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진왜란 (문단 편집) === 조선의 대응 === || [[파일:선조.jpg|width=100%]] || [[파일:경복궁_근정전_전경 문화재청.jpg|width=100%]] || || [[선조(조선)|선조 추정 어진]] || [[경복궁]] [[근정전]] ||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유구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 >선조 실록 1591년 10월 24일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 중이던 조정은 당파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제7차 교육과정의 국사에서도 사신들의 의견대립이 원인이 되어 일본이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가르쳤으며 2020년 기준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사신의 의견대립이 원인 중 하나로 나온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 >[[김성일(조선)|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조선)|동인]]) ----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김성일과 류성룡의 대화는 훗날 동인의 실책을 덮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이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巨儒)[* 巨儒. 당대의 학문적 명망이 큰 유학자를 의미한다.]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 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간신으로 욕먹는다. 다만, 김성일은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임진왜란이 터지고 난후 자기 책임을 지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을 했다. 김성일이 아니었으면 홍의장군 곽재우는 지리산 은거기인이 되거나 역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또한 진주목사 이경과 함께 숨어 있던 김시민을 격려하여 병사한 이경의 뒤를 잇게 하고 진주성의 방어를 준비한 것은 진주대첩의 토대가 된다. 일본군의 침입 주요루트였던 경상도 전장을 동분서주하며 의병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중앙군과의 대립을 중재하며 백성들의 구휼에도 신경썼던 실무형 인물이 바로 김성일이다.[* 아직까지도 아마추어 저자들은 김성일에게 임진왜란 발발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그리고, '''일반적인 역사 인식과 달리 조선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했으며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고 1592년 개전 직전까지 쉴 새 없이 진행시켰다.''' 그러나 조선이 생각한 침공의 규모와 도요토미가 실제 실행한 침공의 규모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였고, 200여년간 전국적인 큰 전란이 없었던 조선의 준비는 우리가 아는 것과 같이 일본의 침공을 막기에는 부족할 정도였다. 특히 일본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남부 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경상 감사 김수와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선각은 각기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특히 김수가 두드러졌는데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와 경상 좌우병영성이 모두 증축되거나 새로 쌓았다. 단순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보지도 않았다. 기존 왜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섬이 많은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탈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왜구의 주 공격루트가 아니었던 경상 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2개의 첨사진만 있던 부산 - 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김수]]는 축성 인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 뿐 아니라 유생들까지 동원했다. 향교 교생을 뽑는 고강을 엄격히 실시하여 낙강 유생들을 모조리 충군시켰고 이로인해 지역 사족층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방군 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이나 식자층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김수는 사족층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쟁 발발 후에 곽재우와 크게 충돌했고 선조는 성을 높일수록 민심이 피폐해졌다며 전쟁 준비로 인한 민심 이반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동년배 친구였던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축성에 반대했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전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입을 막지 못했는데 한 줄기 강물을 가지고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실제로 왜군은]] [[정암진 전투|정암진을 넘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조정은 꿋꿋이 전쟁 준비를 진행시켰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이 반격을 감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김성일의 상소로 몇몇 공사를 중단하는 등, 사회의 반발을 이기지 못해 준비 속도는 상당히 더뎠다. 