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반격의 시작 === >'''정의를 위하여 일어서라''' > >(전략) >강개한 심정으로 곳곳마다 조국을 그리는 노래 부르고 도의를 숭상하려 집집마다 예절을 닦는 글을 읽었건만 불행하게도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져서 섬 오랑캐들이 이 땅을 침범하였다. >조정 신하들은 북으로 물러서고 임금의 행차도 서울을 떠났다. >사직이 위태로워지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다. > >바라노니 씩씩하고 용감한 여러 선비들이여! 나의 이 글을 읽고 나의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찬란한 지금의 문물은 모두 선왕들이 쌓아놓은 업적들이다. >'''흉악한 저 원수를 치려는데 그 누가 충성을 다하고 용맹을 떨치려는가?''' >절개 높은 용사들이 대열에 모여드니 나라 위한 싸움에 내닫는 병사들의 의기도 드높으니라. >지사들이 군중을 불러일으키니 죽음을 아끼지 않는 의병들은 모여들라. >남쪽 지방이 비록 좁지만 몸과 마음을 바치려는 군중들이 그 얼마인가. >나라의 혜택이 널리 퍼졌으매 반드시 한 마음으로 협력하려는 장사들이 많으리라. >'''우리 함께 힘을 모아 일편단심 싸워 나간다면 여러 의병들의 충성된 공훈과 장렬한 절의는 천추에 길이 빛나고 역사에 영원히 남으리라.''' >---- >- 의병장 [[김천일]]의 격문 > 가만히 생각건대, 원수와는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 예기의 큰 의리이고, 9대의 원수도 반드시 갚으려 하는 것이 춘추의 아름다운 말이다.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제거해야 하니, 신민(臣民)으로서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 ---- > - 의병장 박춘무의 격문, 花遷堂集 卷1, 「檄文」 > 지금 이 잔악한 왜적의 소행은 짐승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백성들을 살육함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연물을 모질게 해침에 가옥과 식량을 모두 불살랐다. 길에서 아낙네 한 명을 만나면 사내 열 명이 다투어 淫行을 하니, 이는 바로 하늘 아래 수많은 오랑캐들도 하지 않고 지각이 없는 짐승도 오히려 하지 않는 짓이다.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비록 감히 막는 자가 없지만 천지 산천의 귀신이 모두 은밀히 주벌할 것을 의논하고 중국과 오랑캐들이 모두 드러내 처형할 것을 생각하니 '''비록 죽음을 앞두고 잠시 목숨이 붙어 있는 사이에 우리 백성들을 죽일 수는 있어도 天定人勝의 날에 그 죄를 자복할 것이다.''' > ---- > - 의병장 [[조헌]]의 격문, 「告諭本國人爲倭所擄君文」 > 나 고경명은 진실된 마음의 노인이며 백발 부유(腐儒)로서, 한밤중에 닭소리를 듣고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없어 중류의 노를 쳐서 외로운 충성을 스스로 다짐하였다. 이는 한갓 견마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정성을 품었을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미약한 힘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향할 것이니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며 군중에게 맹세하는 도다. 곰을 잡고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천둥 울리듯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하고 수레를 뛰어넘고 관문을 뛰어넘을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비처럼 모이니 이는 절대로 강박해서 응하거나 억지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하로서의 충성된 마음이 함께 지성에서 나온 것이다. '''위급존망의 날에 처하여 감히 하찮은 몸을 아끼겠는가.''' 처음부터 의병이라 칭한 이상 직분에도 매이지 않았으며, 병졸은 곧은 것으로서 장렬함을 삼았으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대소인원의 모의를 하지 않고도 뜻이 같았으며 원근의 사민들은 소문을 듣고 일제히 분발하였다. > 아! 우리 열읍 수령, 각 처 사민(士民)들아! '''충심이 어찌 임금을 잊을 것이며 의리상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빌려 주고 혹은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을 달려 전장에서 앞장서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둑에서 일어나리라.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서 능히 임금을 위해 난을 막는 자가 있다면 그와 더불어 행동하기를 원한다.''' > ---- > - 의병장 [[고경명]]의 격문. 『제봉선생집』권7, 정기록, 마상격문 [[조선군]] 전위가 맥없이 붕괴한 초기 전황과는 달리 개전 후 2달이 지나자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곽재우]], [[조헌]],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의 재야 인사들, 정부에서 내려보낸 수령들의 주도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아래 '임진왜란의 오해'에 기술.] 집결한 지방군들이 일본군의 육상 보급로를 압박하며 각지에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초반부에 너무나 빠른 진격에 놀라 급격하게 와해됐던 군세는 후퇴 후 본격적으로 재정비하면서 일본군의 공세에 침착하게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1592년 6월 이후 당 해 말까지 벌어진 주요 지상전투가 약 17회였는데, 일본군이 주도해서 공격해온 횟수는 고작 4회뿐이었고, 나머지는 조선군과 [[의병]]이 오히려 선공을 날렸다. 