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위대/역사 (문단 편집) == 1950-1954 == 1950년 한반도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터지자 전쟁 수행을 하기 위해 일본에 주둔했던 주일미군의 상당수는 한반도로 파견된다. 당시 일본에 주둔했던 [[주일미군]]은 7사단(홋카이도, 도호쿠), 1사단(도쿄, 간토), 25사단(간사이, 주부), 24사단(규슈) 등 4개 사단으로 미 제8군을 구성했다. 한반도와 가장 가까이 있던 24사단이 먼저 7월 3일에 건너가고 7월 18일까지 25사단과 1사단도 넘어갔다. 7사단은 대기했다. 이로 발생할 치안공백을 막기 위해 일본인들로 구성된 경찰예비대의 창설이 고려됐다. 1950년 7월 8일 맥아더는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총리에게 7만 5천명 규모의 경찰예비대 창설을 요구했고 소해부대로 임무를 맡던 해상보안청의 인원도 8천명을 늘리라고 요청했다. 그 해 8월 10일에 경찰예비대령이 공포되고 8월 23일에 1차로 7천명이 입대하였다. 6.25 전쟁에서 전황이 불리해지고 인천상륙작전이 검토되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주둔 중이던 미 육군 제7사단마저 한반도로 파견된다. 1950년 9월 10일까지 [[홋카이도]]에 1만명의 경찰예비대원이 파견되었으며 이틀 동안 모집소에서 입대수속을 마친 뒤 열차 내에서 사격 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알 수 있는 일. 무장은 미군이 쓰던 기존 총기/장비들을 인수받아 M1개런드와 카빈총 외에 30, 50구경 기관총(M1919, M2), 5인치 로켓 발사기, 60mm 박격포 등이었고 추가로 M-24 경전차, 105mm, 155mm 곡사포 등도 미 본토에서 넘어올 계획이었다. 사실상 군대의 무장이었지만 일본 정부는 재군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8월 10일에 정령260호, 경찰예비대령이 공포, 시행되었다. 이는 의회를 거친 입법이 아니다. 당시 일본 국가경찰[* [[일본 경찰]]은 현재 많이 지방자치경찰화 되었으나 1952년까지는 국가경찰의 형태였다.]에 소속시키지 않고 총리부의 기관으로 소속시켰다. 그리고 설립이 워낙에 급박해 정식 법률이 아닌 정령(한국으로 치면 명령)에 의한 것이라 뒤에 나온 자위대의 위헌시비[* 물론 자위대는 염연히 헌법 해석과 이에 근거한 법률로 법적근거를 인정받은 일본의 공식적인 국가조직이다.]를 계속 일으킨 원인이기도 했다. >제1조 이 정령은 일본국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의 복지를 보장하는데 필요한 한도 내에서 국가지방 경찰 및 자치체 경찰의 경찰력을 보완하기 위하여 경찰예비대를 설치하고, 그 조직 등에 관하여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법적 면에선 경찰인데 정작 소집 후에는 미군 캠프[* 기존의 주일 미군이 한국으로 대거 배치되면서 고문관과 소수 병력들 일부만 남은 텅 빈 기지였다.]의 주둔지로 가서 군대식 훈련을 받았다. 8월 13일에 전국의 경찰서에 창구를 설치했고 15일에 응모를 마감 17일에 전국 183개 시험장에서 시험 개시, 8월 23일에 입교를 시작하여 10월 12일날 입교 완료시킨단 계획이었다. 모병 포스터에는 날개 치는 비둘기 옆에 "평화 일본은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라고 썼다. 아래는 응모 조건.[* 번역은 육사 박재권 교수의 역서 '일본군대 자위대'(마에다 데츠오, 1998, 시사일어사)에 따랐다.] >경찰예비대원은 특별직 공무원. >대원은 모두 일정한 숙소에 무료 합숙하며 훈련과 근무에 임한다. >수당은 월 5천엔, 2년 근무, 퇴직수당 6만엔. >경력이나 근무 성적에 따라 간부 채용. >피복/식사는 지급. >연령은 20세에서 35세 남성. >신장은 156cm, 나안 시력 0.3 이상. 당시 경찰관의 월급이 3,370엔이었다. 영화가 60엔, 우동이 20엔인 시대였다. 응모기간이 3일임에도 불구하고 382,003명이 응모했다. 경쟁률은 약 5.1:1 수준이었다. 