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일본의 내부 사정 ==== ||[[파일:external/www.dongponews.net/21941_14034_2919.jpg|width=100%]]|| || ▲ '조선정벌대평정도'[* 가운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쪽으로 조선 침공에 참여한 다이묘들이다.] || 히데요시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의 측근들도 조선 정벌의 성공 가능성에는 의문을 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한 주요 일본군 무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히데요시만큼은 늙은 모친 [[오만도코로]]에게 "올해 가을은 [[자금성|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일본 역사를 통틀어 히데요시만큼 밑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가 성공을 거둔 사례가 없었던 만큼, 그의 자신감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정도로 커졌던 것이다.[* 당장 선조에게 보낸 위의 서신 내용을 봐도 망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허무맹랑하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이며, 성공만 한다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 진압[* 당시 난부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의 후계 자리를 놓고 양자인 난부 노부나오와 사위인 코노헤 마사자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명 코노헤의 난.]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 체제의 안정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조선 침공을 계획한 것으로 이는 소속 무장이나 동맹 다이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다. 당시 히데요시 다음가는 대영주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의 병력은 파병되지 않았다. 사실 히데요시가 요청하기는 했는데, 전쟁에 나가봐야 좋을게 없다는 걸 아는 이에야스가 여러 핑계를 대면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참전을 강요하지 못했던 것은 이에야스의 세력이 매우 강성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에 고개를 숙였던 것은 외교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지 힘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오다 노부카츠]]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이에야스군은 [[산보시]]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웠던 히데요시 군에게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에서 대승했었다. 당시 히데요시 측은 [[이케다 츠네오키]]가 전사할 정도로 참패당했다. 그런데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지능이 모자라다는 평가까지 받은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 편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히데요시 측에서 이에야스에게 자신의 [[아사히히메|여동생]]과 이에야스를 혼인시키고 자기 어머니 [[오만도코로]]를 인질로 보내가며 화친한 것이다. '''즉,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도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었다.''' 그럼에도 히데요시가 이에야스파를 억지로 임란에 참전시키고자 했다면 조선 정벌은 커녕 일본 내전이 다시 일어났을 수도 있다. 즉 애초에 병력요청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여하간 임진왜란에 참가하지 않은 덕분에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을 히데요시의 탓으로 돌려 다시 조선과 화친을 맺을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만약 도쿠가와 이에야스까지 임진왜란에 참전했더라면 조선과 명나라의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다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참전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내심으로는 참전을 바라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만약 조선과 명을 정벌했는데 도쿠가와가 그 지분을 요구하면 난처해지기 때문. 결과적으로는 독장수 셈이긴 했지만 말이다.] [[조선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히젠 나고야성|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혼슈의 대도시 나고야와는 다른, [[사가현]]의 나고야다. 규슈 섬 북단으로 [[후쿠오카]]에 가깝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2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 성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만 ~ 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짙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 진주 박물관, 장원철 - 오만 역 <[[루이스 프로이스|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 참고로 조선 측 전쟁 참전 병력수는 60,000여 명, 재란 참전 병력수는 37,600여 명이었다.[*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 아래 편제를 보면 서 일본 내의 유력 가문의 다이묘들은 거진 다 참가했으나 동 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서 일본의 주요 다이묘는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타 히데이에|우키타]] 가문, [[규슈]]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쵸소카베]] 가문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반면에 동 일본의 유력 다이묘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대부분 빠졌다. 