승률에 있어서도 조선 측이 8번의 승리와 3회의 무승부를 기록한 반면 일본은 6회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체적인 판세는 일본 측이 쥐고 조선 팔도 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고 있었지만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누적되고 있던 것이다.[* 게다가 성을 포위해 말려죽이고 항복을 받아내던 일본 국내의 공성전과 달리 조선에서의 공성전은 '''항복 그딴거 없이 너죽고 나죽자''' 식의 사생결단이었고, 그때마다 비장의 수나 다름 없는 철포 사격으로 타개할 수 밖에 없었다. 초반에야 철포의 충격력으로 승리를 거듭하면서 쾌조의 진격이 이어졌지만 반복되는 공성전으로 인한 철환과 화약의 소모도 무시하기 힘들었다.] 거기다 겨울이 전보다 일찍 찾아오고 조선군 경기병대가 산골을 따라 기습을 감행하여 땔감의 공급을 차단하자 일본군의 상황은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손실분을 메꿔줄 일본의 보급 선단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고기밥이 되고 있었다. 이로써 일본군의 전략인 수륙병진에 차질이 생기고 전황은 고착되었다.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264915985|출처]] 일본군은 손자병법의 기본 방침대로 속전속결로 전쟁을 마칠 구상을 하고 여름에 대비한 보급품을 위주로 준비했는데, 날이 추워지자 이게 그대로 일본군의 발목을 잡았다. 특히 군량보급 문제가 심각하여 일본군은 뒤로 갈수록 [[노략질]]로 버티는 형편에 이르게 된다. 의병장 조경남이 쓴 문헌인 [[난중잡록]]에서는 임진왜란 시절 정인홍이 [[의병]]을 이끌고 싸운 활약상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김준민(金俊民)과 더불어 군사 2천 8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언(安彦)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여 다 섬멸했다고 한다. >적이 무계(茂溪)로부터 떠나서 성주로 향하는데 4백여 명이 왕래하는 적이 날마다 이러하였다. 소ㆍ말 백여 바리에 짐을 싣고 많은 깃발을 벌여 두어 마장에 연이어 뻗쳤다. 그중 혹은 '''금은의 가면(假面)을 쓰고 금은의 갑옷과 투구를 하였으며, 혹은 닭의 깃으로 만든 옷을 입고 포를 쏘며 칼을 휘두르니 사람마다 간담이 서늘했다.''' 이윽고 합천의 좌선봉 한 부대가 대응해 포를 쏘며 돌연히 일어나자, 적들이 행군하지 않고 길 왼편에 집결하여 고갯마루를 차단하여 실은 짐들을 중간에 두고 칼 쓰고 총 쏘는 군사를 앞뒤로 배열하였다. 김준민ㆍ정방준(鄭邦俊)이 활 쏘는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산을 내려가 일시에 발사하자, 적도 역시 고함을 치며 칼을 휘두르고 나왔다. '''맨 앞에 선 왜의 한 장수가 청흑색을 지닌 큰 준마를 탔는데, 말 위에서 닭의 털로 만든 옷을 입고 금으로 된 가면을 썼으며 붉은 자루로 된 큰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칼 쓰는 군사 수백이 그 뒤를 따라서 크게 외치며 돌격해 오니, 우리 군사는 일시에 놀라 퇴각하였다. 청흑색 말이 워낙 빨라서 날듯이 산으로 올라오자, 우리 군사들이 함께 [[쇠뇌]]를 쏘아서 그 말의 뒷다리를 맞혔다. 말이 곧 놀라 뛰어 오르는 바람에 왜장이 우리 진 앞에 떨어지자, 곧 그 말을 빼앗고 그 장수를 베니, 남은 적은 화살을 맞아 다리를 끌고 후퇴해 달아났다.''' 고령 군사는 남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오고, 성주 군사는 북쪽에서 기세를 타고 들어왔다. 김준민ㆍ정방준 등은 결사적으로 혼전을 벌이고 복병은 사방에서 일어나, 고함 소리가 골짜기를 진동하며 좌우의 산상에서는 화살이 비오듯 했다. 적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날 양으로 포수ㆍ검수(劍手)로써 뒤를 막게 하고 성현(星峴)을 향해 달아났는데, 정인홍이 산상에서 깃발을 휘두르며 싸움을 독려하여 적 한 놈도 빠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적은 군수품과 깃발들을 모두 버리고 달아났다. 가천 군사가 또 불의에 돌격해 나오니 적은 대항해 싸울 생각조차 못하였다. 여러 군대가 20여 리를 추격하며 죽였으므로,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지고 흐르는 피가 들판에 가득했다. 남은 적은 화살을 맞은 채 성현을 넘어 들어갔는데, 성현은 성주 읍과 가까운 곳이라 우리 진은 드디어 군사를 정돈해 돌아왔다. 이 싸움에 적의 한 진을 쾌히 무찔러서 여러 군이 활기를 띠었다. 다만 '''장령이 적의 목을 베어 오는 것을 귀히 여기지 않았으므로 머리 수효는 많지 않고, 빼앗은 것으로는 짐 싣는 말이 백 50여 필, 해와 달이 그려진 큰 기 3개, 그리고 철환(鐵丸)과 화약 등속이 매우 많았다. 빼앗은 준마는 이마 사이에 육각(肉角)이 있어 길이가 한 치 남짓하며 잘 달려 날아가는 것 같아서, 김준민은 매양 그 말을 타고 싸움에 나가 군 앞에 기세를 올렸다. '''가장 큰 칼은 버들 판자에 도금한 것이었다. >---- >난중잡록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 취미삼아 백성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인 껍데기만 왕자인 악한이었다.]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행태를 보인다.