학력은 고등[[소학교]](현재의 [[중학교]]) 졸업자가 절반 수준이었고 농업 종사자가 40%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일본군]] 병이나 부사관으로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특히 부사관 출신이 많았다.] 장교는 당시에는 추방령 때문에 바로 들어오지는 못 했다. 계급은 전원이 2등경사로 군대로 치면 [[이등병]]이었다. 당시 일본군 장교는 추방령 때문에 경찰예비대에 들어오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모든 인원이 그냥 이등병 계급을 일괄적으로 부여받았다. 인원 가운데 대학 졸업자나 [[분대장]]등 지휘자를 맡은 경력이 있는 자는 간부 적임자로 선발해 에다지마(江田島)로 보냈다. [[일본해군병학교]]가 위치한 곳이다. 수료자가 올 때까진 중대장, 소대장도 없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했고 간부 적임자로 뽑힌 사람도 일단 계급은 2등경사(이등병)라 완장만 대대장, 중대장이었다. 그때문에 실질적인 지휘관은 미군 고문관이었다. 무기 관리부터 훈련 스케줄까지 미군이 장악했기 때문에 입소자 중엔 미군 용병이 될 수 없다고 떠나거나 경찰이 아니라 사실상 군대라며 떠나기도 했다. 1950년 10월이 되자 7만 5천명의 경찰예비대가 충원된다. 간부 요원은 경찰 출신으로 충원되었고 구 일본군 출신은 추방령에 따라 배제되었다.[* 이 시기에 생겨난 말이 바로 [[내무군벌]]이다.] 육상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의 탄생 과정은 한국군과 비슷한데 장비나 교육 등에서 미군의 지휘를 받았다. 1950년 12월엔 법제적인 처리가 이뤄져 [[대장(계급)|총대총감]](總隊總監) 밑에 전국을 네 곳의 관구대(管區隊)로 구분하였다. 이는 보병 4개 사단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패전 5년 만에 일본에서 육상병력이 탄생한 것이었다. 그 전까지 몇 개월 동안은 연대장이나 부대장 급의 [[지휘관]]이 공백인 상태였다. 대원들에겐 카빈소총이 지급됐는데 미국인 고문관이 대여하는 형태였다. 사실 이들의 초기 임무는 군사 목적이라기 보단 주로 [[폭동]] 진압 등에 중점을 뒀다. [[요시다 시게루]]는 군이 아니라는 걸 피력했는데 재군비를 하면 군이 [[6.25 전쟁]]에 파병될 수도 있다는 소문이 일본에서 돌았다. 구 일본군 출신들이 이 소문을 놓칠리가 없었다. [[후생노동성|후생성]] 소속의 복원국과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역사과에 남아있던 구 일본군 출신들은 경찰예비대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지만 요시다 시게루가 군부를 혐오했고[* 철저히 [[도조 히데키]] 때문이었다. 요시다는 1945년에 종전 협상 관련 문제로 헌병대가 40일 동안 구금한 적도 있다.] 당시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돼 일본인 사이에선 [[반전]]기운이 강했다. 하지만 미군에서 일본인으로 간부의 권한이 넘어가고 조직이 성립되자 경험 문제로 구군인의 재등용이 시작됐다. 이는 한국에서 친일파가 다시 공직으로 복귀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1950년 11월 30일부로 구군인 추방이 해제되었다. 처음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후에 육해군학교에 입교한 자들로 일본 육사58기(1942년 입교)와 해군병학교 74기(1941년 입교) 이후가 해당되었다. 즉 사관생도와 소위만 허락한 것이다. 1950년 말부터 도조 히데키의 비서 출신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 역사과에 근무하던 핫토리 다쿠시로 대령은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월러비 소장의 지시로 400명의 육군 장교 명부를 준비했는데 그의 계획은 요시다 시게루의 반대와 맥아더의 결단에 의해 일단은 불채용됐으나 1951년에는 뒤집히게 된다. 1951년 8월부턴 그 이전에 입교한 자들도 허용되었다. 