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전쟁의 시작 === ||<-2>[youtube(KLcbx-sbm9Y)]|| || 8천 조선군, 16만 대군과 맞서다 || 전쟁 발발 전인 3월 23일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슈인조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에게 조선출병을 명했으니 너(가토 기요마사)도 전장에 나가라. 이국(조선)의 자(者)는 그렇게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방심하지 않도록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 공문을 전국에 보냈다.[[https://m.news.naver.com/read.nhn?oid=001&aid=0010724519&sid1=104&mode=LSD|#]]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조선 조정이 전쟁의 발발을 알게 된 것은 꽤 늦은 4월 17일이었다. 봉수가 작동하지 않아 장계로서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700척 18,700명(경상 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 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갑작스레 적의 대군을 맞은 부산진 첨사 [[정발(조선)|정발]]은 매뉴얼대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배 3척을 자침시킨(전선, 중선, 방패선 각 1척) 다음 6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개전 직전 서평포(부산 사하구 일대)와 통합된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 아래 14일 ~ 15일 이틀에 걸쳐 싸우다 전멸했다. 남동부 방위 중심지인 동래성에는 개전 하루도 채 되지 않은 4월 14일 경상 좌병사 이각과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다. 경주 판관 박의장과 밀양 부사 박진이 도착하기 전에 동래성은 이미 포위되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외침에 대비한 매뉴얼이 사전에 만들어져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은 너무 많고, 또 강했다. 동래성도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친 박진의 군사 500여 명도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 손쉽게 무너졌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구원에 실패한 후[* 원균이 이순신에게 보낸 공문에선 박홍과 이각은 한 차례 동래성 북쪽으로 접근했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안방준의 묵재일기에선 제승방략에서 감사와 병사는 성 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 밖에서 호응한다고 언급했다. 박동량의 기재사초에 박진과 이각이 소산역에서 전투 방식을 놓고 의견을 조율한 대목이 나오는 걸 보면 적어도 이 때까진 이각에게 싸울 의지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경상 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킨 후 경주로 퇴각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 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따라 울산과 경상좌도 지역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으며 관군에 의하여 방어되지 못하였다. 결국 회야강 전투에서 관군이 패배하고 경상좌병영과 울산군이 순식간에 함락되면서, 경주와 언양 등지에서 방어는 사실상 전무하게 되었다. 이후 울산과 경주지역 의병들이 모여서 경상좌병영과 일대 지역을 탈환해보려고 하였는데, 바로 [[제1차 경상좌병영 탈환 전투]]이다. 분군법에 따라 동래성을 지키러 떠난 양산 군수 대신 양산을 지키던 영산 현감 강효윤은 4월 17일 일본군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동래읍성 북문으로 빠져나와 밀양으로 퇴각했다. 4월 18일 고니시 군의 본대가 양산에 입성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박진은 영남에서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낙동강변 험로 황산과 작원 잔도에 2차 방어선을 쳤다. 진주에서 개전 소식을 접한 경상 감사 김수는 4월 16일 낮 밀양에 도착해 도내 총동원령을 내리고 진주와 함안의 군사들을 동원해 박진을 지원하고자 했다. 당시 박진이 거느린 군사는 너무 적어서 황산과 작원관 전체 구간을 방어하긴 무리라고 판단한 후, 작원관의 끝부분만 차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산 잔도를 건넌 고니시 군 선봉대는 작원관에서 박진 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는데 선두가 차단된 고니시 군 선봉대는 주력 일부를 금병산 능선으로 우회시켜 조선군의 배후를 차단해 포위 섬멸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박진 군은 무너지고 박진은 간신히 빠져나와 밀양성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대피시킨 다음 빠져나왔다. 이로써 영남의 2차 방어선도 무너졌다. 4월 17일 영산으로 물러났던 김수는 18일 박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초계로 물러났다. 경상 우도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란에 휩싸였다,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초계 군수 이유검이 먼저 서문으로 달아나버렸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으려고 성을 나갔다 그대로 진주로 도망쳤지만 [[사충신]]의 주도로 의병들과 백성들이 혈투를 벌였다. 그러나 결국 함락되었다. 