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오빙쥔 (문단 편집) === [[신해혁명]]까지 === 1859년 [[하남성]] 여주에서 태어났다. [[북양군벌]]의 산하에 들어가 [[위안스카이]]의 심복이 되었으며 치안 업무를 주로 맡아 민정부 시랑에 임명되었으며 1902년 경찰제도가 마련될 때 그 책임자를 맡았으나 위안스카이가 파면되면서 같이 파면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위안스카이가 복직되자 위안스카이의 명을 받고 청실을 핍박하여 퇴위할 것을 강요했다. 1912년 1월 19일 어전회의에서 [[후웨이더]], [[량스이]]와 함께 혁명당의 힘이 막강하고 북방군도 믿을 것이 못되며 위안스카이가 이미 톈진에 임시정부를 수립해 혁명당과 협상하고 있음을 통보하고 분노하는 황족들에게 이미 군주제 유지는 어렵게 되었다고 하며 황족들이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사직하겠다고 어전회의에서 퇴장했다. 1월 26일 군주제 유지를 주장하는 종사당의 우두머리 왕필이 폭탄에 맞아 죽자 놀란 융유태후가 자오빙쥔과 량스이, 후웨이더 등을 입궐시켜 위안스카이에게 잘 말해서 황실의 목숨만은 보존시켜 달라고 통곡했고 결국 2월에 [[선통제]]가 퇴위하면서 청나라는 멸망하고 1912년 위안스카이가 임시대총통에 취임했는데 중화민국의 첫 내각인 [[탕사오이]] 내각이 출범하자 자오빙쥔은 내무총장에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