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조선의 전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진왜란 전후 인구 변화.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임진왜란 전후 토지 변화.jpg|width=100%]]}}} || || {{{-1 '''▲ 전후 인구 변화'''}}} || {{{-1 '''▲ 전후 토지 변화'''}}} || 조선은 승전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문화와 인적 자원도 잃었다. 전쟁은 조선의 경제와 사회를 뒤바꾼 계기이기도 했다. 전쟁에서 패한 도요토미 정권 일본도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고 결국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져 나라의 주인조차 바뀌었다는 점에서 실속없는 전쟁이 되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선을 약탈함으로써 얻었던 자원으로 상당한 경제적, 문화적 수혜를 얻었다. 반면 조선은 국가의 멸망을 막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폐허가 된 국토만이 남은 상처 뿐인 승리였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기존 제도를 개혁하게 되었고, 기존의 사회와 문화가 새롭게 뒤바뀌는 전환점이 되었다. 당대 조선보다 국력이 훨씬 강했음은 물론 세계적인 관점에서도 초강대국에 가까웠던 명나라조차 [[척계광]] 이전까지는 일본 정규군도 아닌 왜구들을 상대로 제2의 도시인 난징까지 위협받았을 정도로 고전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달리 생각한다면 조선이 100년 가까이 전국시대라는 실전 경험을 겪은 총력전의 일본군을 상대로 방어에 성공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징비록]]과 선조수정실록에서는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 창덕궁과 창경궁은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 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 [[종묘]]와 [[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모두 소실되었다고 기록한다. [[불국사]] 와 일부 사찰들도 일본군의 약탈당하거나 불에 타버렸다. 약탈된 문화재들은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혹은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고려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그 외의 관련 사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선조실록은 임진왜란 이전 기록이 매우 소략하게 되었으며 [[승정원일기]]와 [[비변사등록]]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 정확히는 승정원일기는 인조 1년(1623), 비변사등록은 광해군 9년(1617)부터.]만 남아 있다. 조선의 경제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농업 및 산업 기반이 대거 파괴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농업을 제 1의 산업으로 치는 농경국가에서 이정도면 아예 파산상태나 다름없는 수준이다. 이는 농토를 조사할 행정력이 일시적으로 붕괴한 것도 크다.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 등의 천재가 겹치긴 했지만 전후 복구가 이어져 이전의 경제력을 급속도로 회복한다. 대략 17세기 초중반에 조선은 전쟁 이전의 경제력을 넘어섰다.[[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879396|#]]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국제전쟁이라는 중요한 성격도 띈다. 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상호 외교 관계 또한 급격하게 뒤바뀌었다. 임진왜란의 여파는 곧 [[만주족]]의 흥기로 이어졌다. 만주족은 급속히 강성해져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을 명나라로부터 분리시키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임진왜란은 중국에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가 들어서게 만들었고, 조선의 대외관계도 뒤바꾸는 나비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조선은 그 폐쇄적인 지형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의 교류 덕분에 임란 이전에 비해 [[서양]]과 더 빈번하게 접촉한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조선 내부에 서양식 과학이 소개되고, 청나라를 배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으며, 실학자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청-일 직접 교역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양국 간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상당한 무역 흑자를 누리게 된다.[* 당시의 주요 상인들은 자본의 몇 곱절에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고, 이것은 독점적 민간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이후 농업 측면에서도 전란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농업 생산량이 급증한다.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재정비되기도 했다. 군사력의 경우 크게 약화된 것은 아니며 주적인 여진족들을 정벌할 수준의 군사력은 남아 있었는지라 왜란 직후 여진정벌을 나간 기록이 있는데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이 이끄는 5천 명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벌군이 출병하여 명천현감(明川縣監) 이괄(李适)·회령부사(會寧府使) 조경(趙儆)·길주목사(吉州牧使) 양집(梁諿)이 각각 부대를 이끌고 좌위, 중위, 우위의 3로로 나누어 진격해서 여진족 가옥 1천여 채를 불태우고 적 110명을 참수했다. 이번 원정에서 조선군 전사자는 7명에 불과했다.[* 전 국토가 쑥대밭이 된 직후에도 수천의 기병으로 원정을 나가는것을 보면 조선의 국력이 그리 허약하지 않았다는것을 알 수 있다.단지 왜군이 너무 강했을 뿐이다.] 전후 [[조선]]에서는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끝나면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을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전쟁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장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노량 해전|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 전쟁 후 선정된 선무일등공신 3명은 모두 당시에 사망한 인물들이다.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전사, 권율은 전란 종료 후 1년이 지나 사망하며, 원균 역시 죽었다고 공표된 인물이다.] 이순신과 김시민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 [[무신정권]]이 아니라 [[이성계]]와 [[최영]] 등등을 말한다.]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과거에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없다는 편견이 있었다. 전쟁의 피해를 져야할 국왕과 양반 세력이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고,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겪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 이와 비슷한 사례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영국이 있다. 영국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였던 인도까지 독립을 승인해주면서까지 전후복구에 총력을 들여야만 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이후 최강대국의 자리를 미국에 빼앗긴 영국은 계속해서 국력의 하락세를 그리며 꾸준히 내리막을 걷게되며, 80년대 마거릿 대처 시대 이후 어느 정도 위신을 높이는가 싶더니 다시 브렉시트 사태 이후로 국력이 더욱 쪼그라드는 처지가 되었다. 영국이라는 나라가 그동안 수많은 식민지를 개척하며 이룩한 그 막강한 국력을 대부분 잃어버렸음에도, 입헌군주제에 기초한 민주적 정치시스템을 근간으로 하는 유럽의 강국이라는 지위만은 지켜낸 것이다.] 현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겪고도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보다 주목하는 추세다. 과거 조선 세조가 심어놓은 사회적 모순이 연산군과 중종 시대를 거치면서 절정에 이르러 16세기 조선의 사회는 천인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던 노비 국가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개혁할 의지를 보였던 당대 인사도 조광조와 이이 정도밖에 없었다. 이런 국가 체제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인구의 감소와 신분을 규정하던 노비 문서 등이 소실되면서 결과적으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된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농노 수가 감소하자 이후 농노에 대한 지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다만 전란 때문에 국토가 황폐화된 바람에 생계를 이어가기 힘들어진 양민들이 양반들에게 생계를 보장받는 대가로 양반들의 사노비가 되는 협호현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 17세기에 노비 비율이 전체 인구의 3~40%에 이르렀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이 해석대로라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보통 사회를 노비 국가로 만든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실질적으로 15~16세기 호적자료는 제대로 남아있는 것이 없어 이 시기의 노비비율은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노비비율을 높인 사건인지 낮춘 사건인지 의견이 서로 갈릴 수 밖에 없다. 승병들이 많이 활약한 전쟁이기도 해서 사대부들이 이들을 보고 스스로 반성하는 기록도 남겼다.[*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조선시대의 승려들은 '''불교로 개종하여 출가를 하는 그 순간 [[천민]]으로 떨어질 정도로''' 경멸당했다.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을 실록에 실었다.] 사명대사는 일본인들이 승려와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전후 사실상의 외교관으로 활동하였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인 광해군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승병들의 전공에 대한 대가로 조정 측에서는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을 제공하였는데 덕분에 ‘전장’이 되어버려 불타버린 사찰들을 급속히 복구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은 숭유억불 기조 하의 조선 불교가 이전보다는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