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무카 (문단 편집) === 최후 === 한편 자무카는 이틈에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토그릴 칸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이에 실패하여 나이만에게로 도망쳤고[* 《[[원사]]》 참조, 참고로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때 테무진이 셍굼, 자무카, 토그릴 칸, 자신의 부하였지만 배신하고 자무카에게 간 귀족 알탄과 후차르에게 서한을 보내서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고 했다.] 연합이었던 토그릴 칸은 세력을 회복한 테무진에게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멸망했다. 이후 테무진이 나이만을 공격하자 자무카는 중간에 나이만에게서 빠져나왔고, '''[[차키르마우트 전투]]'''에서의 대패로 나이만이 패망한 이후에는 도망다니다가 부하의 배반으로 생포되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 때 자무카가 테무진을 '''돕기 위해''' 나이만의 타양 칸을 겁먹게 하고, 이같은 사실을 테무진에게 전갈을 보내어 알려주었다고 되어 있다. 반면에 《집사》에는 자무카가 테무진의 새로운 전투 대형을 보고 나이만족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판단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여기에 더해 튀르크계 나이만족과 몽골족간의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현격했기 때문에 자무카의 추종자들과 부족민들이 나이만 편에 서서 테무진에게 대항하여 싸우기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실 어느 쪽이든 자무카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텐데 다른 건 몰라도 나이만족의 지도자인 타양 칸이 전쟁을 잘 할 줄 모르고 결정적으로 '''겁쟁이'''였다. 한때는 13익 전투로 칭기즈칸을 개박살내보기도 하고 검은 뼈 씨족 출신으로서 칸위에도 오를 정도로 나름 구르고 굴러본 자무카가 저런 지도자가 칭기즈 칸을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해도 이상할 건 없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는 자기 부하들에게 사지가 붙들려 잡혀오자마자 칭기즈 칸에게 '''"친구여, 이놈들은 주인인 나를 배반하여 붙잡아왔다. 이런 배신자들을 넌 용납하지 않겠지?"'''라고 말했는데,[* 칭기즈 칸과 오랜 친구인 만큼 칭기즈 칸의 성격을 잘 알았을 것이다.] 칸의 대답은 더더욱 걸작. '''"물론이고 말고. 자기 주인을 배신해서 적에게 팔아넘기는 쓰레기들을 내가 받아줄 리 없지."''' 그 뒤 칸은 자무카를 잡아 온 그의 부하들을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렸다.''' 이것은 칭기즈 칸이 대체적으로 적들에 대해서 '''항복하면 살려주고 저항하면 죽인다'''는 원칙을 고수했지만[* 사실 웬만한 정복자들은 대부분 이 원칙을 고수했다. 이것을 넘어선 이들은 대체로 [[학살]]자란 호칭이 붙게 된다.] '''주인을 배신해 팔아넘기는''' 행위에는 오히려 예외적으로 더 가혹했다는 것 때문이다. 칭기즈 칸은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은 후 자기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동족들도 자신을 해치려 한 타이치우트족을 제외하고는[* 그나마도 귀족층 한정. 평민층 이하는 포용했으며, 사준사구 중에서도 타이치우트족인 제베와 티라운이 있다.] 대부분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학살과 관용이라는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칭기즈 칸의 대외정책은, 자신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는 당시로서는 '근대적'인 사회 계약의 결과물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하여튼 자무카의 재능이 아까웠던 칭기즈 칸은 어릴 적 맹우였던 그를 회유하려고 했지만 자무카는 [[진궁|이를 깨끗이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전승]] 등을 보면[* 칭기즈 칸 사후 《[[원조비사]]》가 쓰여지기 전까지 몽골의 역사는 정식 기록 없이 입에서 입으로 서사시 형태를 가지고 이어져 왔다. 그 때문에 전승마다 조금씩 다른 내용들이 나온다.] 이제 막 몽골의 권위자가 된 [[친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마지막 [[우정]]의 표현으로 죽는 것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무슨 소리냐면 이전까지 자무카의 행적을 보면 그는 반(反) 칭기즈 칸의 수장격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칭기즈 칸이 살려준다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건재하므로 칭기즈 칸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여전히 그를 정신적 지주처럼 생각할테고 칭기즈 칸에게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자무카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칭기즈 칸과 싸우게 되는 입장이 된다. 