좌관급까지 허용됐는데 [[6.25 전쟁]] 당시 경험 부족인 지휘관들이 삽질을 하고 구 군인 출신들이 리더십에서 더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맥아더가 해임되고 리지웨이가 6차에 걸쳐 63,805명의 추방령을 해제했다. 문민관료들도 내부부국[* 현재의 방위성.]을 장악하면서 현장은 그냥 군인 출신들에게 맡기잔 얘기가 나왔다. 1951년 6월 1일부로 육사 58기, 해병 74기와 그들의 동기급으로 간부 충원이 이뤄졌다. 이들은 패전 당시에 소위였다. 이들이 일본 자위대 간부후보생 1기들이다. 이어 10월 1일엔 좌관(영관)급도 중령까지 허락되었다. 1952년에는 대령 11명도 특별 추천 형태로 입대하였다. 1950년에 일본 해상보안청은 소해정 21척으로 구성된 특별소해대를 한반도로 파견했다. 일본 해군 [[대령|대좌]] 출신인 타무라 큐조(田村久三)가 지휘관이었다. 그는 뒤에 해상보안청 보안감을 지냈는데 이는 오늘날의 해상자위대 [[대장(계급)|막료장]]에 해당한다. 1950년 10월 17일엔 영흥만에서 MS14호정이 기뢰 제거 작업을 하던 중 배가 침몰하여 1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하기도 했다. 해상경비대는 경찰예비대와 달리 초반부터 대놓고 일본 해군 출신들이 영입되었다. 아니 영입된 수준이 아니라 일본 해군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952년부터는 미해군의 함정을 대여받아 소해부대 말고 다른 해군 업무도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해외에서 활동한 것도 이때부터가 최초인데, 공교롭게도 [[조선인민군]]이 [[인천]] 앞바다에 부설한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구 일본해군 소속 [[소해정]]들이 [[대한민국]] 영해에서 미해군에 소속되어서 활동한 것이 시작. 말만 경비대지 군대의 기능과 비슷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51년 8월에는 [[미군]]이 [[소련]]에 대여했던 18척의 PF(초계구축함)와 50척의 LSSL(대형 상륙 지원정)이 반납됐는데 요코스카에 이들 전함이 오자 [[미국 정부]]는 일본에 이를 제공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 후 통칭 Y위원회[* 정식 명칭은 해상경비대 창설 준비위원회이다.]가 설치됐다. 다만 이들은 해군 군벌 소속보다는 친미파나 친영파에 가까웠다. [[일본해군병학교]]는 [[미국]]이랑 전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적성어인 영어를 가르칠 정도로 따로 놀던 인간들이 있었다.[* 이를 해군 특유의 코스모폴리턴 기질에서 보는 관점도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선 금지했는데도. 특히 해군 시설은 항만과 위치하기 때문에 대규모 주둔지가 필요한 경찰예비대와 달리 물밑에서 일이 찬찬히 진행됐다. 1952년에 해상경비대는 6,038명의 인원으로 해상보안청에서 분리된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강화 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 협정)이 체결됐는데 일본과 제일 대규모 전쟁을 벌였던 [[중화민국]]이나 [[중화인민공화국]]이 빠졌고 [[한국]]은 들어가지도 못 했다. 이 조약 중에 5조 C항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보장했다. [[포츠담 선언]] 때의 완전 [[무장해제]]와는 상반됐다. 6조 A항에선 점령군의 철수를 포함했는데 미군은 협정을 통해 주둔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주일미군의 탄생배경이다. 1952년 [[4월 28일]]에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했고, 주권을 회복했다. [[1952년]]에 예비대 본부와 해상보안청 등을 통솔하는 보안청이 설립되었고 경찰예비대는 보안대로, 해상경비대는 경비대로 개편되어 보안청의 관리를 받았다. 이들을 지휘하는 제1막료감부(현재의 육상막료감부)와 제2막료감부(현재의 해상막료감부)를 설치했다. 