또한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수들을 남쪽 위주로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종 6품 지방의 현감[* 정읍 현감이었다.]였던 [[이순신|무명의 장수]]를 전쟁 발발 1년전인 1591년 2월 13일, 공을 세우라는 전교와 함께 단 하루만에 8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로 초수하기도 했다.[* 이런 하루만에 이루어진 미친듯한 진급 속도는 1년 전에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하려 하자 진급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반발했던 [[사간원]]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현대 군으로 치자면 대대장 정도가 맡아본 가장 높은 지위인 군인을 하루 아침에 사단장에 앉혀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군필이라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무리한 인사인지 단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주의해야 할 것이 동아시아에서 전근대시기에 관직(官職)은 해당 인물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결정하는 관품(官品)과 실제로 담당 업무를 볼 수 있는 직책(職責)으로 나눠서 생각해봐야 한다. 즉, 품계(品階)와 직책(職責)이 동일하지 않고, 한쪽이 낮을 수도 있었다. 거기다가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직은 업무 일수에 따라서 오를 수 있는 당하관(堂下官)직과 다르게 왕의 임명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앞서 이야기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순신의 품계는 1년전에 종3품직 수행이 가능한 위치에 있었고, 5품 이상은 왕의 선발로 당상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는 거지 이것도 보기 드문 정도로 파격 승진인 건 맞다.] 그 외에 [[이억기]], 이천, 양응지, [[원균]] 등 당시 이름 있는 장수들을 대거 남쪽으로 배치했다. 이렇듯 조선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군의 규모를 수만 명 정도로 예상했다는 점과 통신사의 귀국(1591년) 이후 1년 남짓한 준비 기간은, 1585년부터 7년 이상 전쟁을 준비한 일본보다 부족했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이 일본 내부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가 컸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조선 통신사]]를 파견하는 한편 일본이 조선으로 보낸 일본 국왕사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일본 내부 정보를 꾸준히 수집했었다. 그러다 1467년 [[오닌의 난]]을 기점으로 일본이 [[센고쿠 시대|전국시대]]에 돌입해 내부 사정이 혼란해지면서, 파견간 조선 통신사들이 조난당하거나 사망하는 사례가 생기면서 1479년~1590년동안 조선 통신사 파견이 이뤄지지 않아 사실상 직접적으로 정보 수집을 할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조선에 들어온 일본 국왕사나 왜관에 들어온 일본인, 대마도를 통해 일본 관련 정보를 수집해야만 했다. 문제는 조선측에서 직접 정보를 수집할 방법이 없다보니 일본측에서 제공한 정보를 그대로 믿기가 어려웠다. 특히 공식적인 외교창구였던 대마도는 조선 일본 양국간의 이중 종속관계를 유지하고자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보를 부분적 내지는 가공해서 조선에 제공했다. 대마도가 몇 안 되는 정보 창구인지라 조선으로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1590년 조선은 조선 통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조선 침공 정보를 수집했으나 근 100여 년 동안 정보가 없어 이해하기 어려웠던 데다 이듬해 명나라가 조선이 일본을 인도하여 명을 치려고 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을 의심하는 외교적 마찰이 벌어지면서 일이 꼬였다. 즉 정확한 전쟁 정보를 입수했으나 정치적, 외교적 문제가 겹치는 혼선이 발생하여 일본이 왜, 어떻게, 얼마나 쳐들어 오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조선으로선 조선 전기에 있었던 삼포왜란 등의 경험을 토대로 그저 규모가 좀 더 커진 (일반적인) 전쟁으로 예상해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1589년 8월 1일 석강에서 [[을묘왜변]]의 일을 상고하면서 선조가 '''"왜적 수만명이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을까?"'''라고 묻자 비변사 제조 변협의 대답은 '''"걔네 배 한척에 100명밖에 못 태우는데 100척 띄워봤자 1만명밖에 안 될걸요?"'''