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정착, 또는 귀환한 경우 ====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 >---- >‘朝鮮日日記’, 종군 승려 케이넨. 1597년 11월 19일 일본군은 전쟁 중 수많은 조선인을 잡아 일본으로 끌고 갔으며 노예 시장에 팔아 넘겼다. 특히 나가사키의 노예 상인들은 인신매매를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 조선은 "쇄환사"를 통해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조선)|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 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 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 제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한 병합 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마치역|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들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일본인으로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존재했다. [[http://blog.hankyung.com/raj99/294850|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조선에서 귀환 포로들을 잘 대해준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신세가 고국으로 돌아갈 때가 비참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연려실기술]] 17권에 보면[[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Vxx2&articleno=4286&categoryId=0®dt=20111108034657|#]] 1605년에 승려 유정이 데리고 온 귀환 포로 3천 명은 통제사 이경준이 맡았고 해군 선장들에게 일임했는데 선장들이 출생한 곳을 물어도 어릴 때 포로가 되어서 본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모두 자기의 종이라 칭하고, 아름다운 여자는 그 남편을 묶어서 바다에 던지고 마음대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에 강훙중이 포로 146명을 데려왔지만 부둣가에 방치되어 마찬가지 대접을 받았다. 이런 추태가 소문으로 퍼지자 이문창이란 조선인이 본국으로 돌아가봐야 좋을게 없다는 말을 퍼트려 송환을 기피하는 조선인들이 많아져 더욱더 송환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 당시 일본에 끌러왔던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에서 농노로 정착했던 부류가 많은데 고국말도 잊은지 오래된 상황에서 가고 싶은 생각이 없던 것은 당연한 생각이기도 했다. 그래도 돌아가려는 포로들은 일본에서 경제적으로 고생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또 다른 중요한 이유로는 [[다도]] 문화가 발달하여 훌륭한 도자기를 얻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이삼평]] 등 [[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이 있다.[[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09344.html|#]]. 다만 도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끌고 간 도공들 중에서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서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했고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다.[[https://blog.naver.com/arandel/221877091088|일본에서 굶어죽은 조선인 도공들]] 그 외에도 두부 장인 [[아키츠키 타네노부]] 등이 일본에 정착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