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노예화 ==== 물론 상술한 [[도공]] 같은 [[기술자]], 또는 [[다이묘]]의 참모진이나 [[일본]] [[학자]]들에게 초빙된 일부 [[유학자]]들을 제외한 대다수 [[조선인]] [[포로]]의 대우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최대 70% 정도의 악명높은 [[세율]][* 이 정신나간 세율 때문에 [[마비키]]라는 [[악습]]도 생겨날 정도였다.] 을 기록하던 [[에도 막부|막번체제]] 하에서 평범한 조선인 포로가 일본에서 윤택한 삶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일본과 교류하던 [[유럽]]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려나갔다. [[센고쿠 시대|전국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백 년째 내전이 지속되는 상황 속에 딱히 내다팔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막대한 생산량을 자랑하던 [[은광]]은 대영주들의 차지였고, [[도자기]] [[산업]]의 경우에는 임란 이후 조선인 도공들이 발전시키기 전까지는 일천했다.] 상대 [[번국|번]]과 전쟁을 벌여 얻은 포로나 [[천민]]들, 옆 동네 [[주민]]들, 또는 [[왜구]]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유럽 상인에게 노예로 내다 팔고 그 대가로 [[화약]]과 [[조총]]을 사오곤 했다. 이들 일본인 노예들의 몸값은 [[서아프리카]] [[흑인]]의 절반 이하였고, 수십만 명이 [[세계]] 각지로 팔려나갔다. 이 [[노예무역]]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상인과 일본의 왜구 및 지방 다이묘들이었는데, 이들의 노예무역은 안그래도 전쟁 때문에 손실이 극심한 [[일본/인구|일본의 인구]] 유출을 가속화시키는 한편, 지방 번국들의 무장을 강화하고 전쟁을 격화시켰다. 유럽에 상대 부족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 [[군자금]]과 [[머스킷]]을 구매하던 당대 서아프리카 부족 국가들과 상황이 비슷했던 것이다. [[일본인|자국민]]도 잡아다 팔아치우는 상황에 조선인 포로라고 예외는 없어서, 이들은 당시 최고의 해상 유통망으로 전성기를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일본 학자들의 경우 해외로 팔려간 조선인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당시 일본에 체류하던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혐오하며 노예 상인들에게 [[파문]]하겠다고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에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에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고아(인도)|인도 고아]]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파일:external/dk.breaknews.com/2014031912366721.jpg]]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대공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701년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소설가 오세영이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쓴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흥포(興浦)'라는 명나라 상인이 그림의 실제 모델 혹은 모티브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그림 속 동양인과 조선인 노예의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예무역 문제는 근본적으로 인구 유출과 지방 영주의 군사력 강화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일개 다이묘가 아닌 통일 일본의 위정자들에게는 전혀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7년]] 노예무역의 실상을 본 후 [[가톨릭]]과 유럽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던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고 노예 매매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수십 년간 이어지던 노예무역은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히데요시의 금지령이 내려졌음에도 조선인 노예가 팔려나간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노예무역은 후에 [[에도 막부]]가 [[키리시탄]] 공동체와 다이묘들을 군사적으로 토벌하거나 [[가이에키]]시키고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서양 상인들을 다 쫒아버린 뒤에서야 사라졌다. 물론 조선인 포로를 겨냥했다기 보다는 일본 사람이 노예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다. 후에 서양 국가 중 막부의 유일한 무역 파트너가 된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는, 통상을 허가받기에 앞서서 가톨릭과 자신들이 믿는 [[개신교]] 사이의 [[종교 개혁|적대적인 관계]]와 차이를 열심히 설명해야 했다. 그리고 [[데지마]]를 벗어나지 않을 것과 포교하지 않겠다는 약조를 맺은 뒤 막부의 가톨릭 탄압에 동참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전부 거치고 나서야 제한적인 무역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조선에 표류한 [[박연(조선귀화인)|박연]]이 일본으로 갈 수 없던 이유도, 조선이 일본으로 보내주려 했던 것을 일본이 서양 키리시탄이라며 거부해서였다고. 오랜 포교 역사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기독교인|기독교 신자]]가 거의 없는 이유, 그리고 근세 일본이 [[쇄국]]을 고수했던 이유 중에는 이런 [[노예 무역]]과 얽힌 역사적인 영향이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