였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208001_002|#]] 변협은 을묘왜변에서 공을 세워 출세가도를 달렸고 바로 2년 전에는 전라우도방어사로 녹도 일대를 침공한 왜적을 막아내기도 했는데 그런 군사전문가조차 일본의 대규모 침공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봤던 것이다. 이전까지 많은 사례가 있었던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서도 10만 이상의 대병력을 동원해 쳐들어온 나라는 수나라, 당나라, 요나라 정도로 의외로 많지 않으며 마지막 사례인 요나라와의 전쟁도 16세기 말 기준으로 거의 600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여요전쟁 이후로도 14세기말 [[홍건적]]들이 10만~20만 수준의 규모로 고려에 쳐들어온적은 있었는데 이 사례 역시 당시 기준으로 거의 200년도 더 이전의 일이었는데다가 이마저도 홍건적이 워낙 강적이라 고전한게 아니라 당시 고려 상황이 워낙 막장이라 고전한 것이다, 이 당시 홍건적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라 규모만 큰 도적떼나 다름없었다. 즉, 조선으로서는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대비'''를 했다. 문제가 2개 있는데, 첫째는 그 상식이 백 년 전의 상식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백 년 이후의 상식으로 가늠해 봐도 히데요시가 미친 수준으로 대군을 모았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의미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규모의 대(大)재앙이 닥쳤다는 것.[* 임진왜란 이후 시대에도 10만 명 규모의 해외원정은 사례를 찾기가 힘들다. 동시기 지중해 최강이었던 오스만 제국이 병력을 총동원해도 15만을 넘지 못했다.][* 현대인들이 게임이나 드라마같은 대중매체 특유의 과장법에 적응되어서 이해하지 못할 뿐이지 2~3만 명만 되어도 큰 군세가 맞다. 10만 명 이상의 대군을 운용하는 건 통일 중국 왕조, 분열 이전의 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 같은 고대, 중세, 근세의 대국들에게도 큰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이는 21세기 현대의 부국들에게도 마찬가지.] 여기에 전략적, 외교적 측면에서도 무한정 남부 지방 방위에 몰빵할 수가 없었다. 조선의 재정 및 인구 여건상 남부 지방에 군단급 이상의 상비군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북방의 방위력을 일부 희생시켜야 했는데, 고려말부터 지속된 북방에서의 군사적 위협을 생각하면 이것도 무작정 강행할 일이 아니었다. 당장 [[니탕개의 난]]이 터진지 10년도 채 안 된 시점이었고, 200년 전 이야기지만 [[위화도 회군|공요군 4만명을 일으켜 출정하자]] 남방이 다시 왜구로 들끓어 골머리를 앓던 역사가 있었는데 당연히 그 역도 성립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쟁 발발 초기 조선의 판단은 일단 삼남과 북병을 소집하면 막아볼 수 있다는 것이었고, 어쨌거나 5만이 넘는 남도근왕군이 소집되어 [[용인 전투|수도권 방위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조선도 작정하면 10만 이상의 대군을 모을 수는 있었지만 그 막대한 생산인구를 징집해서 붙들고 있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명군에게 군량을 대주는 쪽이 싸게 먹힐 지경이었다. 중국발 군비제한도 문제인데, 당장 왜와 손잡고 명을 침공한다는 참소를 받는 마당에 10만 대군을 일으킨다고 하면 왜란을 걱정하기 이전에 명에서 어떻게 나올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실제로 중국 왕조들은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에도 조선의 군비에 지속적으로 제한을 가했으며 군비 확충 명분으로 일본의 재침을 거론해도 씨알도 안먹힐 지경이었다.[* 350년 후에도 비슷하게 [[한국전쟁}침공을 예상해놓고도 정치외교적 문제로 발목이 잡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사례]]가 있다.] 그 다음 문제는 '''남부 중에서도 어디가 1선이냐'''는 것이었다. 현대인들이야 임진왜란 사례와 오늘날 경부간선을 보고 당연히 부산으로 넘어오는 것이 상식 아니냐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조선 정부가 생각한 주전장은 경상도가 아니라 전라도'''(+경상우도)였고, 당장 위의 1589년 8월 1일 석강 기사에서도 주전장을 전라도로 상정하고 토론하고 있었다. 임란 이후인 1601년에도 남부의 방비 문제를 논하면서 선조가 대놓고 '''"을묘왜변 이후에 왜적이 전라도로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산으로 와버렸잖냐?"'''라고 지적하기도 했다.[[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401017_001|#]]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게 이전까지의 일본발 침공은 대부분 뜯어먹을 게 풍부한 전라도 등 서남해안 지역을 노리고 직공해왔고, 심지어 세종대에는 황해도 연안까지 왜구가 침공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대마도를 기준으로 부산과 그 서쪽의 거제는 거의 비슷한 거리이고,[* 유일하게 원정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는 제3차 [[대마도 정벌]]도 거제가 기종점이었으며, [[한일해저터널]]도 부산 연결안과 거제 연결안이 동시에 제시되고 있다.] 전근대 조선의 교통여건 상 부산에서 출발해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한성행 육로는 효율이 심각할 정도로 낮아서 결국 호남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죽도 밥도 못 될 상황이었다. 