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일본 === 조선이 입은 피해에만 주목하는 역사계의 관행과 달리 일본 입장에서도 이 전쟁의 피해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막대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은 채 패배하고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정권은 애초부터 명분 없는 전란을 일으켜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그를 따르던 수많은 영주들의 원성이 높았다. 긴 전란으로 인해 착실하게 쌓아온 막대한 병력과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후유증이 심했다.[* 일례로, 이순신에게 주력 함대 대부분 잃었고, 이를 운용하던 숙달된 선원들을 상실하면서 [[왜구]] 등을 통해 대대로 확보해온 항해술과 해상 전투 기술이 실전되었다. 사실 전쟁이 나면 가장 직접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군의 실질적인 운용을 책임지는 중간지휘관들, 장교단의 상실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일본군은 수전 조련에 능한 우수한 장교단을 거의 다 잃어버렸고, 훗날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의 해군 제도를 받아들여 [[일본 제국 해군]]을 건설하기 전까지의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도요토미 시대만큼의 해상 전력을 갖지 못했다.''' 물론 여기에는 에도 막부의 쇄국 정책으로 대외 진출용 선박의 건조가 대부분 금지된 것도 한몫했다.] 당연히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일본 서쪽의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렸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이 떨어지고 병력은 더 많이 보냈으며, 그리고 패배하기까지 한 일본이 아무 문제가 없었을 리가 없다.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 등을 맡은 인부들도 조선땅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陣夫라고 불렀다)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졌다. [[1594년]]에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되었다. 일본 측 유력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 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 일본도 중앙 정부가 그나마 강력하던 [[헤이안 시대]] 이전에는 육국사로 불리는 정사 역사서가 있지만 전국 시대 무렵에는 중앙 정부가 이미 무력해졌다.]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지라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가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직접적으로 집계하기가 힘들다. 임진왜란이 일본에게 부를 가져다 준 실리를 얻은 전쟁이라는 일반적인 통설과 달리 일본 역시 명분과 물질 모두 큰 타격을 입었다. '''실리 이전에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이라는 국가적 위신이 걸린 상징적인 대외사업에서 실패하고, 더욱 중요한 명분을 잃은 것이다!''' 실리를 얻었으므로 일본이 이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국가의 위신을 무시한 정신승리에 불과하며, 이는 일본의 이후 행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주장대로라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을 위시한 연합군에게 참패하고, 원폭까지 당해 일왕이 무조건 항복하는 수모를 당했지만, 전후 빠른 복구로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으니 결국 일본이 이겼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억지이다. 국력의 신장 이전에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오명을 남긴 것이다.] 무려 수십만에 달하는 일본의 총력을 들여 진행한 대대적인 원정을 당대부터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을 상세히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 스스로 이를 수치로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임진왜란은 일본에게 있어 곧 트라우마이고, 지우고 싶은 치욕이었던 것이다. 또한 임진왜란에 참전한 병사들과 장수들의 숫자와 질을 생각하면 일본이 후에 메이지 유신 이후 창설한 근대화된 일본군이 나오기 전까지 최대이자 최강의 원정군이었고, 그런 이들이 목숨만 건진 채 돌아왔다는 것은 100년 전국시대를 거친 강군, 무사의 나라 일본의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전란을 주도한 무리의 후손들은 300여년 뒤에 다시 한 번 더 팽창욕을 불태우며 대대적인 전란을 일으켰으나 이번엔 무조건 항복이라는 훨씬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관계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 보내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조선은 일본에 문위행과 [[조선 통신사]]를, 일본은 차왜와 국왕사를 파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일본은 조선과 달리 국토가 황폐화되지 않았기에 전란으로 입은 피해는 오래가지 않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정권을 빼앗겨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도요토미 개인의 자업자득일 뿐이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세키가하라 전투|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국력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존재감을 높였다. 이후 260년간 [[에도 시대]]에 발전을 거듭하여 [[겐로쿠]] [[시대]] 의 경제적 호황을 누렸으니 패전과 별개로 국가적 차원에서 이득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도리어 국력을 크게 신장한 사례는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원정과 대진국 정벌에서 실패한 당나라가 그랬고,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나중에 소련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워 2세계의 맹주가 되었고, 1차세계 대전과 2차 세계대전에 패배한 독일도 전쟁복구 이후에 유럽에서 손꼽히는 대국으로 금새 입지를 회복하였다.] 이는 또 하나의 거대 군벌이었던 도쿠가와 세력이 계속 힘을 키우고 있었던 탓이 크다. 경제적 측면에서 상당한 비약도 존재했는데, 특히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재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 한국에서는 [[실학]]의 영향으로 청나라가 개방되고 진보적인 국가였다는 인식이 퍼져 있는데, 청나라는 중국 왕조를 통틀어서도 손꼽히게 폐쇄적인 무역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던 왕조이다. 물론, 실학자들이 강희-옹정-건륭 초기의 최전성기를 주목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청나라의 발전상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청나라는 폐쇄무역을 했다고는해도, 신대륙의 막대한 은이 유입되며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국이었다. 무력으로 러시아를 제압한 [[나선정벌]]과 [[준가르 토벌]]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홍루몽]] 등의 뛰어난 서민문학이 널리 퍼질 정도로 인문예술도 수준급이었다.]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