이는 한국군의 육군본부와 해군본부에 해당한다. 1952년 5월 10일에 제출된 보안청법은 보안대(육상자위대) 병력을 11만, 경비대(해상자위대) 병력을 7,590명으로 증원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당시에 홋카이도에 주둔했던 미 1기병사단도 철수 예정이라 전차, 유도탄 등의 장비가 도입될 예정이었다. 예산은 1,700억엔을 요구했지만 바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 요시다 총리는 보안청장관을 맡았는데 1952년 10월 15일 메이지신궁 경기장에서 열린 보안대 설립기념 열병식에 등청해서 "새로운 국군의 토대가 되라고 했다"가 여론에게 털렸다. 보안대는 11만명 규모였다. 발족을 앞두고 1952년 7월에 일본군 대좌(대령)급 11명이 입대했다. 다만 일본군 장성급에서 흡수된 인원은 없다. 해상자위대의 전신인 경비대는 1953년에 116억엔의 선박건조비를 책정했고 육상과 비교할 때 구 해군 출신을 대거 받아들였다. 물론 구 일본군 출신의 장교가 인원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강제로 징집당한 병이나 부사관 출신이 많았다. 다만 인적으로 연결고리가 될 만큼 인원이 있었다는 것이고 보안대보단 경비대에서 더 심했다. 경비대의 경우 98% 이상이 일본 해군 출신이었다. 보안청 내에는 보안대학교, 보안연수소, 기술연구소 등 교육 및 연구기관이 발족했는데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을 경험했던 경찰예비대 간부나 요시다 총리는 교육과정의 통합을 요구했다. 물론 구해군 출신들은 별도 분리를 요구했다.그러나 요시다 총리가 강력하게 이 통합 방침을 밀면서 1953년에 통합사관학교인 [[방위대학교]]가 세워졌다. 일본의 경제단체인 게이단롄(경단련, 한국의 [[전경련]]에 해당)에선 구 일본군 장성들을 [[싱크탱크]] 연구원으로 받아들여 재군비계획안을 마련했다. [[1953년]] 2월에 '방위력정비에 관한 시안'이란 계획안을 냈는데 육상 30만, 해상 7만, 항공 13만 규모로 지금의 자위대의 두 배 규모였고 예산이 6년간 2조 9천억엔 규모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묵살됐다.[* 1952년에 보안청 예산이 고작 553억엔이었다. 그에 9~10배에 달하는 예산을 요구한 셈.] 보안청도 자체적인 계획안을 세웠는데 다 물거품이 됐다. [[파일:external/www.clearing.mod.go.jp/j231100p.png]] [[1954년]]([[쇼와]] 29년)에 미국과 일본은 상호방위원조조약을 체결했다. 7월 1일부로 보안청은 방위청으로 개칭됐다. 보안대는 육상자위대로 경비대는 해상자위대로 바뀌었다. 방위청이 생기면서 통합막료회의가 세워졌다. 이는 미군의 [[합동참모본부|합참]]을 본딴 것이었다. [[파일:external/www.clearing.mod.go.jp/j231200p.png]] 그리고 이 해부터 [[욱일기]]가 [[군기]]로 본격적으로 부활했다. 1952년부터 암암리에 쓰고는 있었지만. 항공자위대의 경우에 1952년에 보안대에서 항공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을 하면서 시작됐고 경비대에서도 항공부대를 설치했다. 1954년 1월에 항공준비실이 세워졌고 1954년 3월에 방위2법이 제출되면서 항공자위대는 생겨났다. 1945년 이후 9년 간의 항공전력 공백이 있던 탓에 요원이 부족하여 보안대, 경비대 말고 민간의 일본군 군경력자에서도 선발했다. 이로서 경찰예비대, 해상경비대 → 보안대, 경비대(항공학교, 항공부대) → 자위대의 단계를 거쳐 일본은 군사력을 재건 하고 재무장을 하게 되었다. 위의 내용은 1995년에 발행된 국방군사연구소의 '일본자위대 변천과정과 현황'이란 서적을 참고한 것이다. 거기에 1998년 [[육군사관학교]] 박재권 교수(1953. 6. 28-, 육사 31기)가 번역한 마에다 데츠오의 '일본군대 자위대'(시사일어사)의 서적 내용을 보충하였다. 박재권 교수는 2010년에 한국일어일문학회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는 육사 교수진에 없는 걸로 볼 때 전역한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