즉 조선 조정 입장에서 보면 >1. 상륙해봤자 백두대간 넘다가 힘 다 빼고 보급도 제대로 안 될 경상도 방면 육로 방어선에 투자할까? >2. 서남해안 통해서 곡창지대 장악하고 수틀리면 경강까지 쳐들어올 수 있는 전라도 방면 육해로 방어선에 투자할까? 라는 문제였다. 김수가 유독 악명이 높았던 것도 경상도 지역은 대체적으로 왜변에 크게 노출된 경험이 없는지라 지역민들이 필요성을 절감하지 못했던 게 컸다.[* 경상도가 왜침을 겪은 것은 80년 전 [[삼포왜란]]이 마지막이었다. 그것도 우도는 제포(웅천), 좌도는 부산포와 염포(울산) 일대에 그쳤지 내륙으로는 확대되지 않았다.] 결국 조선 측의 결정은 이미 수많은 사례가 쌓인 전라도 방면에 투자하는 것이었고,[* 수군 역시 부산지역을 관할하는 경상좌수영은 나름대로 전력을 강화했어도 애초에 독자적인 작전이 어려울 정도로 영세했고, 수군 최대 함대전력은 호남 가는 길목을 지키는 경상우수영이었다.] 이는 임란 초기 경상좌도 지상군의 총체적 붕괴에도 전라도를 굳건하게 지켜내어 반격의 발판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실제로 단기전을 예상하고 들어온 탓에 장기간 대규모 군세를 유지할 보급이 부족했던 왜군은 군량을 얻고자 지속적으로 호남지방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것이 조선이 임진년과 정유년의 전쟁에서 승리한 요인이기도 하니 조선 조정의 예측과 노력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신라 시대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봐도 삼국시대의 일본 열도는 제대로 된 철기문화와 기마문화가 없었으며, 통합된 나라가 아닌 한반도계 이주민세력과 본토 원주민들이 섞이며 부족간의 싸움을 거듭하는, 중앙집권되지 못했던 부족집단이었을 뿐더러 한반도 왕조에게 나라가 휘청거릴 위협이 될만한 침공을 감행한 전례가 없었다. 이전까지 한반도를 공격했던 일본 무력집단은 어디까지나 왜'''군'''이 아니라 대다수가 왜'''구'''였다. 군대가 아니라 도적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편제와 지휘체계가 정규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하고 나약한 집단들이었으며, 그 수효 또한 수만 단위를 넘지 못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일본이 한반도를 공격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목적성을 노략질로 볼 수밖에 없었다. 큰 규모의 전투 없이 수백년간 글공부와 당파싸움이 아닌 '''물리적인 싸움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평화에 찌들었던 조선'''과는 달리 '''천하통일을 목적으로 한 피도 눈물도 없는 전국시대를 겪은 뒤 수십 수백명을 죽여본 경험풍부한 병사와 지휘관들을 거느린 일본의''' 조선 멸망전이라고 볼 수 있을 근거가 단 하나도 없었다는 것. 그리고 현대 외교역학적으로도 상식을 초월한 수준의 전쟁 엄포는 보통 전쟁 위기보다는 그냥 [[미치광이 전략]]으로 본다. 사실 조선의 전쟁준비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첫째는 병력의 규모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둘째는 그 예측치를 뛰어넘는 과도한(?) 전쟁준비를 추진하면서 그 필요성을 설득력있게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즉 왜적이 1~2만 정도라는 전제 하에서는 잘해야 해안가 지역 좀 축성하고 정 불안하면 남강 연안에 방어진지 정도 구축하면 될 것을 왜 구태여 유생까지 동원해가며 내륙지역에서까지 난리를 치냐는 것이 당시 경상우도 유림들의 불만사항이었다.[* 현대로 치면 대학예비군들까지 죄다 2박3일 동원훈련시킨다고 해보자.] 위에서 소개한 이로의 편지도 당대의 예측에 의거하면 꽤 상식적인 소리긴 하다. 해안가 요새들을 돌파해 남강 연안까지 당도할 때쯤이면 이미 그야말로 민병대에게도 썰려나갈 수준일테고, 실제로도 [[정암진 전투|정암진에서의 전투]] 결과도 그랬으니까.[* 물론 전투에서 지형지물의 영향과 중요성이 크지만 정암진 전투의 승리는 곽재우의 기지가 빛을 발했다. 수비측의 방비가 부족하면 천혜의 요새도 언젠가는 뚫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정작 전쟁이 터지자 관군이 일패도지하고 그동안 피땀흘려 준비한 전쟁대비책들이 아무 쓸모가 없는 꼴을 목도했으니 전쟁 초기 부왜배들이 속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은 붕당으로 싸우기만 하고 전쟁 가능성을 부정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남쪽 전장을 중심으로 전쟁에 대한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준비 기간이 너무 부족했고, 그 전의 왜구들의 왜적질보다 좀 더 큰 국지전 정도를 예상한 것과 달리 일본은 전처럼 적당히 싸우고 물러갈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고, 20만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조선을 밟고 지나 바로 명나라로 진격하는 목적으로 한 대규모 출병으로 전쟁을 일으켰다. 설령 정확히 예측을 했다 해도 고질적인 재정부족과 전략적, 외교적 고려사항 등 발목을 잡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즉, 어느 정도 전쟁에 대한 준비는 했으나, 오랜기간 지속된 평화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전쟁 준비로 인해 조선 내 사회의 반발이 심했고, 일본이 벌인 전쟁의 규모가 조선 조정의 예측을 아득히 넘어서버린 것이다.[* 이건 정말 히데요시가 당시까지만 해도 동북아의 '''역대급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밖에 설명할 재간이 없다. 2022년에 푸틴이 진짜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