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일본]]에서의 평가 === 일반적으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집으로 일으킨 실책으로 취급하거나 가만 있던 이웃나라 조선과 명나라를 건드려서 고립을 자초한 부질없는 일로 기록을 한다. 명분상으로도 밀리는 침략자의 입장이며 조선 정복 및 대륙 진출이라는 본래의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패퇴하여 도요토미 정권의 붕괴만 초래한 패전이기에 긍정적으로 다루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임진왜란(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언급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일본은 패전으로 전국시대를 거치며 양성한 막강한 군대와 인재들을 대거 잃고 돌아와야만 했고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는 사죄를 받으러 온 조선의 사절단을 두고 해당 전란을 도요토미의 독단적인 횡포로 규탄하며 포로교환과 배상요구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오사카성]]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애를 패널로 분류해 소개하고 있는데 임진왜란에 대해서도 패널 하나를 할애하여 조선에서의 '''학살'''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어 설명에서도 '''genocide'''라고 표현하고 있는만큼 임진왜란을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한다 임진왜란 이후 도요토미 정권은 몰락의 길을 걸었으나 국가적으로는 각종 인적 물적 자원을 조선으로부터 약탈해 [[도자기]] 제조 기술이나 금속활자의 약탈, 성리학 유입과 같은 문화적인 수혜를 얻었다. 또한 7세기 [[백강 전투]]의 패배 이후 섬에서 웅크려 살던 일본이 천여년만에 대규모 정규군을 바다 너머로 투입시켜 동아시아의 발전한 문명국인 조선 및 패권국 [[명나라]]와 전쟁을 치르면서 국제적인 존재감을 높였다. 그와 동시에 일본이 더 이상 동방의 일개 변방국이 아니라 원정으로 해상 다자전을 치르는 것이 가능한 국력을 가진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했음을 각인시켰다.[* 역사 학자에 따라서는 해당 전쟁을 일본의 제국주의를 수 백년 뒤로 늦춘 전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즉 한국이 일본 침략 방어에 실패했다면 일본의 팽창주의가 더욱 앞당겨졌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실제 근대 역사에 있어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구상하던 중국 진출, 인도 침략, 동남아시아 정복은 [[대한제국]]의 병합으로 본격화된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교역으로 이익을 얻고 있던 세력이 명나라 정복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과소평가하고 조선 조정과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의 의사소통을 왜곡함으로써 전쟁을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또한 일본 상인 세력들은 해당 전쟁이 교역에 방해가 될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고 서술한다. 조선에서 벌어진 전투 자체는 소략하게 다루지만 왜란이 초래한 일본 정치의 혼란상이 잘 드러난다.[* 해당 작품은 도요토미 사후 일본의 후계 구도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상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정권을 타도한 당대 [[에도 시대]] 일본 식자층은 임진왜란을 보다 솔직하게 비판하고 있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실학자)|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 일본의 고문체는 조선 / 중국의 문체와 한자의 배열이 다르고 일본식 구결(가나)이 섞이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이해가 굉장히 힘든데, 이익은 이 글을 한 자 한 자 다 따져 보면서 글자를 재배열해서 번역했다.]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 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 일본 고미즈노오(後水尾) 덴노의 연호. 1615년 ~ 1624년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겐나'.]의 전역[* 겐나의 역, 즉 1615년의 오사카 공방전을 말한다.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킨 전투이다. 덧붙여 원화라는 연호는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에 변경된 연호인데, 일본에서 완전히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바꾼 연호다. 그래서 전국 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원화언무(元和偃武, 겐나엔부)'라는 말이 있다.]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 >----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일본지세변급 격조선론 [[강항]]의 [[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일본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이 사람 역시 임진왜란이 명백히 일본이 침략자였다는 점은 명확히 한다. 다만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원인에 대해 주장한 내용이 색다른 것.]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 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나라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본인이 명나라를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합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반역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해석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