창원에 있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이 지원하려 했으나 급하게 모은 병력 2백여 명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초계 군수 이유검은 4월 26일 김수에게 참수되었고 병력 운송 중에 사고가 생겨 아예 지원도 못 간 의령 군수 오응창 역시 6월에 처형되었다. 한편 유사시 비상 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선조 수정 실록 4월자에 실린 경상 좌병사 이각의 장계에는 봉수군 오장이 일본선 400척을 목격하고 즉시 보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화 체계가 완전히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400척을 일본군의 전력으로 판단해 일본군 규모를 1만 가량으로 추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 그러나 당일 저녁에 한양으로 들어와야 했던 봉화는 들어오지 않았고[*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 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였다.],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봉수군이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것. [[한양|한성부]]의 조정은 4월 17실 신시, 저녁 무렵에나 상황을 파악했으며 그리고 이 속도는 그냥 마편으로도 도달 가능한 속도인 만큼, 봉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맞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데 중앙에서 경장을 파견하는 건 진관체제도 똑같다. 진관 체제는 소규모 병력이 각지에서 분산되어 방어하게 되어있고 각 진관이 윗선의 허가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일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일개 고을 내지는 도 단위로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공격에 대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1개 ~ 2개 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이들을 지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진관 체제라고 현지 지휘관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북방 지역은 현지 병사가 지휘하게 하고 남방도 지방군과 중앙군의 역할을 나눠 상당 부분 재량권을 부여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제승방략은 상당히 진보된 제도였다. 왜침이 전례없는 대규모에 속도가 빨랐고 지방군의 훈련도가 워낙 저열했기 때문이지 제승방략이 병력 모아놓고 경장만 기다리는 제도라서 무너진게 아니다. 결정적으로 조선 육군이 임란 최대 규모로 투입된 [[용인 전투]]가 경장이 아닌 전라감사가 지휘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경장의 파견 문제가 큰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 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 기마 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 기병 전술로 보병 중심인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문제는 전쟁 후 명의 절강 병법을 받아들인 후에 개선되었다. 이 절강병법도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몰래 들여와서 해냈고, 그 전까지는 한양이 불타오를 때 전술서 등이 같이 불타버리며 손자병법 수준의 기본서 외에 제대로 된 전술 군략서가 없어 "아 이거 군제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어떡하지" 하는 상황이었다.[* 애석하게도 이렇게 보병 중심인 일본군을 상대하기 위한 삼수병 체제를 만들고 나니, 이번엔 북방 유목민 [[정묘호란|후금]][[병자호란|-청]]이 달려왔다.대 북방 테크일때는 남방한테 찔렸고, 대 남방 테크일때는 북방에게 찔렸다. 고려시대부터 북방의 유목민, 남방의 왜구라는 양면전선에 시달리던 한반도 왕조의 어려움이 보이는 구도였다.] 그럼에도 경상도의 1선 방어군들은 어쨋든 필사적으로 일본군과 맞아 싸웠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부터 시작된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시|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 등의 9천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 [[가토 기요마사]] → 2만 2천 명, 조령 / [[고니시 유키나가]] → 1만 9천 명, 조령 / [[구로다 나가마사]] → 1만 1천 명 추풍령 등 15만 8천 명 * 제1군은 중로(中路)로 [[동래]] - [[양산시|양산]](梁山) - 청도(淸道) - [[대구광역시|대구]](大邱) - [[인동(구미)|인동]](仁同) - [[선산군|선산]](善山) - [[상주시|상주]](尙州) - [[조령]](鳥嶺) - [[충주]](忠州) - [[여주시|여주]](驪州) - [[양평군|양근]](楊根) - 용진(龍津) 나루 - [[한양|경성]]동로(京城東路), *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 - [[울주군|언양]](彦陽) - [[울산시|울산]](蔚山) - [[경주시|경주]](慶州) - [[영천시|영천]](永川) - 신녕(新寧) - [[군위군|군위]](軍威) - [[예천군|용궁]](龍宮) - [[조령]] - [[충주시|충주]] - [[안성시|죽산]](竹山) - [[용인시|용인]](龍仁) - [[한강]], *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 - [[성주군|성주]](星州) - [[무계]](茂溪) - [[지례]](知禮) - [[등산]](登山) - [[추풍령]](秋風嶺) - [[영동군|영동]](永同) - [[청주시|청주]](淸州) - [[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북상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