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원경제지 (문단 편집) == 저자의 약력 == 18세기, 19세기 [[실학]] 시대는 [[정약용]]을 비롯, [[이익(실학자)|이익]], [[박제가]], [[정약전]], [[김정희]] 등 걸출한 인물을 많이 나왔고, 현대 학자들도 이들의 삶과 저서를 많이 연구했지만, 유독 서유구는 조명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 당대 가장 네임드는 서유구였다. 그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에만도 64건이 있고, [[일성록]]엔 505건, [[승정원일기]]에는 1273건, 규장각 일지인 [[내각일력]]에는 무려 2788건이나 나온다.[* 다만, 서유구가 앞에서 거론한 실학자들보다 관직생활이 길었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내직만 꼽아도 이조, 병조, 형조, 예조판서, 대사헌, 대제학, 좌우참찬 등, 삼정승을 제외한 왠만한 직책은 다 거쳤다.] 정조가 낸 [[시경]] 강의 시험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수석을 차지한 사람도 정약용이 아니라 서유구였다. 집안 또한 대대로 경화세족 가문으로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조]], [[정조(조선)|정조]] 시대의 명망 있는 학자로 [[고사십이집]], [[본사]], 보만재총서 60책 등[* 정조가 “조선 400년 동안에 이런 거편은 없었다”고 최고의 평가를 내린 책들이다.]을 남겼고,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영조]] 말년 홍인한을 필두로 한 척신세력들이 당시 세손이던 [[정조(조선)|정조]]의 [[대리청정]]을 방해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정조가 무사히 즉위할 수 있도록 도운 일등공신이다. [[규합총서]]의 저자 빙허각 이씨 또한 [[서유구]]의 하나뿐인 형수였고, 서유구 자신도 이전부터 [[완영일록]], [[화영일록]] 등 여러 책들을 저술하였다. 이런 집안[* 하지만 할아버지 서명응은 [[사도세자]]의 비행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적이 있고, 작은 할아버지 [[서명선]]은 [[벽파]]의 입장에 동조하여 [[정조(조선)|정조]]의 비원이던 사도세자 추숭을 반대했다. 소론 출신이지만 노론 벽파의 입장에 동조한 소론 벽파라고 볼 수 있다.] 출신에다 엄청난 능력으로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를 만들었지만 그 방대함과 전문성 때문에 지금껏 [[한국고전번역원]]은 물론 누구 하나 번역에 손을 대지 못했고 결국 [[듣보잡]]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