[* 여러 번 양위 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 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 왕이 몽진하자 분노한 민중이 선조의 도주행렬을 가로막는 등 반발했고,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한양에서 도주한 직후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 장예원[* 누구 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에서 불을 질러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기록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반론이 많은게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 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한편 [[의주군|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하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망명의사를 타진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 온 것을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 걸로 의심'''한 명에서는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했다. 수행원 100명은 지방 고을 수령 정도의 의전에 해당되는 인원이었고, 일국 군주의 수행원이라 하기에 턱없이 적었다. 사실상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국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단념했다. 명나라는 건국 초기 15만 병력으로 북원을 쓸어버리고, 베트남에 20만 군대를 보내 베트남 호 왕조를 무너트렸지만 유독 왜구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명나라는 이 시기 동남부 해안을 왜구들에게 유린당했다. 반면 [[대마도 정벌|200여년 전 일이긴 하지만 그런 왜구들의 소굴까지 쳐들어가서 박살낸 전력]]이 있는 데다 조선이 한때 만주를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예라는 이유로 전쟁에 능할 것이란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는 '''조선의 군대를 과대평가했고, 그런 조선에서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온다는 사실은 생각조차하지 못했다.''' 특히 조선과 일본은 교린 관계로 우호적이었으니, 명나라에서도 더욱 그 저의를 의심했다. 임진왜란 전 조선과 일본은 교역도 활발해서 삼포에 머무는 왜인들 숫자만 3000명이 넘었다.[* 이들 왜인들 우두머리는 수도 한양까지 상경해서 임금에게 문안 인사를 해야 했는데, 이들이 상경하기 위해 이용한 내륙 이동통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대로 일본군의 북상 통로가 됐다. 진격 속도가 빨랐던 데는 이런 원인들도 있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후 왜인들의 상경을 철저하게 금지시켰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불행하여 적세가 온 나라에 가득 찬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수상(水上)으로 가야 될 것입니다"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현재에는 다만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 바다로 나가는 것, 수상으로 가는 것 이 세 계책이 있을 뿐입니다. 중국에서는 장전보(長奠堡)에 머물러 있기만을 허락했을 뿐이니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은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의당 정주(定州)에 가서 사변의 추이를 살피든지 혹은 바다로 나가거나 수상으로 가든지 편의에 따라서 조처하는 것이 옳습니다"하고, >덕형은 아뢰기를, "수상은 위험할 듯하니 해로(海路)가 합당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바다로 나가려 하나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가는 데는 적도 갈 것이다"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강계는 길이 험하니 피란할 만합니다"하고, >항복은 아뢰기를, "이곳은 두 강(江)이 앞에 있으므로 중국군이 구원하면 적은 반드시 바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요동을 침범하려 하는데 어찌 소소한 원병(援兵)을 꺼리겠는가. 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반드시 간사한 계책이 있어서일 것이다"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인심이 차츰 안정되는 까닭은 대가(大駕)가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이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니다"하고, 또 아뢰기를, "이 도(道)의 인심이 크게 소란한 까닭은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간다는 것 때문입니다. 만일 장전(長奠)으로 간다면 그 중간의 길이 험하고 어려운 것은 돌아볼 겨를도 없겠지만 난에 임하여 강을 건너게 될 때 그곳의 인심 또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지나치다"하였다. >신잡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성중은 아뢰기를, "요동으로 건너간 뒤에 중국에서 적을 막지 못하여 그들과 화친(和親)한다면 뜻밖의 변고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하였다. >군신들이 차례로 나갔다. 신잡이 나가려 하자, 상이 만류하면서 이르기를, "경의 말과 같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하니, >신잡이 아뢰기를, "의당 전진하여 수습할 계책을 생각하셔야 합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의 형세로 보건대 정주(定州)에는 결코 갈 수가 없다"하였다. >---- >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당시 선조와 함께 의주까지 몽진했던 대신들도 하나같이 요동으로의 망명은 반대했는데, 강과 바다를 통한 피난 의견은 제시하면서도 중국 망명은 결사반대했다. 