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조정? === 임진왜란 때 정부 측(특히 '''[[선조(조선)|선조]]''')이 잘 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전쟁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 한국인의 인식은 상당히 나쁘다. 당시의 조정 인사들이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한 것은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 측에서도 나름대로 가능성을 인지하고 대비를 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비한 점이 적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별 볼일 없는 탁상공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도 조선 측에서 적군 4~5만 정도는 끄덕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는 부분이 있으며, 정말로 개전 후 7개월도 지나기 전에 일본군 4만 명 이상이 증발했다.] 찌질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윤두수]]도, 이순신을 험담한 것 때문에 폄하받으나 전시 조정을 이끄는 기둥으로 한 축을 담당하였다. 또 전쟁 초반에 선조와 조정이 북쪽으로 도망가고 중앙군이 패퇴하는 등 세가 크게 꺾였던 것은 사실이나, 초반의 충격 효과가 사라지고 첫번째 겨울이 올 즈음이 되어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군관들과 각 지방 수령들의 노력으로 조선의 군세가 어느정도 복구된 상황이었다. 의병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일어난 경우도 있지만 이런 병력 동원에 호응하여 결성된 경우도 많다. 이들 의병은 전쟁 초반이라면 모를까, 전열이 정비된 이후부터는 독자행동을 하지 않고 조선 조정의 통제에 따라 움직였다. 조선군은 이를 기반으로 지원 온 명군과 합세하여, 이미 1593년이면 일본군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하며 그들을 남부 해안 지역으로 도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당시 퇴각하던 일본군이 조선군과 명군의 공세를 맞아 입은 피해는 전근대의 전쟁임을 감안해도 매우 컸는데, 총병력 22만 중 절반인 대략 10만에 달하는 병력이 개전 1년 만에 사라졌으며[* 고니시 군의 피해가 가장 큰 이유는 개전 초부터 조선군과 명군이 고니시의 군대만 주로 상대했기 때문이다.] 나고야에 주둔하던 예비대가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바로 투입되었다.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183838556|1593년 6월 6일, 일본군에 총공세를 가하는 조선군]]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174771233|1592년 5월, 조선 중앙군 병력 현황]] *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kumi17cs1013&logNo=221264915985&referrerCode=0&searchKeyword=진주성|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입은 실제 피해에 대한 고찰]]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149776668|1593년 1월 11일 기준, 조선군 총 가용 병력 합계]]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065860208|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입은 인명피해에 대해서]]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027521761|사실 선조는 생각보다 전황을 못 읽는 양반은 아니었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