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자위대/역사 (문단 편집) == [[1970년대]] == 1970년대에 이르자 [[베트남 전쟁]]도 끝나가고 냉전은 [[데탕트]]에 이른다. 특히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1972년에 일본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대륙의 중국과 수교한다.[* 한국은 1992년, 미국은 교류는 하지만 정식으론 1980년에 한다.] 데탕트 직전 1970년부터 1971년까지 방위청 장관은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그는 4차 방위력 정비계획의 예산을 5조8천억엔으로 잡았다. 이런 확대에 아시아 각국은 반발한다. 1970년엔 [[미시마 유키오]]가 동부 방면대 총감부에 들어와 할복하는 [[미시마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사건 때문에 일본의 [[군국주의]]가 부활하려한다고 비판을 받았다. 당시엔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가 곳곳에 살아있던 탓에 1971년에 [[유럽]]을 방문한 [[쇼와]]는 봉변을 당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로 인해 자위대가 지금까지 눈가리고 아웅 식으로 규모를 확대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일본에서 떠올랐고 [[문민통제]]를 중시하는 [[미키 다케오]]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1976년에 이르면 방위력을 GNP 1% 수준으로 한다는 방위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는 일단 말로는 그랬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군축에 해당됐고 제복군인이 아닌 민간에 의한 방위방침이었는데 [[메이지 유신]] 이래로 일본에서 방위 방침이나 상비군 문제 등은 항상 제복군인의 몫이었다. 미키는 자위대의 조직까지 손볼 생각이었으나 해당 방침을 정한 1976년 10월부터 한 달도 못 되어 퇴진 당했고 [[후쿠다 다케오]]가 신규 총리가 되었다. 후쿠다는 매파였고 그나마 미키와 뜻을 같이 할 가능성이 있던 사회당 등의 야당은 자위대 위헌론이란 논리에 빠져 있어 협조하지 않았다. 거기다 [[제복군인]]들이 미키의 방침에 적극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후쿠다 내각에 새로 방위청 장관이 된 가네마루 신은 자위대 장군들을 적극 두둔했다. 이때 구리스 히로오미 통합막료장이 초법규 발언을 일으켰고 그 발언으로 사퇴하지만 문민통제에 저항하는데 성공했다. 구리스는 대령 시절에 핵 보유를 주장하는 논문을 쓰기도 했고 통합막료장에 취임하면서 통합막료회의의장이 내각이 아닌 [[천황]]에 의해 임명되는 [[대신]]과 같은 지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복군인의 최선임자가 현행 법규를 무시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강한 매파였던 가네마루 당시 방위청 장관조차 구리스에게 사임해달라며 안 하면 경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 이후로도 방위청장이나 방위성 장관은 민간에서 임명돼 [[문민통제]]가 잘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단기간에 임명되는 바지사장에 가깝고 실질적인 자위대의 대강은 장군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다. 결국 군축은 실패로 돌아가고 미일안보협력 등의 이유도 군축의 실패에 작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