6월쯤에 처음 선조가 요동 망명을 이야기했을 때 신하들의 반응은 예의를 갖추어 달래는 느낌이었다면, 가면 갈수록 표현의 수위가 높아진다. 6월 13일 기사에서는 '요동으로 가려고 해도 중국에서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정도였다면, 8월에는 당시 선조와 동행한 대신 중 한명인 신잡이 국왕, 심지어 그 '''선조''' 앞에서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 보통의 남성)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협박에 가까운 말투로 반대했다. 즉 '요동으로 가면 더 이상 왕이 아니게 된다'라는 뜻이었다. 당시 사대부들이 국왕을 평소 대하는 태도를 생각해보면 평소 같았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수위의 발언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느 누구도 신잡의 발언이 심하다고 비판하지 않았으며, 말을 마치고 나가는 신하를 붙잡고 조언을 구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이때 [[여진족]]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천명제|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몇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한 것은 1613년이고 대칸의 직위에 오른 것, 즉 완전 평정이 끝난 것은 1616년이지만, 이때의 누르하치는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시 누르하치는 이미 [[이성량]] 등의 지원을 받아 거병한 지 10년이 넘은 다음으로, 1586년에 벌써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고 건주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건주 여진의 칸이 되었고, 건주 여진의 수도까지 새롭게 축성할 정도로 강한 세를 키운 상태였고, 여진족 중 가장 강한 라이벌이었던 예허부와는 사돈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어 사실상 여진족 최강자로서 주변에 대적할 자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지만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뭐로 보나 믿을수가 없는, 임진왜란 이전 최고 주적이었던 여진족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조선 조정이 분별이 없진 않았다(임란 와중에도 여진족 분파와 조선의 군사충돌은 지속되었다). 또한 실제로 여진족에 대한 위협은 자세한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정말 엄청나게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에 원병을 거절한다. 일본에는 마상에서 돌격하는 기병이 없으며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 이북에서 오랑캐들에게 발려서 진군을 그만 둔 기록이 있으니 원병이 왔다면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진족이 남의 나라 전쟁에 과연 제대로 싸우기는 했을지가 의문이니 선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누르하치 쪽에서도 조선에 파병을 하지 못한 게 신의 한수가 되었는데, 파병 제안 다음 해에 사돈 관계를 맺었던 하다 부족과 예허부 등이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누르하치의 뒤통수를 쳐서 각 여진 부락을 규합, 무려 9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주 여진을 침공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명나라는 이미 조선에 파병하고 [[벽제관 전투]]로 주력이 터진 상황이라 누르하치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1595년에 누르하치를 용호 장군으로 봉하며 지원해준다. 그리고 누르하치는 이 내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여진에서 부동의 No.1 세력이 되었고, 명나라는 전쟁이 끝나고 그제서야 누르하치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하였다.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임해군]]과 [[순화군]]은 현지에서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조선인]]의 밀고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을 시험 삼아 두만강 너머의 [[용정시]]에서 [[여진족]]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하여[* 이 근방에 청나라의 건국자인 [[누르하치]]가 있었다.]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 침공'''에 성공했지만[* 이 당시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질린 [[함경도]]의 조선인들도 일본군과 같이 함께 침공했다고 한다.] 이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하지만.. 이후 함경도에서 거병한 의병장 정문부와 벌인 북관대첩에서 패하고 함경도의 혹한으로 인한 동사, 아사까지 합쳐 근 9,000명에 이르는 심각한 타격을 입은 데다가 명군이 참전하면서 할 수 없이 철병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