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동원된 조선군의 병력수? === [[동래성 전투]] 같은 전쟁 초기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전투들이나 [[행주 대첩]] 등 소수의 조선군이 다수의 적을 격파한 승전들 탓에 조선군이 일본군보다 압도적으로 소수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조선군의 절대적인 물량은 그렇게까지 적지 않았다. 임란 초기에 실록에 나오는 병력들을 전부 다 합치면 최소 10만 명이 넘는다. * 부산진, 동래성에서 격파된 조선군이 3,000명. [[상주 전투]]에서 손실 1,000명,[* 당시 순변사 [[이일]]이 이끌던 병력은 정예병이나 [[갑사(역사)|갑사]]가 아니라 급히 징집된 농민병들이다.] [[탄금대 전투]]에서 경군과 충청도 야전군 8,000명 이상. 이것만 해도 12,000명 이상. * 임진강 방어선에서 붕괴된 평안도,[* 압록강 4군에 주둔하던 정예 북방군] 황해도 조선군이 13,000명. 여기까지 25,000명 이상. * 용인 전투로 인해 박살난 경상 - 충청 - 전라 3도 근왕군이 50,000명 ~ 80,000명.[* 다만 삼도근왕군의 대다수는 정병들 뿐 아니라 개전 이후 징집된 농민병들도 많았다. 와키자카의 군대가 보병이라 추격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군의 90% 이상은 생존했다고 본다.] 50,000명 이상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약 80,000명 이상.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피난민들까지 전부 다 합쳐진 병력 수라고 한다. 여기서는 피난민들까지 전부 다 포함해서 130,000명이라고 기록.) * 평양 방어전에서 3,000명의 조선군 손실. 83,000명 이상. * 이순신이 이끈 3도 수군이 10,000명 이상. 여기까지 90,000명 이상. * 이후 강원도, 함경도[* 6진에 주둔하던 함경도 정예 병력이 해정창 전투에서 섬멸당한다. 하지만 이후 단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생존한 병력은 끊임없이 항전하였다.]에서 가토에게 박살난 조선군과 진주성을 비롯하여 아직 일본에게 점령되지 않고 남은 남부 지방. 주로,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그리고 선조의 호위 부대가 1만 이상. 대충 추려서 합쳐도 조선군은 100,000명 이상의 대군이 나온다. 그리고 실록에 나온 집계로는 임진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40,000명이 넘는다. 단, 누적으로 집계된 병력 수인지라 중복집계된 인원들이 포함되어 있다. 임진년 중반쯤 조선이 임진강 방어선에 13,000명을 투입하고, 후방에서 하삼도 근왕군 50,000명 ~ 80,000명이 북상하자 일본 측에선 크게 긴장했다고 한다. 이 당시엔 일본은 1군, 2군, 3군만 한양에 있고 나머지 병력들은 전부 후방에만 있어서 병력의 질과는 별개로 전선에서의 병력의 수는 되려 조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요격에는 성공했지만 애초에 농민들 긁어모아서 일단 북상하고 본 거고 또 와키자카에게 요격당하고 나서 전멸한 게 아니라 대부분 도망쳤기 때문에 조선 정규군에게 실질적으로 입힌 타격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인구가 더 적고 행정체계도 부실했고 흑사병으로 국가가 거의 무너져가던 고려말에도 홍건적과 맞서서 일시적으로나마 20만[* 다만 해당기록은 구체적인 수치가 나온것이 아니라 그냥 20만 홍건적이 침략해오자 20만 군사로 격퇴했다는식으로 간단히 서술되어 있어 과장된 수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을 동원했고 위화도 회군 당시에는 공요군이 5만을 동원했는데, 조선이 전국토가 전쟁터가 되는 전쟁이 터진 마당에 10만을 동원 못할 리는 없다.[* 동시기 인구가 1억이 넘던 인구대국 명나라가 장부상 총병력 300만과 대조적으로 실제로는 그 징집병조차 10~20만을 버거워하는 모습을 보인것을 감안하면 '''조선쪽은 인구에 비해 대군을 모은것이다.'''] 물론 조선측 기록에서도 "적의 향방에 따라 기회에 따라 진격하므로 주둔하거나 가는 곳을 확실하게 지적할 수 없으며 또한 군사의 수효도 첨가되거나 나뉘어져서 많고 적음이 일정하지 않다."라고 했다. 즉, 전근대의 한계상 정확한 집계는 매우 힘들었으니 당시 조선군의 총 병력 수는 어느 정도 중복집계 되거나 가감은 있을 수 있다는 점 참고.[* 이는 일본군도 마찬가지라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도 중복집계된 군사들 때문에 사료에 따라서는 20만, 30만 얘기까지 나온다. 심지어 풍신수길도 총동원령을 내렸을 때 일본군의 총 수효가 25만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15만여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실망했을 정도다.] 다만 농업국가에서 이 생산인구를 마냥 군대에 붙잡아둘 수는 없었고 또 용인 전투에서 보듯이 야전에서 제대로 활용하기에는 질적 수준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는 대부분의 조선군을 농사를 짓기 위해 고향으로 돌려보냈고 육군의 주력은 명군이 된다. 물론 일본군을 상대로 농민병으로 백병전을 벌일 수 없다는 점도 고려된 게 맞다.[* 의병들은 게릴라전을 하거나 홈그라운드에서 소부대로 붙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전과를 낸 것이다. 집단전에서 힘을 못 쓴 것이지 분대, 소대 정도로 붙으면 조선 농민 출신들이 일본군 상대로 근력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았다.][* 연구에 의해 밝혀졌듯이 동시기 조선인 남성 평균키는 164cm, 일본인 남성 평균키는 154cm로 거의 머리 하나 차이가 난다. 전근대 조선인의 체격은 동시기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큰 축에 속하며 당시의 경제활동 상 고강도의 노동을 수행할 상당 수준의 근력을 지녔을 것이다. 또 전문 무인의 시험 통과 기준 역시 매우 높았고 이로인해 전문적인 무인들의 경우 일본의 정예군에 밀리기는 커녕 오히려 앞서는 역량을 보여주는 기록이 적지않다.] 이 시기를 기준 잡으면 조선군이 압도적으로 소수인 것이 맞다. 당장 [[울산성 전투]]만 봐도 명군이 숫적으로 주력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