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 [[이이(조선)|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십만 양병설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주장''''이며, 후대에 '''이이의 제자들(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는 단 한 줄만 적혀있다.''' 기록을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남기는 조선을 고려하면, 실제로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했는지는 굉장히 미심쩍어진다. 때문에 서인들이 이이를 추앙시키기 위해 후대에 지어낸 이야기라는 주장도 있다. 더욱이 당시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군대 10만 이상을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에 조선이 정규군만 17만 이상을 동원한 걸 보면 10만 양병설의 진의가 더욱 미심쩍어진다. 현재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 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당시 [[니탕개]]는 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니탕개의 난|조선 변방을 침공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때 활약한 장수가 바로 탄금대의 신립으로 니탕개의 여진족을 물리치는데 일조해 선조의 사돈이 되기까지 한다. 다만 선조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과는 별개로 실제 신립의 작전 수행능력에는 현재에도 의문점을 가진 이들이 많다.]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은 [[이이(조선)]] 문서를 참조하기 바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