페셜의 제목이 '''조선판 브리태니커 임원경제지'''이다.] 아들 서우보가 많은 부분을 도왔다. 그래도 정약용처럼 출판소 차린 정도는 아니고, 그마저도 아들 서우보(徐宇輔, 1795-1827)는 서유구보다 훨씬 먼저 죽었다.[* 이때 서유구가 남긴 글을 보면 매우 슬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책의 성격상 이공계 실력[* 특히 생물, 천문, 기상, 의학, 조리 과학, 공학 분야에서.]에 더해 [[한문]]까지 능숙하게 해독할 수 있는 문과적 실력까지 겸비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들은 드물고, 대중을 위해 번역작업까지 하기는 힘들다. 제대로 된 번역서가 없으니 대중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이래저래 [[정약용]]과 자주 비교되는 서유구이다. 총 113권 52책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16지이기에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십육지 (林園經濟十六志)로도 불린다. 2012년에 임원경제지 연구소에서 원본의 내용을 1632쪽짜리 책으로 개관서를 냈다. 번역본이 아니라 대강 서유구와 16지에 대한 간략한 소개서인데도 이 정도이다. --개관서만 전공책급.-- 전질을 완역하면 40권 분량이라고 한다. 유명한 판본 3종이 있는데 서울대 규장각 판본, 고려대 중앙도서관 판본, 오사카부립중지도도서관본이지만, 안타깝게도 셋 모두 완전한 판본이 아니다. 워낙 책 양이 방대하다 보니 옮겨적는 과정에서 오탈자가 많았던 듯하다. 중지도도서관 판본은 인제지(의료 부분)가 아예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