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조선군의 병력 구성 ==== 위 병역 제도를 통하여 조선이 실제로 가용한 병력이다. 임진왜란 개전 당시의 병력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파악하기 힘드나 개전 1년 뒤인 1593년 1월 조선군의 병력이 얼마인지는 사료가 남아있다. 이하는 장부상 병력이 아니라 실제 운용중이던, 혹은 최소한 운용중이라고 조선 조정에 보고된 병력들이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경기도> - 19,300명 >강화부(江華府) 전라도 절도사 최원(崔遠)의 군사 4,000명 >경기도 순찰사 권징(權徵)의 군사 400명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의 군사 3,000명 >의병장(義兵將) 우성전(禹性傳)의 군사 2,000명 >수원부(水原府) 전라도 순찰사 [[권율]](權慄)의 군사 4,000명 >양주(楊州)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의 군사 2,000명 >양근군(楊根郡) 의병장 이일(李軼)의 군사 600명 >여주(驪州) 경기 순찰사 성영(成泳)의 군사 3,000명 >안성군(安城郡) 조방장(助防將) [[홍계남]](洪季男)의 군사 300명 > ><충청도> - 10,800명 >직산현(稷山縣) 절도사 이옥(李沃)의 군사 2,800명 >평택현(平澤縣) 등처의 장관(將官)들이 각각 수백 명을 합해서 약 3,000여 명 >각처의 의병 합해서 약 5,000여 명 > ><경상도> - 77,000명 >경상좌도 안동부(安東府)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의 군사 10,000명 >울산군(蔚山郡) 절도사 [[박진(동명이인)|박진]](朴晉)의 군사 25,000명 >창녕현(昌寧縣) 의병장 성안(成安)의 의병 1,000명 >영산현(靈山縣) 의병장 신갑(辛碑)의 군사 1,000명 >경상우도 진주(晉州)에 순찰사 [[김성일(조선)|김성일]](金誠一)의 군사 15,000명 >창원부(昌原府) 절도사 [[김시민]](金時敏)의 군사 15,000명 >합천군(陜川郡) 의병장 [[정인홍]](鄭仁弘)의 군사 3,000명 >의령현(宜寧縣)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의 군사 2,000명 >거창현(居昌縣) 의병장 [[김면]](金沔)의 군사 5,000명 > ><전라도> - 25,000명 >순천부(順天府)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 5,000명 >우수사 [[이억기]](李億祺)의 수군 10,000명 >각처에 나누어 주둔한 조비군(措備軍) 10,000명 > ><함경도> - 10,200명 >[[함흥부]](咸興府) 절도사 성윤문(成允文)의 군사 5,000명 >경성부(鏡城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의 군사 5,000명 >안변부(安邊府)·별장(別將) 김우고(金友皐)의 군사 100명 >조방장 김신원(金信元)의 군사 100명 > ><강원도> - 2,000명 >인제현(麟蹄縣) 순찰사 강신(姜紳)의 군사 2,000명 > ><평안도> - 17,903명[* 평안도 병력만 한자리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된 건 이곳이 바로 선조와 조선 조정이 피난가 있던 [[의주목|의주]]가 있는 곳이라 병력 현황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어서였다.] >순안현(順安縣) 절도사 [[이일]](李鎰)의 군사 5,680명 >법흥사(法興寺)에 좌방어사 정희운(鄭希雲)의 군사 2,273명 >의병장 이주(李柱)의 군사 370명 >소모관(召募官) 조호익(曺好益)의 군사 300명 >용강현(龍崗縣)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의 군사 7,770명 >조방장 이사명(李思命)의 군사 1,090명 >대동강 하류 수군장[舟師將] [[김억추]](金億秋)의 군사 420명 > ><황해도> - 8,800명 >[[황주목|황주]](黃州) 본도 좌방어사 [[이시언(조선)|이시언]](李時言)의 군사 1,800명 >재령군(載寧郡) 우방어사 김경로(金敬老)의 군사 3,000명 >연안부(廷安府) 순찰사 [[이정암]](李廷馣)의 군사 4,000명 > >'''이상 합계 172,400명.''' >(선조실록 34권, 선조 26년(1593) 1월 11일 병인 15번째 기사) 다만 이 기록에서도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중복집계 되거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참고. 이중 [[의병]]의 병력 20,000여 명을 제외하면 조선 정규군은 15만 명 정도라고 사료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1593년 1월은 선조가 [[의주]]에 피난가 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이 평양성을 점령하고, 가토 키요마사의 2군은 함경도로 진격중인 임진왜란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 때문에 경상도, 충청도, 경기도 등이 멀쩡하던 임진왜란 개전 당시 최대 동원 가능한 병력은 이보다는 많았을 것이다. 또 다른 자료로는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보고서인 '진시무차'(1594년 4월)의 내용이다. 군적상 '''조선군 전체 군인수 145,620명, 그 중 정로위, 갑사, 별시위가 23,620명, 정예군 중 군사 7,920명 보인 15,700명.''' 위 자료와는 달리 의병은 기록에서 빠졌다. 그 밖의 다른 자료로 1509년의 조선 병력은 "이 해에 군적(軍籍)을 고쳤는데, 정군(正軍)이 177,322명, 잡군(雜軍)이 123,958명이었다."(중종실록 10권, 중종 4년 12월 30일 정사 7번째 기사) 전쟁 당시에도 이 병력과 큰 차이가 없다면 총 병력은 30만, 전투병인 정군은 18만 정도를 동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자료를 종합해 볼때 개전 당시 조선이 운용한 관군의 전투 병력은 약 18만 내외인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조선 수군의 개전 초기 병력은 약 3~4만 이상으로 추정되는데[* 1475년(성종 6년) 총군병 148,849명 중 수군이 48,800명, 만기요람(1808)에 의하면 총 수군 장졸수가 36,804명이었다. 전쟁 때도 3~4만 정도의 수군을 유지했을 것이다.] 위 1593년 1월의 자료에 남아있는 기록상으로는 15,420명에 불과하다. 이렇게 된 원인은 개전초기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주하고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유 군선을 자침시켜 조선 수군 중 가장 많은 병력을 보유했던 경상도 수군이 통째로 와해되었기 때문이다. 이 많은 조선군이 어디서 뭘했길래 주요 전투에 안보였냐고 묻는다면, 원래 전쟁이란게 최일선 병력만으로 하는게 아니다. 일본군도 임진왜란 초반 핵심전투인 [[부산진 전투]], [[동래성 전투]], [[상주 전투]], [[탄금대 전투]], [[평양성 전투]] 등은 모두 고니시 1군의 18,000여 명이 주도적으로 치루었고, 가토의 2군 22,000여 명이 그 다음으로 많이 싸웠고, 나머지 10만이 넘는 일본군들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황해도 등 조선팔도 각지에 흩어졌는데 이들과 대치한게 이 병력들이다. 양적으로 조선의 병력은 상당했지만, 누차 언급되었다시피 이 병력들은 질적으로는 좋지 못했다.[* 이건 동시기 [[명나라]]도 비슷해서 [[척계광]]이전까지는 가정 연간의 외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일본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고 국토가 유린당한 사례까지 있을 정도였다. 참조:[[https://www.instiz.net/pt/6009168?frompc=1]]] 이상은 임란 초반의 병력 상황이고 정유재란 당시에는 조선의 재정이 그 동안의 전란으로 많이 악화된 데다 [[선조(조선)|선조]]가 전후 복구를 위해 병력들 상당수를 고향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바람에 병력 수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그 빈 자리들을 명나라 군이 상당 부분 다시 채워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