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위대/역사 (문단 편집) == [[1960년대]] == 1960년대 일본이 경제호황을 누리면서 제2차 방위력정비계획(1962-1966년)과 제2차 방위력정비계획(1967-1971년)에 가면 자위대의 예산은 거듭 늘어나게 된다. 1956년에 일본 정부의 경제백서는 이미 일본이 전후가 아니라고 선언한 상태였다. [[안보투쟁]]과 같은 대규모 사태를 거치기도 했지만 조직은 계속 확대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60_Protests_against_the_United_States-Japan_Security_Treaty_07.jpg]] 1960년 [[안보투쟁]] 당시에 육상자위대는 [[계엄령|치안 출동]]을 준비하기도 했다. 4월부터 치안 출동 훈련이 실시되고 동부방면총감부에서 2만명이 대기 태세에 들어갔다. 도쿄 나카타초에 10만명의 시위대가 몰렸을 때 육상자위대는 긴장하고 계속 대기했다. 6월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방일할 예정이었다. 6월 15일에 경찰기동대에게 도쿄대학 대학생인 감바 미치코(樺美智子, 1937-1960)가 압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그날 밤에 아카기 방위청 장관을 호출했다. 그의 이복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대장성 장관은 적극적으로 자위대를 출동시켜 상황을 진압하라고 했지만 아카기는 반대했다. 만일 그때 출동했다면 자위대 탱크와 데모대가 충돌했고 일본의 분위기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됐을 것이다. 아카기는 만일 자위대가 출동하여 민간인 사망자가 나오면 일본 전역에서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단 이유와 동족 상잔을 일으킬 순 없단 이유로 반대하였다. 결국 일본 정부는 아이젠하워의 방일 연기를 요청하였고 6월 23일 신안보조약이 발효되자 기시 노부스케는 퇴임하였고 [[이케다 하야토]] 통산장관이 총리가 되었다.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미일 안보 협력의 체계는 한미일 3국의 군사협력으로 변화되었다. 자위대는 북방의 [[소련]] 외에 발발할 가능성이 있는 [[제2차 한국전쟁]]도 고려하게 되었다. 1963년도 통합 방위 도상 연구는 한국에서 전쟁 발발시에 [[주일미군]]을 따라 자위대가 출동한다는 시나리오이다. 미츠야(三矢) 연구라 불리기도 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안보조약의 3개국이 화살 셋처럼 활동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제복군인]]들이 작성한 보고서이다. 문제는 이 연구가 한일수교가 복원되기도 전에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는데 1965년에 [[사토 에이사쿠]] 내각을 비판하려던 사회당 오카다 하루오 의원이 문서를 입수하여 폭로하였다. 루머 만으로 따진다면 [[베트남전]]에 전투요원을 파견하기까지 했다고 하지만, 확인된 사항은 아니다. [[Cat Shit One]]의 [[고바야시 모토후미]]는 이게 루머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는 믿는 듯 하다. --고바야시 모토후미 이 인간이 극우혐한인 거 숨기고 있다가 커밍아웃 했던 거 생각해 보면 보나마나 그냥 전형적인 일본 극우들의 [[뇌피셜]]로 가득한 [[일본 대단해]] 망상이겠지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109453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