다만 초기 15만 대군에 포함 안되었을 뿐이지, 잠깐 짬을 내서 참전하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게카츠]], 난부 노부나오 등은 이후에 잠깐씩이나마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우에스기 카케카츠의 경우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3개월간 전선 감독만 하고 돌아온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 가모 히데아키의 아버지다.]는 병 때문에 빠졌고 전쟁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 일본의 [[모리 데루모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 도쿠가와 직할령은 말 그대로 직할령 400만 석,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의 300만 석으로 총 700만 석이었으나 그 밑의 다이묘들은 끽해야 모리 가문의 [[조슈]], [[시마즈]] 가문의 [[사쓰마]], 마에다, 다테 가문 정도를 제하면 몇 십만 석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4만 석 가량에 더해 광산, 무역 수입을 얻었다. 5대로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능가하는 260만 석을 웃도는 석고를 보유했으며 특히 그 둘의 격차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보다 컸다. 또한 5대로를 포함해 어지간한 메이저 다이묘들은 100만 석 이상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마디로 도쿠가와도 도요토미에게 개길 정도의 힘을 갖추지 못했으나 도요토미 역시 도쿠가와를 밟을 정도의 힘은 없었다는 것. 애시당초 도쿠가와도 관동을 경영하느라 힘을 쓸 수 없었고 도요토미는 직할령만 224만 석일 뿐 하타모토의 석고까지 계산한 것도 아니었다.]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실제로 일본내 석고량 10대 다이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 빼고 다 참전 했다. 다만 대부분의 유력 무장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전한 모리 가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한두달 조선에 들렸다 돌아간 수준. 즉 서부지역의 중소규모 다이묘들만 참전 하였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와 히데나가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의 신분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본인과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휘하의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 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 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 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조카이다.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가타케 전투로 처음 영지가 주어질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 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의 가신 중 유력했던 이가 바로 임진왜란 초기에는 수군 지휘관이었다가 정유재란 당시에 일본 수군 총사령관으로서 활약한 [[도도 다카토라]]이다.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각 군에서 제일 크고 강력한 무장이기보다는, 각군을 통제하기 위해 히데요시와 그 동생 히데나가의 심복들을 한명씩 배치하여 대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인 [[고니시 류사]]와 [[구로다 요시타카]]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고, 임진왜란 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4군 대장 [[모리 카츠노부]]는 주고쿠의 모리 가문과는 전혀 관계 없이 우연히 성이 같은[* 일본어로는 모리 카츠노부의 모리는 짧게, 주고쿠의 모리 가문은 모우리와 같이 길게 발음하므로 차이가 난다.] 사람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고참 가신이다. 8군 대장이자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는 비젠의 효웅으로 유명했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로 가문빨은 상당하긴 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로 갓 20세의 어린 나이로 실제 총 사령관 역할은 커녕 자신의 부대 지휘도 고참 가신들이 대신 해주었다. 9군 대장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도요토미(하시바)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 그나마 6군 대장 [[코바야카와 타카카게]](33만 석), 7군 대장 [[모리 데루모토]](120만 석, 실지휘는 삼촌이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형인 [[킷카와 모토하루]]의 삼남 [[킷카와 히로이에]]) 정도가 거대 가문 출신의 다이묘이다. 이 둘은 숙질 관계이며 이른바 [[오대로]]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일본 전체의 중신들이다.[* 참고로 다른 오대로의 경우 우키타 히데이에(57만석)는 총사령관 겸 8군 대장, [[우에스기 카게카츠]](120만 석)는 잠깐 참여함, 도쿠가와 이에야스(256만석)와 마에다 토시이에(100만석)는 참전하지 않았다.] 즉, 1~5군 대장들은 히데요시의 젊은 심복(4군대장만 고참 심복)이며 대부분 임진왜란 직전에 다이묘가 됨. 6~7군 대장은 히데요시와 좋은 관계인 모리가문. 8~9군 대장은 히데요시의 양자이다. 