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반론 ===== 그러나, 이러한 설은 천하인이 된 히데요시의 행적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상황에서 만들어 낸 설에 가깝다. 히데요시는 쇼군이든 관백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상황에서 관백이 된 것이지, 쇼군이 되지 못해서 관백이 된 게 아니다. 쇼군은 친왕과 후지와라씨, 미나모토 일문이 역임했고, 그 전신인 진수부 장군 같은 경우에는 여러 대귀족 가문이나 무가, 오슈 후지와라씨 같은 지역 호족 출신들도 역임한 바 있다. 그러나, 관백은 후지와라 일문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일본 최고위 관직이었다. 격을 따지면, 쇼군 따위보다 관백이 훨씬 더 높은 관직이고 훨씬 더 되기 어려운 지위이다.[* 실제로 관백을 역임한 일본 조정의 인물들은 대부분 공가 귀족중에서도 명문중의 명문들이 주로 역임했으며, 일본 왕실이 굳이 이러한 벼슬을 히데요시에게 내려준 이유는, 히데요시의 출신성분이 비주류에 해당해 왕실과의 동맹관계로 묶어두면 왕실의 권위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후지와라씨의 양자가 되는 것으로 관백이 된 히데요시는 일본의 4대 성씨라 할 수 있는 원평등귤(源平藤橘. [[겐페이토키츠]])에 맞먹는 도요토미(豊臣)씨를 세웠다. 이것은 쇼군 따위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난이도가 높고 훨씬 더 파격적인 일을 행한 것이다. 따라서, 관백이 된 히데요시가 쇼군 직책에 연연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히데요시는 쇼군이라는 군 통수권자로서 대대손손 세습하는 게 아니라, 관백으로서 천황을 대리해 일본 전체를 통치하는 위치를 세습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는 히데츠구를 관백으로 삼고 자신은 태합이 된 것, 히데요리의 관백 승계와 관련된 내용을 담은 유언에서 그 계획을 보여주었다. 애초에 오닌의 난이 터지고 전국 시대가 본격화된 뒤에는 쇼군의 권위도 떨어져서 합법적으로 일본을 다스릴 수 있는 직위가 아니었고, 관백과 마찬가지로 실용성이 없었다. 오히려 통치에 있어서는 막부의 지배자인 쇼군보다는 관백이 훨씬 더 정통성이 있는 편이었다. 어찌됐건 이후 도쿠가와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쇼군의 권위를 조정과 동격으로 올려놓는데는 성공하지만 이는 끝내 성리학자들의 역린을 건드려 존황론자들의 토막운동을 부르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