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잇코잇키 (문단 편집) === 쿄로쿠의 착난(享禄の錯乱) === 카와치노쿠니의 착란 당시 쫓겨났던 렌뇨의 9남 짓켄은 혼간지로부터 용서를 받고 복귀를 허락받는다. 그는 오우미에 쇼토쿠지(称徳寺)를 세웠는데, 혼푸쿠지와 영역이 겹치면서 갈등이 일어나게 된다. 혼푸쿠지가 일문에 의한 정토진종의 통치 확립을 방해한다고 본 렌쥰은 쇼토쿠지를 밀어 주고 혼푸쿠지를 파문한다.-- 파문 시즌 2-- 이렇게 내부 통치를 확고히 한 정토진종은 정계로 눈을 돌린다. 1527년, 호소카와 가문에서 새로운 내분이 시작되었는데, 미요시 모토나가(三好元長)가 옹립한 [[호소카와 하루모토]](細川晴元)가 타카쿠니에 맞서 거병하였다. 렌쥰은 휘하의 시모츠마 라이슈(下間頼秀), 라이세이(頼盛) 형제로 하여금 하루모토를 돕게 하였고, 하루모토는 호쿠리쿠에 위치한 타카쿠니 측의 장원들을 정토진종 쪽에서 가져가 줄 것을 요청했다. 렌쥰은 자신의 사위인 초쇼지 짓켄(超勝寺実顕)과 시모츠마 라이슈에게 일을 맡겼다. 초쇼지와 혼가쿠지는 혼가쿠지 렌에의 파문 이후 계속해서 카가 삼산(쇼코지, 코쿄지, 혼센지)의 압박을 받아오고 있었으나 원레 렌뇨 시절 전부터 유래가 깊은 말사(末寺)들이었고 자체적으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짓켄과 라이슈는 새로 얻은 장원들의 관리자를 자신들의 휘하에 있던 신도로 교체하였고, 이를 빌미로 하여 카가 삼산과의 갈등이 폭발하였다. 1531년(쿄로쿠 4년), 카가 삼산은 일문일가제 위반 등을 이유로 초쇼지 토벌을 명했다. 그러나 초쇼지는 혼가쿠지와 힘을 합쳤고, 라이슈로부터 보고를 받은 렌쥰은 짓켄을 변호하며 카가 삼산의 토벌을 명했다. 6월 교토 야마시나에서 모인 정토진종 신도들은 지츠엔과 시모츠마 라이세이의 통솔하에 출진, 카가로 진입하여 카가 삼산 세력을 쓸어 내기 시작했다. 여기에 외부 세력들이 개입하기 시작하는데, 혼간지와 관계가 무척 나빴던 아사쿠라씨에서는 카가 삼산을 지원하며 [[아사쿠라 소데키]]가 이끄는 병력을 보냈다. 카가 삼산의 하나인 혼센지에 있던 지츠고(実悟)를 돕기 위해 삼촌 하타케야마 이에토시(畠山家俊)가 노토(能登)에서 출병하였다. 또 명목상으로만 카가의 슈고였던 토가시씨도 실권을 얻기 위해 카가 삼산 측에 가담하였다. 전투 끝에 11월 츠바타(津幡)에서 하타케야마 이에토시가 전사하는 등 카가 삼산 측이 패배하였다. 결과적으로 카가 삼산의 세력은 완전히 숙청당했으며, 용서를 받은 것은 19년 뒤였다. 혼간지는 카가의 통치를 혼간지에서 파견하는 관리자를 통한 직접 지배로 바꾸었다. 그 상징으로 오야마 고보(尾山御坊)[* 지금의 카나자와 성.]를 세웠다. 초쇼지와 혼가쿠지의 봉기를 다이잇키(大一揆), 카가 삼산의 봉기를 쇼잇키(小一揆)로 불렀기 때문에 이 사건을 다이쇼 잇키(大小一揆)라고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