이런 시종 출신 무장들의 참여 때문에 임진왜란이 2선급 지휘관들만 참여한 전쟁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후대에 가토 기요마사 등의 명성 등을 고려해보면 참전시 군공이 적을 뿐이지 역량이 충분한 뛰어난 장수들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참전한 병사들도 오랜 전란으로 인해 전투경험이 풍부한 일본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힐만한 정예병들이었다. 당장 일본과 맞붙은 명나라의 기록을 보더라도 일본군의 용맹함에 대해 고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정유재란]]의 8명의 대장들은 심복들이 줄고, 유명 무장들이 전면 배치 되어 서일본의 올스타들이 전원 출전하였다(1~3, 8군 대장 동일. 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5군 [[시마즈 요시히로]], 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단, 동일본의 무장은 여전히 불참.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 지휘관들을 꽤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는데, 일본측 사료에 남은 조선군과 명나라 장수들보다 훨씬 정확하다. 개전한지 반 년도 안되는 시점에 이미 주요 일본측 지휘관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평수길]]은 [[대마주|대마도]]에 와 머물러 있고, [[기후 현|기집(岐集)]] 재상 평수충(平秀忠. 일본어로 읽으면 '다이라 히데타다'가 되는데, '기집 재상'은 [[도요토미 히데카츠]]의 별명이므로 오기인 듯)이란 자는 처음 경상도에 있었는데 전사하였으며, [[가토 기요마사|가등(加藤)]] [[중세 일본의 관위와 역직#s-2.4.6|주계두(主計頭)]]란 자는 함경도에 있으며, [[구로다 나가마사|흑전(黑田)]] 갑비수(甲斐守, [[카이#s-3.1|갑비]]의 태수라는 뜻)란 자는 황해도에 있으며, [[하치스카 이에마사|봉두하(峰頭賀)]] 하파수(河波守, [[아와#s-1|하파]]의 태수)란 자는 충청도에 있으며,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소조천융경(小早川隆景)]]이란 자는 개성부에 있으며, [[모리 카츠노부|삼(森)]]·[[이키|일기(壹岐)]][* 마쓰라 노부자네(松浦信實)가 다스리던 곳이다.]·[[시마즈 요시히로|도진(島津)]]이란 자는 강원도에 있으며, [[모리 데루모토|모리요원(毛利耀元)]]이란 자는 전라도에 있으며, 우시(羽柴) [[오카야마 현|비전(備前)]] 재상 [[우키타 히데이에|평수가(平秀家)]][* 조선왕조실록에는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도 쓰이지만 평수가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조선이 '비전 재상'이라는 별명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우시(羽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성씨인 하시바(羽柴)를 의미하며, 1587년 우키타 히데이에가 하시바 성씨를 하사받은 것을 의미한다.]란 자는 대장(大將)으로 경성에 있는데, 목책을 설치하고 그 안에다 겹으로 담장을 치고 그 가운데는 누(樓)를 지어놓았다. 우리 백성들을 모두 목책 밖으로 내보내고서 자기 무리들만 살고 있다. > >또 소서(少西) 섭진수(攝津守, [[효고 현|섭진]]의 태수) [[고니시 유키나가|평행장(平行長)]]·[[소 요시토시|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 야나가와 시게노부(柳川調信)]·[[히라도|평호(平戶)]] 도주(島主)[*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鎭信). 이키에 동생인 마쓰라 노부자네를 보내 다스리게 한 사람이다.]란 자는 모두 평안도를 주관하면서 [[평양부|평양]]에 있는데 거느린 적병의 수가 많고 가장 정예하여 여러 왜적들이 따르지 못하므로 선봉을 꺾거나 진을 함락할 때는 모두 이 진(陣)을 힘입고 있다. 지금 만약 아군이 먼저 평양을 꺾는다면 파죽(破竹)의 형세일 것이다. 왜승 [[게이테츠 겐소|현소(玄蘇)]]란 자는 [[평양부|평양]]에서 종군하고 있는데, 별다른 기술은 없고 중국의 문자를 약간 해득하기 때문에 항상 군중에 있게 한다. >----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 11월 11일 정묘 6번째 기사 또한 원정군 총대장이 [[우키타 히데이에]]고 부사령관이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선봉(先鋒) 소서행장(小西行長)·대총병(大摠兵)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부총병(副摠兵) 삼성(三盛)'(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0일 임술 8번째 기사)] 물론, 조선 조정에서도 우키타 히데이에가 총대장이라도 별 실권없는 바지사장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서 우키타를 상대로 교섭을 시도하지는 않고 고니시 유키나가나 가토 기요마사를 상대로 직접 교섭했다. 참고로 조선 조정은 천황과 쇼군(관백) 및 각 [[다이묘]][* 조선에선 이를 거추, 즉 대추장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조선이랑 교류했던 대표적 거추는 [[오우치]] 씨지만 이 당시엔 이미 수십년 전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망했다.]들과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미 [[신숙주]]가 쓴 [[해동제국기]]에서 [[천황]]과 [[쇼군]]의 관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으며[* 해동제국기의 목차 중 일본국기(日本國紀)에서 천황대서(天皇代序), 국왕대서(國王代序)로 천황과 일본국왕(쇼군)을 분명히 따로 기록했다. 해동제국기는 조선에서 일본에 관해 궁금할때마다 찾아보는 기본 자료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여러번 언급된다.] '천황은 국정과 외교 관계에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 임진왜란 개전 전에 통신사가 받아온 도요토미의 답서에서 히데요시 본인이 관백이라 칭했으니 조선 조정에서도 도요토미의 공식 호칭을 관백으로 불렀는데 관백(関白)은 '맡아 두고(関) 아뢴다(白)'는 뜻으로, 여기서는 물론 국정을 맡아서 천황에게 아뢰는 직책을 의미한다. [[전한]]의 권신 [[곽광]]에게서 유래한 명칭이니, [[한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관백이 신하의 칭호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