어쩌면 이것이 친구에게 지워질 짐이 돼버릴까봐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지금 와선 모든 게 추측이긴 하다.] 칭기즈 칸은 자무카에게 "이제 하나로 함께 지내며 자신이 잊은 것을 서로 일깨워주며 함께 지내세."라며 설득을 했지만 자무카가 《[[원조비사]]》에서는 꽤나 자학적인 어조로 얘기하며 자신을 살려두면 [[칭기즈 칸]]이 밤이고 낮이고 안심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한다. 자무카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천하가 이제 자네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데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나? 오히려 자네 옷깃의 이, 자네 옷깃 아래의 가시가 될 것이네. 자네가 허락해 나를 빨리 떠나게 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지. 나를 죽일 때 피가 나오지 않게 죽이면 내 유골이라도 높은 곳에서 영원히 자네의 후손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가호해 주고 축복할 것이네." 그 말대로 [[칭기즈 칸]]은 마지막 우정의 표현으로 그를 자루 속에 넣어 끈으로 목을 졸라 '''피를 보지 않고'''[* 몽골에서는 사람의 피에 영혼이 깃든다고 생각했으며, 피를 온전히 하여 죽으면 그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죽게 해주었다.[* 목을 조르는 게 아니라 자루에 넣어진 후에 달리는 말로 밟혀 죽었다고도 한다. 또 어떤 서술에는 큰 카페트에 돌돌 말려 죽었다고도 한다. 여튼 이러한 가설들의 공통점은 생전 자무카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 자루 속에 넣어 목 졸라 죽인 건 죽은 걸로 위장하려는 것뿐으로 사실은 살려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게 해줬다는 전승도 있다. 어찌보면 [[제베]]가 이름을 바꾸게 된 것[* 이름을 바꿈으로서 칭기즈 칸의 적이었던 '지르고가타이'는 없어지고 칸의 신하인 '제베'로 새로 태어났다는 상징적인 의미.]과 비슷한 경우다. 그외 '척추를 꺾어 죽였다'는 설도 있고, 사실은 정반대로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원해서 [[능지형]]으로 처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허나 몽골인들의 사후관이나 그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감안해보면 이는 칭기즈칸, 나아가 몽골족의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정말 가장 고통스런 죽음을 원했다면 끓는 기름에 빠뜨려 죽여달라고 원했을 가능성이 더 클 것이다. 능지형으로 처형당한 전승에선 칭기즈 칸이 결국 죽이라고 명령은 했으나 의형제가 죽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칭기즈 칸은 이전에 자신과 갈등을 빚던 [[벡테르|이복 형]]을 죽인 적이 있었는데 이 일로 어머니 호엘룬으로부터 크게 힐난당하면서도 본인도 대꾸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때의 트라우마가 있는 칭기즈 칸으로선 자무카가 비록 자신을 적대하는 세력에 있긴 했고, 의형제니 피 한 방울 안 섞인 처지였으나 그래도 차마 죽이기 싫은 심정이었을 순 있다. 마지막까지 회유하려고 들었던 걸 보면 진짜 죽이기 싫었던 듯.] 자리를 비우면서 칭기즈 칸의 동생인 카사르가 독단적으로 능지형으로 죽였고, 이를 계기로 둘의 사이가 살짝 벌어지면서 훗날 카사르가 멋대로 움직이고 이를 칭기즈 칸이 경고 먹이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물건은 젊은 시절, 메르키트 정복 때 서로 교환하여 얻은 칭기즈 칸의 허리띠였다.[* 참고로 허리띠는 문화적으로 남성기를 암시한다고 한다. 《말무사》에서는 보르테에 대한 순정을 강조하기 위해 그녀가 어릴 적 칭기즈 칸에게 전달해줄 것을 부탁한 목걸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묘사했다.] 그러니까 그 허리띠를 '''칭기즈 칸과 적대하는 사이가 된 뒤로도 계속, 죽을 때까지 평생 가지고 다닌 것이다.''' 개인사적인 측면에서는 칭기즈 칸에게나 그에게나 참으로 비극적인 대목이다. 이렇듯 [[진실]]성은 둘째 치더라도, 전승에서든 기록에서든 자신을 배신하고 적대한 인물은 살려두지 않은 칭기즈칸이 '''유일하게 자신과 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기는커녕 회유하려 한 인물'''이니 칭기즈 칸이 자무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자신은 자무카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자무카가 막무가내였기 때문에 '아무 죄가 없던' 자무카가 아주 오래전에 저지른 잘못(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은 13익 전투를 일으킨 것과 치노스족 남자들을 인간곰탕으로 끓인 것)을 핑계로 죽음을 내렸다는 말도 전해진다.] 자무카는 후에 세계 제국이 된 몽골 황실에서 두고두고 제삿밥을 얻어먹는 웃어른으로 대우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